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임진강 야영객 6명 실종
북한의 예고 없는 댐 방류로 강 하류에 있던 낚시꾼과 야영객 6명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
6일 오전 6시쯤, 경기도 연천군을 지나는 임진강의 한 다리밑에서 갑자기 불어난 물로 야영객 6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야영을 하던 40대 추정 남성 5명과 근처에서 낚시를 하던 김 모(39)씨 등 6명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쓸려 내려간 것이다.
한강홍수통제소와 기상청 관계자는 "국내에 비가 많이 내린 것이 아니어서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로 고려된다"며 "북한 황강댐에서 방류를 하면서 사고가 난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관계자는 또 "최근 북한에 소량의 비가 내린 기록이 있다"며 "평소 2.4m 수준이던 수위가 당시 최고 4.69m까지 치솟은 것으로 보아 댐의 수문을 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북한 황강댐은 건설때부터 수많은 우려가 제기됐다.
임진강 상류에 위치한 황강댐은 개성공단에 공업용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한다는 목적으로 북한에서 지어져 지난 2007년 말부터 물을 가둬 예성강으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수자원 전문가와 환경단체 회원들은 "황강댐이 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경기 연천군과 파주시의 용수부족이 불가피하며 다량 흘려보낼 경우 자칫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길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2001년] 머리카락 굵기의 25만분의1인 극초미세 나노선(線) 국내개발
국내 연구진이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집적도(集積度)가 높은 나노선(NANO線)을 개발해 세계 나노기술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포항공대 김광수(52) 교수 연구팀은 2001년 9월 6일 지름이 0.4나노미터인 은(銀) 나노선 배열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나노기술은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크기의 물질을 제어하는 기술로 세계적으로 개발 경쟁이 치열한 분야. 이번에 개발한 나노선 배열은 작년 미국에서 개발한 세계 최고 수준의 나노선 배열보다 집적도가 200배 높은 것이다.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미국 사이언스(Science)는 이 연구결과를 10월 12일자 표지 논문으로 실었다. 사이언스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연구결과가 사실임을 확인하자, 7일 이례적으로 속보를 싣는 ‘익스프레스’를 통해 논문내용을 미리 소개했다. 세계 과학계는 특히 이 연구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홍병희(30)씨가 포항공대에서 아직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젊은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1997년]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 입적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이 1997년 9월 6일 토함산 불국선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85세, 법랍 54세였다. 1912년 함남 신흥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3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래 조계종 총무원장, 신흥사, 동화사, 법주사, 불국사 주지를 거쳐 원로회의 의장을 지냈다.
월산 스님은 경허 만공 금오 스님으로 이어지는 선맥(禪脈)을 계승한 대표적 선승이었다. 월산 스님은 관광사찰이던 불국사에 1974년 선원을 열어 제자들에게 쇠락해가는 선맥을 전수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만공 스님에게서 받은 화두 "이 뭣고"를 평생 간직한 월산 스님은 예산 수덕사가 본산인 덕숭문중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으면서 토함산 자락을 울리는 사자후로 한국 선종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저 참선뿐이야. 이것 만큼은 죽을 때까지 할거야"고 늘 말하던 월산 스님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깨달음의 길에 도달할 수 있으며, 선이란 해탈과 자재를 여는 요체라는 법문을 내리곤 했다. 월산 스님은 한때 불교계를 뒤흔들었던 돈점(頓漸)논쟁에 대해서는 초연한 입장을 견지했다. 순천 송광사와 합천 해인사가 깨달음을 놓고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설전을 벌일 때 "아무러면 어떤가. 누가 내게 와서 어느 게 옳으냐고 하면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할거야. 다들 부질없는 짓이지"라며 제 갈 길을 홀로 걸었다. /조선
[1994년] 전 문교부장관 박일경씨 별세
1942년 경성제국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47년 대구대학교 조교수,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조교수, 1951년 법제처 1국장, 1960년 국무원 사무처 법제처장, 1961년 법제처장, 1962~63년 문교부장관을 지냈다. 1963년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75년까지 경희대학교 조교수를 지냈다. 1969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1969~75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장, 1971년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1973년 헌법위원, 1975년 명지대학교 학장, 1980년 입법위원회 회원, 1981년 헌법위원, 1982년 서울시교육위원회 위원장, 1984~87년 명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국민문화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저서로는 〈신헌법〉·〈새헌법〉·〈제5공화국헌법〉 등이 있다.
