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에 시작한 지리산둘레길 걷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 체력적인 부담을 극복하며 이루어낸 대장정이었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지리산을 하나씩 가지게 되었고, 모두가 지리산이 되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전북 남원시 주천면을 잇는 15.9km의 20구간은 만만치 않았다
산동면사무소–현천마을(1.9km)–계척마을(1.8km)–밤재(5.2km)–지리산유스호스텔(2.7km)–주천안내소(4.3km) <총 15.9km>
막걸리 한잔
원촌마을은 구례군 산동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다.
면 소재지의 풍경은 70년대 시골장터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아담하면서 정겹다
인적 없는 마을의 골목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시작한다 ㅎㅎ
현천마을
현천마을은 19번 국도 밑으로 난 지하통로를 통해 들어간다
‘현천’이란 지명은 견두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현(玄)자를 닮았다는 데서 시작된다
현천마을로 들어가는 길가는 산수유나무 천지다
당산나무
현천마을은 일부러 지어놓은 테마파크처럼 아름답다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는 정자(玄溪亭)가 들어앉았다.
340년이나 묵다 보니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카페 자연스럽게
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 위에 운치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었다.
‘카페 자연스럽게’는 호숫가에서 올려다봐야 제멋이다.
러브 마크까지 단 저곳에 앉아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면 어떨까?
현천저수지
마을길은 산수유와 돌담이 어우러져 특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지리산둘레길은 현천마을 앞 저수지 둑을 따라가며 이어진다
연관마을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연관마을이다.
마을을 지키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있었으나 텅~ 빈 폐가들이 을씨년스러웠다
'연관’이란 지명은 설촌 당시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쉬어가자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운 길을 1시간 가량 걸었다.
아담한 정자에 들어가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갔다.
계척마을
계척마을은 산동면의 대표적인 산수유마을 가운데 하나다.
마을 앞에는 아담한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산수유 시목(始木)
계척마을 안길을 지나자 산수유 시목(始木)이 반긴다.
중국 산둥성의 한 처녀가 구례로 시집을 오면서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산수유나무는 마을 전역으로 퍼졌고 가난한 산촌의 생계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수유를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순신 성(城)
시목지 앞은 테마파크로 조성해 놓았다.
성을 쌓아 올렸는가 하면, 폭포와 분수까지 만들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서 ‘이순신 성’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계척마을의 신목(神木)
계척마을을 지켜주는 거대한 느티나무는 390년이나 묵었다.
나무 밑동에는 제단이 꾸려져 있었다.
계척마을의 지킴이 신, 즉 신목(神木)으로 삼은 것이다.
나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품고 있는 이런 흔적들에 애착이 많이 간다.
슬픈 산수유
이 마을은 산수유 시목(始木)이 있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산수유 마을답게 집집마다 돌담 너머로 산수유나무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일손이 모자라서인지, 가격이 너무 낮아서인지 그냥 매달려있는 붉은 열매가 슬프다.
오름길로 들어서다
지리산둘레길은 계척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간다
이제 밤재로 올라가는 오름길로 들어선다
밤재는 남원 주천면 배덕리와 구례 산동면 원달리를 잇는 고개이다.
편백나무숲
계척마을에서 밤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조성한 숲이다.
구례군에서 조성한 이 숲에는 수령 30년을 헤아리는 수만 그루의 편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지리산둘레길은 편백나무숲 가운데를 관통한다.
대나무숲
편백나무 숲길이 끝나면 대나무숲이 나타난다.
대나무숲은 속세에서 짊어지고 온 헛된 꿈을 버리라고 속삭이는듯 하다.
밤재 가는 길
밤재로 올라가는 길은 구비구비 끝없이 이어졌다
과거에는 19번 국도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나 1988년 밤재터널이 뚫리면서 옛길이 됐다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배낭 속에 남아있던 간식거리를 먹으며 걸었다.
밤재(해발 490m)
산자락을 몇 번이나 돌고 돌아 드디어 밤재에 올랐다
밤재는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고리봉, 묘봉치, 세걸산 등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짙은 미세먼지 때문에 시야는 꽝~이었다.
늦은 점심식사
밤재의 양지쪽에 둘러앉아 늦은 점심 식사를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모든 음식은 천하일미였다.
필립보 신부님께서 가져오신 양주 한 모금은 짜릿한 희열을 주었다
왜적 침략길 불망비
밤재를 내려가는데 ‘왜적 침략길 불망비’가 시선을 끌었다.
밤재는 정유재란, 동학 농민혁명, 일제 식민시대 등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은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하여 1만여 명의 민관을 도륙했다.
갑오년엔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의 토벌군이 되어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비문은 ‘극일(克日)과 평화의 새로운 다짐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미끄럽다
밤재를 내려가는 길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여간 미끄럽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버티면서 내려갔다.
이곳에서부터는 구례땅이 아니라 전라북도 남원땅이다
꼭두마루재(해발 338m)
길은 찻길로 내려선 다음 지리산유스호스텔 옆길로 다시 올라간다
오르막의 끝인 꼭두마루재에서 잠시 여유를 가져본다
감모재(感慕齋)
꼭두마루재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감모재(感慕齋)다.
서산류씨의 재실로 뜨락에서 자라는 300년 수령의 배롱나무가 얼굴마담이다.
류익경(柳益逕)의 정려 비각
감모재 앞에는 조선 성종 때의 효자 류익경(柳益逕)의 정려 비각이 있었다.
류익경은 단지를 하거나 자신의 허벅지 살을 삶아 드리는 게 보통인 다른 효자들과 달랐다.
류익경은 어머니의 똥 맛을 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다고 한다.
장안저수지
용궁마을 입구에는 장안저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저수지는 일제시대인 1945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용궁마을
지리산둘레길의 마지막 풍경은 용궁마을이다.
용궁마을은 영제봉에서 보는 풍경이 마치 바닷속 용궁과 같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 수는 없지만 아늑하고 평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드디어 끝이다
드디어 지리산둘레길의 종착지에 도착하였다
주천안내선터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환영객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이미 커다란 지리산이 들어와 있었다.
고맙습니다
3년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현수막에 모두 사인을 하였다.
우리를 인도해주신 주님께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였다.
이 현수막은 산악박물관에 영구 보존할 것이다 ㅎㅎ
시작과 끝은 하나다
3년 전에 지리산둘레길 완주를 다짐했던 시작점에 섰다.
그러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새로운 길에서 다시 만나서 새로운 꿈을 꿀 것이다.
숲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생명의 지리산을 만나는 길 그리하여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대 안의 지리산을 맞이하여 모신다는 일이네
껴안아 준다는 것이지 사랑한다는 것이야
어느새 가슴이 열릴 것이네
이윽고 눈앞이 환해질 것이네
그대가 바로 나이듯
나 또한 분별을 떠나 그대이듯이
이제 그대와 내가 지리산이 되었네
이제 그대와 내가 지리산 둘레길이네.............................................박남준 <지리산 둘레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