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는 실제비용을 말한다. 실비집이 술집이고 보면 실비는 술값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안주는 무료라는 의미가 된다. 안주뿐 아니라 주안상을 차리기 위해 들어간 손품 발품까지 모두 공짜라는 뜻이다. 살기가 빠듯했던 6.70년대 고달픈 일과를 마치고 하나 둘 모여든 선술집에서 막걸리에 쉰 김치조각을 씹어가며 희노애락을 저울질했던 서민들의 애환이 지금의 실비집이 아니었던가. 크게 돈 들어가는 안주가 없어도 술값만 받고 원가로 장사하는 인심 좋은 박리다매식 상술도 좋았고 손님 입장에선 그래도 공짜 안주를 위안삼아 주전자 하나 가득 나오는 막걸리에 흥겨웠으니 이래저래 실비집은 서민들 삶의 한 자락을 엮어왔던 질곡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 셈이다.
그런 실비집이 지금은 대표적인 술집으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이곳 삼천포 사천은 그야말로 실비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차로 가는 술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실비집에서 아예 진을 치는 양상이고 보면 그 위력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엇보다 그 옛날 선술집의 쉬어빠진 김치로 대변되는 무료 안주의 대 변신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지리적으로 항구를 끼고 있다보니 안주는 그 다양성과 질적 양적인 면에서 술값을 무색케 한다. 물론 실비집마다 특산품과 메뉴의 면모가 약간의 특색을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장의 손맛과 손님들의 입맛이 빚어낸 독창적 작품으로서 애교로 봐 주어도 될 성 싶다.
손님의 술 진도에 맞추어 안주를 내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왕창 수라상을 차려주는 후덕한 주인장도 있다. 허나 그 면면을 보자면 싱싱한 회와 새조개, 전복 등 조개류와 낙지 쭈꾸미 문어에 돼지, 쇠고기 등 육산품을 섞어 조화를 이루고 살 오른 생선에 왕소금 뿌려 짭짤하게 구워내고 한잔두잔 취기가 오르면 이에 뒤질세라 얼큰한 해장국물까지 대령하니 어느 객인들 술을 마다하리오. 과하면 독이 되는 게 술이지만 술도 염치가 있다면 이만한 성찬에 독이 되다가도 약이 되어야 할 터 과연 실비의 진수가 아닐 수 없다.
술집은 안주 못지 않게 분위기도 관건이다. 한 잔 술에 하루를 갈무리하고 얽히고 설킨 일상의 실타래도 풀어 놓는 곳이 실비집이다. 얼굴만 돌리면 다 형님이고 아우고 친구다. 안부가 오가고 반가움에 소주잔 건네는 그들의 얼굴이 바로 세상을 엮어가는 모자이크의 요소들이다. 대 여섯 평 남짓 비좁은 공간은 그래서 하늘보다 더 넓은 서민들의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비워지고 쌓여가는 소줏병 만큼이나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생의 희노애락들도 시원하게 풀려갈 것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나는 술 예찬론자도 아니고 실비집 홍보대사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네 서민들의 일상들이 탈 없이 너울너울 희망차 지기를 바랄뿐이다. 그 희망이란 게 스스로를 거리낌 없는 소통의 울타리로 엮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비집도 여느 공간과 다름없다. 술이 있어 예외의 상황이 항상 우려되므로 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덧붙인다.
오늘도 실비집에 들어선다. 벌써부터 만원이다. 잽싸고 친절하게 안주를 차려주는 주인장의 얼굴엔 술잔을 기울이는 이웃들의 하루가 그대로 투영된다. 북적거림이 더해진다. 실비집 술맛도 사람들의 사는 맛도 더불어 진해진다. 술은 돈 주고 마시고 안주는 공짜로 챙겨먹고 그래서 그들은 사는 맛을 덤으로 얻어간다. 실비집이 우리네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으로서 제 역할을 다해 주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지난 초에 문조리 님과 함께 갔던 집도 실비집인데..혹시 그집 아닌가 모르겠네요.//실비집에서 한잔 나눌 기회가 있기를* ^^.
ㅎㅎ 그리하면 울매나 좋겟습니까...기회가 잇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