[1970년] 아랍게릴라, 여객기 4대 잇따라 하이재킹 ← 하이재킹된 BOA사의 VC-10기(왼쪽)가 카이로에서 최초로 폭파됐다. TWA707기(가운데), 스위스 항공 707기(오른쪽)
1970년 9월 6일 유럽 각 도시를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여객기 4대가 잇달아 납치되는 세계항공 역사상 최대의 연속 하이재킹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7일,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범행에 대한 성명을 발표, 구류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석방과 함께 사건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동평화협상을 와해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하이재킹된 여객기 4대 가운데 이스라엘의 엘-알(EL-AL) 항공기는 기내에서 범인이 사살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팬아메리칸 항공의 보잉747점보여객기는 7일 아침 카이로로 강제 착륙돼 하이재킹된 여객기 중 최초로 폭파됐다. 불행 중 다행히도 승객들은 폭파전 게릴라들에 의해 비행기 밖으로 내보내진 후였고 폭발 후 범인들도 체포되었다. 이에 국제안보리 이사회가 9일, 만장일치로 인질의 즉각석방 요구를 결의하며 각국의 적십자국제위원회가 교섭을 시작했지만, 하이재킹된 스위스 항공 707기와 TWA사의 707기가 12일 요르단 사막의 한 비행장에서 또 폭파됐다. 이에 게릴라들은 이 비행기폭파가 서방 3국(미국ㆍ이스라엘ㆍ영국)정부가 그들의 요구에 수긍하지 않고 지연시킨데 대한 1단계 경고조처였다고 말했다.
이후 9월 26일ㆍ27일 양일간에 걸쳐 피납됐던 나머지 인질들이 전원 석방됨으로써 20일간에 걸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사상최대 공중납치 사건이 마무리됐다.
[1968년] 스와질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스와질란드(스와티어: Umbuso weSwatini)는 아프리카의 군주제 국가이다. 수도는 음바바네와 로밤바이다.
아프리카의 내륙국이며,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모잠비크 사이에 있다. 4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동부에는 사바나, 북서쪽에는 열대 우림 등이 나타나며 다양한 풍경이 존재한다. 스와질랜드 내로 강도 많이 흘러가는데 대우수투 강(the Great Usuthu River)이 대표적이다.
1907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국에 대해 그 영유(領有)를 요구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에 반대하는 영국은 이를 거부하고 보츠와나 ·레소토와 함께 한 사람의 고등판무관(高等辨務官)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후 1963년 10월에 고등판무관제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판무관하에 입법심의회와 행정심의회를 설치하였으며, 1964년 6월에는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1968년 9월 6일에 마침내 독립이 실현되었다.
[1967년] 청양 구봉광산 광부 양창선씨 16일 만에 구출 ← 구출돼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는 양창선씨
1967년 8월 22일 낮 12시40분 경 충남 청양군 사양면 구봉 광산서 광부 양창선씨가 수갱을 수리하는 중 갱도가 무너져 매몰당했다. 구조작업을 시작한지 나흘 만에 지하 1백25m지점에 갇힌 양씨와 지하 2백50m지점의 제2배수장을 전화로 연결하고 26일 오후 1시부터 본격 굴진작업에 나섰다. 양씨는 집에서 가져간 도시락과 지하수로 연명했다.
이때부터 전국의 신문과 방송이 양씨 매몰사건을 대서특필,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매몰 열흘째인 31일에는 민병규 박사 등 의료진의 도움으로 지상에서 지하에 갇혀있는 양씨와 전화진단까지 했다. 이같은 전국민의 관심 속에서 양씨는 매몰당한지 15일 8시간35분 만인 9월 6일 밤 9시15분에 극적으로 살아나왔으며, 건강은 대체로 양호했다./조선
[1966]년 남아공 총리 페르부르트(Hendrik Frensch Verwoerd, 1901~1966) 피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 어릴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하였으며 스테렌보시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에 유학하였고 1927년 교수가 되었다. 1937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일간지 《트란스발러 Die Transvaler》의 편집장으로 일하였다. 1950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원주민문제담당장관에 취임하였다. 독자적인 아파르트헤이트정책(Apartheit: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격리정책)을 추진하였고 1958년 총리 J.스트리담이 죽자 후임으로 9월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의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은 흑인들의 격력한 시위를 일으켰고 1960년 4월 정신이상자인 백인 농민의 암살미수를 겪기도 하였으며, 1966년 9월 6일 의회에서 피살되었다.
