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봉림대군은 형과 함께 청의 볼모로 갔습니다. 봉림대군 역시 주자학의 상대성 원리들이 있다는 걸 알았고 세계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소현세자와 효종은 서로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하게 배운게 있고 느낀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정작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 형님이셨던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기술도입이라든지 천주교도입이라던지.. 주자학의 상대성 원리들 도입은 전혀 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놓고 북벌을 준비하려고 하는 모습은 어찌보면.. 효종에게 있어서 딜레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효종 스스로도 명에 있고 청에 있던 서양문물에 관련된 책들을 보았을 것이며 동시에 배웠을 것입니다. 형의 영향을 봤을때 천주교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고 주자학의 상대성 원리적 이론들에 대해서 최소한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효종의 북벌을 하면서 하는 일은 주자학의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서양의 문물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도 없습니다. 하멜일행을 받아들여서 화포를 제작한 것까지는 좋으나.. 결과적으로 제대로된 발전된 서양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동시에 효종 스스로가 군권을 바탕으로해서 서인정권을 억제함과 동시에 주자학의 상대성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송시열에 대한 처분을 봐도.. 효종은 주자학의 상대성 원리로서 그와 맞설세력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고 서인을 자기편으로만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덕일씨의 -조선왕 독살사건-에서의 효종에 관해서를 본다면.. 효종은 송시열과 서인을 끌어들이려고만하지.. 서인들이 특히 노론이 갖고 있는 주자학의 상대성 이론을 갖춘 자기친위세력 구성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서인 특히 노론에 의거해서 어의 신가귀에 의해 독살설이 있는 왕이 되고 결과적으로 북벌도 땡칩니다.
효종스스로가 정말 북벌을 시작하려고 했다면.. 자신 스스로의 정치적 이점이 되는 주자학의 상대성 이론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서양기술을 받아들이고 또한 노론계 서인들을 견제할수 있는 남인계열을 중용했어야하는게 옳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효종이 북벌을 원했다면.. 정조처럼 했어야 가능한 일이 었다 봅니다. 정작 기존의 조선의 문제점을 그대로 가려고 한채 북벌이라는 것에 매진한 것은 어찌보면 효종 스스로 둘째라는 문제때문에 이어진 그저 허울뿐인 정통성 목적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효종 스스로 북벌을 정말 이를 갈정도였다면.. 사회적인 개혁과 더불어서 소현세자가 이루려고 했다는 것들을 최소한 일부라도 했어야 맞다봅니다. 그러면서 군사력 증강을 했다면.. 자신의 아들때 이어서.. 북벌준비라든지 등의 고려를 했다면.. 숙종때 일어났던 삼번의 난때 조선은 반드시 기회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들과 연계해서 청을 공격했다면.. 청은 2개 전선 유지라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조선이 원했던 북벌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효종은.. 군사력 증강만을 한다고 하면서도 조선의 기본적인 서인들 특히 노론을 얼토당토하지 않는 척화론을 상대할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도입해서 자기친위세력도 만들지도 않습니다. 사회적인 개혁도 제대로 수행도 안했지요. 경제적인 해결을 어느정도 했다는 것은 존재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개혁조치가 없었던 그의 북벌은.. 의미가 있었는가 생각됩니다.
송시열과 독대에서 말로는 중국 한족과 손을 잡음과 동시에 포로로 끌려가있는 조선인들과 합심하자는 말과 더불어서 구상은 잘했을지는 몰라도 정작 여건조성은 완전하게 실패한 왕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조선군 조총병들이 나선정벌에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효종 스스로 무치를 중시하여 군사력 증강에 힘을 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작 경제적인 여건문제나 정치적인 여건문제/외교적인 문제등도 해결하지 않은채 북벌에 대한 구상만 이야기한 그가 과연 북벌을 실제로 일으키려고 생각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말이 반복됩니다만.. 저는 효종의 북벌의 행보는 단순하게 소현세자가 죽고 나서 자신이 세자가 된다는 것에서 반대하지 않고 원손에 대해서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둘째에서 왕위에 오른점에서의 정통성 확보문제만을 두고 한 행동으로 보게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북벌이라는 행보자체나 주체나 말입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왕권강화로서 서인들 입장에서의 제1사대부로서의 왕이 아니라 남인들이 주창하는 형태의 충성을다받쳐야하는 존재로서 자리매깁해가자 송시열등의 서인 노론쪽에서 손을써서 효종을 독살설로 만든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분들은 효종의 북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의 북벌의 계획이 단순하게 복수심등의 목적이었을까요? 아니면 왕권강화차원에서의 정치적 이용이었을뿐이라 생각하시나요?
첫댓글 정치적 수단맞습니다.
