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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참여민주주의 채수일 1. 9월에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총회를 치뤘습니다. 각 교단마다 가진 주요 쟁점들은 교단의 서로 다른 신학적 관심과 입장을 보여주었읍니다. 그러나 어느 교단이고를 막론하고 총회 때마다 있는 선거에 대한 평가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가 봅니다. 상대 후보에 대한 비열한 인신공격에서부터,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 헐뜯기, 금품수수 등에 이르기까지 총회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은 한국교회의 현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게다가 비전 없는 고함으로 일관하는 후보자들의 선거유세는 국민학교 반장선거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신학적 입장의 차이나 쟁점에 대한 견해차 때문에 표가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지역주의가 표밭을 가릅니다. 이런 일들은 그러나 교화사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막대한 돈으로 표를 매수한 것은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 때부터 이미 있어 온 일입니다. 325년 니체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콘스탄틴은 총대주교들에게 엄청난 여행경비를 제공했읍니다. 결과적으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자리는 물론 계획된 대로 비아리안주의자가 선출 되었읍니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통일된 교회, 아니 황제의 권력 밑에 교회를 두려는 콘스탄틴의 의도가 돈과 정치적 위협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미쉘 끌레브노의 새로운 이야기 교회사 제2권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소설적 재미를 주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거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교회의 선거는 참여민주주의의 축제여야 합니다. 그러나 패자에게는 선거가 축제일 수 없습니다. 승자는 패자와 그의 지지자들을 위로하면서 선거과정이 서로에게 남긴 긴장과 갈등을 해소할 때 선거는 축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패자는 자기를 지지한 세력과 함께 승자를 축하하면서 교회와 세계가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흔쾌히 승자와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참여민주주의가 돋보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성숙한 참여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세상을 향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교회를 세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적의 제거가 아니라 적대관계의 극복을 통하여 이웃사랑과 화해를 실현하도록 제자들은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물론 선거는 전쟁과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승자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패자는 할 말은 커녕 얼굴한번 처들 힘도 없이 사라집니다. 언젠가 패배의 쓴잔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줄 것을 맹세하면서. 승자와 그의 짖지자들의 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에 패자와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초대받지 않은 손님입니다. 잔치가 끝나고 일상으로 되돌아갔을 때에도 적대관계에 있던 이 두 집단이 다시 함께 손을 잡고 일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한나라 정치가들의 수준은 평균적 국민의 수준 이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와 성직자들의수준 역시 평균적 국민의 수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요. 세상이 성직자와 교회에 거는 최소한의 기대는 “평균적 국민의 수준”이 아닐것입니다. 교회 총회 때만이 아닙니다. 한국사회의 도처에서 한국 교회의 위신과 명예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목회자들의 가짜 신학 박사학위 취득, 신흥종교연구가인 탁명환시 살해사건, 장로 한약상 부모 살해 방화사건, 박홍신부의 주사파 발언과 공안정국 등은 교회가 세상과 다르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자초하는 사건들입니다. 요즘 창피해서 어디가서 목사라고 말히기도 부끄러운 심정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와 성직자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어디 세상 사람들이 교파를 구별해서 판단하나요. 2. 교회는 변해야 합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도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조건에 예속되어 있는 현실을 굳이 부정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만이라도 갖추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나는 그것의 하나가 참여민주주의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은 지금의 잘못된 관행 때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의 도전을 교회가 극복할 수 있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입니다. 21세기 종교의 미래를 전망하는 존 나이스비트는 그의 책 『메가트랜드 2000』에서 정통종교의 쇠퇴를 예견합니다. 정통종교의 권위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통종교, 특히 “정통기독교는 자신을 강요함에 있어서 권위주의적이며 비관용적이고 강제적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흑백으로 바라보게 하고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미래의 종교는 권위주의적 체제보다 다양한 영적 체험의 관용과 공동체성의 회복을 지향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취와 욕망충족이 아니라 자기비움과 욕망절제의 영성에 대한 희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움 없이 채움이 있을 수 없고, 자연과 이웃과의 관게가 단절된 채 추구되는 자기성취는 인류를 공멸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가 미래에 적응능력 있는 종교일 수 있기 위해서는 참여민주주의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여민주주의는 사람을 구별하기는 하지만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교회 안에서 제도적으로 소외될 수 없습니다. 참여민주주의는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 이긴 사람보다 진 사람편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참여민주주의는 교회 안에 있는 분열을 적당히 감추거나 값싼 화해로 위장하지 않습니다. 참여민주주의는 갈등을 있을 수 있는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다툼의 목적이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다툼의 방식이 민주적이도록 돕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