[1956년] 화가 이중섭 사망 ← 이중섭이 그린 `자화상`(1955).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화가 이중섭(李仲燮)의 삶은 6·25를 전후해 둘로 나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던 젊은 시절과 월남(越南) 이후 겪어야 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삶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각광받던 중섭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5년. 10년 만이었다. 곧 그를 쫓아온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하고 함남 원산에 둥지를 틀었다. 짧았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분단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업가로 원산에서 승승장구하던 형이 처형당한 것이다. 1950년 12월 중섭은 가족과 함께 원산을 떠났다. 고행의 시작이었다. 부산을 거쳐 제주에 일시 머문 중섭은 대표작 ‘황소’와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그리며 모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52년 7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홀로 된 중섭은 고독을 곱씹으며 방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붓을 잡았다. 대폿집에서도 그렸고, 부두에서도 짐을 부리다 짬이 나면 그렸다.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다. 이 시기 거의 매일 계속되는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은 중섭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1956년 9월 6일 중섭은 마침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고달픈 생애를 접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3일간이나 방치됐고, 침대에는 밀린 18만원의 입원비 계산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1950년] 한국군에 여군 등장
1950년 9월 6일 6·25전쟁 중이던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로써 한국군 조직에 최초로 여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51년 11월 여자의용군교육대가 해체되면서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여군과로 편입되었고, 1955년 7월 여군훈련소가 설치되어 여군의 훈련을 전담했다. 1959년 1월 여군과가 육군본부 여군처로 개편되었으며, 1970년 12월 여군단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본래 여군은 남성들의 전투활동을 지원·보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창설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다양한 교육내용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통해 실제상황에 대처할 만한 능력을 소유한 군대로 발전했다. /브리태니커
[1914년] 독일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대패한 마른 전투 개시
마른전투(Battle of Marne)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6~12일에 프랑스 파리의 북동쪽 마른강(江)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파리의 공방(攻防)을 놓고 벌인 전투이다.
개전 당시 독일의 작전계획으로는 중립국 벨기에까지 포함하여 우익(右翼) 쪽을 대선회(大旋回)하여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파리의 남서 방면으로 편익(片翼) 포위하여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우익을 강화하라’는 슐리펜 원수의 유언을 무시한 독일의 참모총장 H.몰트케는 우익 병력을 축소했기 때문에 포위력이 둔화되어 마른강 선(線)에서 J.조프르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주력부대의 반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엔강(江)까지 후퇴하였고 독일의 전격작전이었던 슐리펜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후 서부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몰트케 대신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naver
[1903년] 윤극영 출생
동요 작곡의 선구자이다. 도쿄 음악학교의 사범과 재학시절인 1922년 방정환·조재호·진장섭·손진태·정순철·고한승·정병기와 함께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이끌었다.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했다. 1924년 동요 〈반달〉을 작곡하고, 한국 최초의 노래단체인 '달리아회'를 조직·지도했다. 일본 창가 말고는 부를 노래가 마땅히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반달〉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널리 불렸던 노래였다. 1926년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을 펴냈다.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꼬부랑 할머니〉·〈흐르는 시내〉·〈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려 있다. 그해 북간도로 이사한 뒤에도 동요 작곡을 계속했고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400편 이상의 동요를 남겼다. 1968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창경궁에 세워졌고 지금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제1회 소파상 수상(1956), 고마우신 선생님(서울교육대학 제정)에 추대되고,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300여 곡의 동요 이외에 동요작곡집으로 《반달》 《윤극영 111곡집》을 내놓았다
[1901년] 매킨리 피습사건 발생
1901년 9월 6일 미국 대통령 매킨리가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에서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촐고츠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매킨리 집권 당시 미국은 1895년에 일어난 쿠바 독립운동과 그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가혹행위에 대한 소문들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매킨리는 이 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스페인과 전쟁(미국-스페인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협상에서 매킨리는 패전국 스페인의 해외식민지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둘 것을 주장했고, 이로써 미국은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 매킨리는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미루었던 국정 운영에 박차를 가하던 중 총격 테러를 당해 그로부터 8일 후 사망했다.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브리태니커
[1894년] 독립운동가 장두환(張斗煥) 출생
1894. 9. 6 충남 천안~1921. 4. 28.