송시열조차도 당대의 북벌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직시한 걸 보면, 임금이 현실을 정말 몰랐을까 싶습니다. 이 경우, 정치적 의도를 잠시 고려해야 하는데, 북벌(반청복명 취지)을 주장함으로써 대외적 성리학적 정통론을 무기로 삼아 자기 자신의 2대에 걸친 대내적 정통성 문제(반정으로 집권한 인조, 맏이가 아니면서 등극한 효종)를 다소 희석시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송시열의 북벌반대주장은 자신의 주자학에 근거한 것이며 동시에 송시열의 북벌관은 제가 알기로 청이 약해지면 국교를 끊는 수준의 사대주의적 극치적인 행동으로 압니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과연 북벌이 어려웠을까 입니다. 북벌에 대해서는요. 우선적으로 만주족은 200만이고 우리는 약 1천만에 가까운 인구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훨씬 국력적으로 우세했고.. 당시 한족들도 거부감등을 갖고 있었다는 등의 점은 효종은 정확하게 본 것으로 압니다. 효종이 소현세자+정조가 한일을 하면서 군비확장을 해나갔다면.. 북벌의 성공가능성은 충분했다고 봅니다.
나선정벌에서조차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청군이 조선군의 증원을 받아서 이겼다는 사실에 주목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점령한 곳을 완전하게 통치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물론 당시 청이 뜨는 해였고 국력신장을 지속한바 있다는 점은 분명히 감출수 없다는건 분명합니다만.. 효종의 북벌 구상론은 확실하게 계획이 있는 형태로 기억합니다. 다만 당시 사대부들 스스로 이를 분석하려는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의 경제력이 전후라서 처참한 수준이란 점을 고려한다면 인구 많다고 전쟁한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영청군대 3만 양성하다가 재정 파탄난 거에다가 급격한 세제개편(대동법의 확대실시)로 인한 경제혼란, 소빙하기로 인한 전염병창궐과 대량의 아사사태 등을 고려한다면 당시 조선은 도저히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여건이 안 되었죠.
당시 정성공이라든지 다른 남명정권하 군벌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패한 이유 중 하나가 재정압박이었다는 겁니다. 정성공을 제외하고는 전시재정을 뒷받침할 만한 재력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그 풍요로운 양자강 중,하류 지방과 사천지방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던 거죠. 이런 남명정권과 연계하면서 북벌해봤자 결과적으로 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 봅니다.
당시 조선군의 무장상태가 건국이래 가장 충실한 편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0만이상의 상비군, 철포 3만정(아퀴버스, 머스켓 혼합), 군량미 (백미기준)100만석으로 알려져있는데 이 정도면 남명정권하에서 가장 강력했던 정성공군이 병력 17만, 전선 500척, 철포 수천정 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화력에서는 아무래도 남명군보다 앞섰을 겁니다. 하지만 화약제조가 문제였죠. 초석대신 염초를 쓰는데 이 염초를 자체생산가지고는 화약 소비량을 도저히 충당할 여건이 안되었던 점도 문제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북벌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밀리님. 서양문물 수용이 왜 북벌의 전제가 되는 것인지 이해가... 당시 교조주의화 된 조선 성리학 사회에서 소현세자 같은 사람은 아주 소수의 선각자란 점을 간과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당시 청에 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의 인식세계를 반드시 무너뜨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렇게 인식 변화를 쉽게 할 수 있는 소현세자가 괴짜이자 이방인일 뿐입니다.
서양문물 수용은 어떻게 보면 조선의 체계의 변화구성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되잖습니까? 결국 이는 전쟁을 수행할수 있는 경제력 변화와 군사력 변화를 의미해서요.. 홍이포인가만해도 명의 기술을 도입했지만.. 원천적으로 명에서 들어온 서양 기술을 바탕으로 조선이 제작한 것으로 압니다. 그외 여러가지 무기체계 소총부터만해도 서양문물을 통해서 더 강력해질수 있는등 요건이 있어서요. 또한 서양문물 수용에 의거한 조선체계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특히 경제적에서의 고구려때처럼 원정도 가능한 수준으로 이루어 줄수 있어서 말입니다.
당시 조선의 농업중심및 경제발전의 문제점만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으로서 기존의 잘못된 것을 타파한다면.. 개선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조시대 정조와 실학자들의 주장을 봐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서양문물을 전하는 서적이 정약용선생이 거중기개발에 결과적으로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습니다.그래서 저는 그런 전제를 두고 서양문물을 받아드린다는 것에서의 북벌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문물 수용은 북벌 방법론에 대한 단 하나의 방법이다 란 전제가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건 서양문명에 지배를 받고 있는 현 시점에서의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지요. 당시는 성리학이 주류인 시대입니다. 도학 실천이 세상을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기의 우열을 통해 북벌의 성공을 가늠한다고 인지할 수 있었을까요? 효종의 북벌론은 기존의 조선 문물을 고전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도 북벌이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란 얘기입니다. 단지 도를 지켜낼 것인가가 관건지요. 따라서 효종의 서양문물 수용 여부가 북벌을 단지 정략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라란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죠.
네.. 말씀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