1917년 친일주구의 처단과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풍기의 광복단(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김한종(金漢鍾)과 같이 충청남북도 담당책임자로 활동했다. 충청도 지역의 친일부호들의 명부를 작성하는 한편, 유중협(柳重協)·강석주(姜奭周)·김재창(金在昶)·김상준(金尙俊)·이재덕(李在德)·김경태(金敬泰) 등을 입단시켜 군자금 조달에 진력했다. 1917년 11월 대한광복회 명의의 경고문을 작성하여 이석구(李錫九)·정인경(鄭仁敬)·김영두(金永斗) 등 100여 명의 부호들에게 독립자금을 기부할 것을 통고하고 모금활동을 했다. 1918년 1월 24일 임봉주(林鳳柱)·김경태와 함께 친일부호인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했다. 1918년 봄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조직이 발각되어, 많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중 1921년 4월 28일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60년] 미국의 사회개혁가·평화주의자 애덤스(Jane Addams) 출생
1860년 9월 6일 태어남 / 1935년 5월 21일 죽음
애덤스는 북아메리카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헐 하우스의 창시한 미국의 사회개혁가·평화주의자이다. 애덤스는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을 여행하던 중 런던의 화이트채플 산업지구에 있는 사회복지기관인 토인비 홀을 방문하고, 미국에도 그와 비슷한 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귀국 후 애덤스는 시카고 노동자지구의 빈 집을 얻어 헐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1889년 9월 18일 이사했다. 헐 하우스는 자원봉사자나 미래의 사회사업가들에게 사회에 봉사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고 일하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이밖에도 애덤스는 최초의 소년심리원법과 공동주택법, 여성노동자의 1일 8시간 노동제 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사법제도 정립을 위해 힘썼으며,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옹호했다. 1910년에는 전국 사회사업가 회의에서 최초의 여성 의장이 되었으며, 1915년 국제 여성회의 의장이 되어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연맹'을 설립했다.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와 함께 1931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브리태니커
그밖에
2009년 한국,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 종합우승
2002년 제6회 서울평화상에 구호단체 ‘옥스팜(Oxfam)’ 선정
2001년 IPI(국제언론인협회)-WAN(세계신문협회),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국에 선정
2001년 한국화가 황창배 사망
2000년 사상최대의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개막(~9.8)
2000년 오가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제5회 서울평화상 수상
1999년 한국-리비아 문화협정 체결
1999년 한국영화로는 12년 만에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거짓말’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
1999년 환경부 자연환경조사에서 국내 미기록생물 82종 첫발견 발표
1998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별세
1994년 소설 ‘쇼군’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 사망
1994년 PKO 국군의료지원단 서부사하라 파견
1991년 라트비아 독립
1991년 에스토니아 독립
1991년 리투아니아 독립
1987년 영국의 언론인 헤일리 사망
19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 한일 정상회담 - 일황(日皇), 유감의 뜻 표명
1982년 아랍연맹, 모로코서 정상회담 개막 (~9.8)
1982년 8차 한국-벨기에 통상장관회담 개막
1982년 제37차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MF(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 개막(토론토)
1981년 폴란드, 동구 첫 자유노조대회v
1980년 폴란드 키에레크 당제1서기 실각. 후임에 카니아 선출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으로 미 법무부에 기소
1977년 일본-북한, 민간어업협정 체결
1976년 소련 빅토르 이바노비치 벨렝코 중위, MIG 25A형 신예기 몰고 일본 북해도 하코다데에 비상착륙. 미국에 망명 요청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분할관리 합의서 교환
1975년 ‘보이스 오브 코리아’ 잡지를 창간한 독립운동가 김용중 사망
1974년 최두선 별세
1969년 신민당, 박정희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
1968년 스와질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드골, 서방지도자로서는 전후 처음으로 폴란드 방문
1966년 남아공 페르뵈르트 수상, 의회서 백인자객에 피살
1958년 중부에 13년만의 폭우
1952년 세계저작권조약(UCC) 발족
1945년 장덕수. 조병옥. 김병로씨 등 한국민주당 발기 선언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주석 이승만)
1937년 일제, 수피아. 숭일 등 4개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처분
1926년 독일, 국제연맹 가입
1923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출생
1914년 독일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대패한 마른 전투 개시(-11일)
1899년 천연두 예방규칙 반포
1899년 존 헤이 선언. 미국, 열강에 청국(淸國)의 문호개방 및 기회균등을 제의
1890년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원하경(언더우드) 출생
1872년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의 3제(帝) 베를린서 회담(3제동맹 체결)
1766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