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십자가
성경 말씀: 시편 1편; 고린도전서 2:18-25
요약
언약의 지혜는 언약의 삶의 펼침을 위해 보입니다. 언약의 삶은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언약의 지혜는 펼쳐지는 언약의 삶에 머묾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무모하게 하는 충동적이지 않아 언약의 삶에 머뭅니다. 따라서 언약의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말씀에 머무는 이들은 지혜롭습니다.
율법과 지혜
구약은 잠언, 욥기, 그리고 전도서와 같은 지혜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세상 나라로 사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구약은 언약의 삶으로 서사되긴 하지만, 세상 나라의 삶의 형태나 추구의 내용을 반영합니다.
율법은 세상에서 사는 삶의 기본 표현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추구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삶에서 지혜의 추구는 당연합니다. 시편 1편은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읊습니다.
창조에 있는 내용도 지혜의 시각으로 보아집니다. 창조된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지혜의 표현입니다. 지혜는 좋음이나 나음을 추구합니다. 지혜는 어떻든 하나님의 창조의 기본 틀로 이렇게 말해집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아났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26).”
구약은 세상의 삶을 창조의 비전과 율법의 틀로 세웁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지혜를 추구함으로 전개됩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율법으로 설정하니, 그들의 추구하는 지혜는 율법에 기본적으로 반영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지혜는 언약에 근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음이나 나음을 추구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그들의 나은 삶을 위해 지혜의 가르침을 들으려 합니다. 성현의 가르침은 지혜이고, 철학(philosophy)은 지혜의 사랑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잘살 수 있을까 생각하니, 그에 대한 가르침으로 지혜가 들려집니다. 지금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과학적 지식은 지혜의 가르침으로부터 파생됩니다. 그렇게 과학이 철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 또한 삶에 지혜롭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약의 지혜는 세상 지혜와 다릅니다. 세상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요동합니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지혜롭게 바라보아져야 합니다. 즉 지혜는 어떻든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으로 말해집니다. 지혜는 이치를 따라 말해집니다.
자연에 순응이나 덕으로 다스림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삶의 예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보입니다. 삶은 지혜가 추구됨으로 향상된다는 것은 지혜를 말하는 기본 시각입니다.
율법은 해져야 될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좋음을 위해 해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규정된 것이 아닌 좋은 것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해 해져야 될 것은 삶을 위해 좋습니다. 따라서 지혜는 세상 삶의 근거입니다.
좋음과 두려움
언약의 삶은 세상의 변화를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지혜는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을 가로막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순응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지는 삶에서, 지혜는 긍정적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람의 지혜로운 추구는 삶의 좋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변화하는 세상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기여한 만큼 세상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삶에서, 사람의 긍정적 기여는 부분은 생각될 수 없습니다. 그분 말씀은 그분 약속입니다. 사람이 약속에 대한 그분 이루심에 기여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무얼 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몰입으로 이끌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리의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십계명 가운데 여덟 계명은 금지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에서, 그것들은 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지를 따라 하지 않음이 지혜롭습니다.
따라서 언약의 지혜는 이렇게 표현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언약의 삶에서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좋음으로 나아감과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세상 사람이 보이는 지혜와 언약의 백성이 보이는 지혜의 다름입니다. 언약의 시각에서 사람이 좋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타락됩니다. 언약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근거한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지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의 삶은 다른 종족의 삶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십계명과 수반하는 율법은 다른 종족의 삶으로부터 그들의 삶을 막기 위해 주어집니다. 강한 금지는 이 목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들은 다른 종족이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종족들은 그들이 하는 것으로 지혜를 모색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지 말아야할 것으로 그들 지혜를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종족들이 쉽게 하는 것을 하지 않음은 그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하려는 충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제어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지혜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 자신들의 충동을 조정합니다. 그들이 지혜의 가르침을 받는 의미는 자신들의 충동을 조정하기 위함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지 않음이 지혜일 수 있는가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법을 지킴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법이 지켜지지 않을 때 처벌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법을 지킴은 일차적으로 공동생활에서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지혜를 차단하는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혜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로 가는 길이 지혜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소멸되는 죽음의 종착을 지혜의 길로 주장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좋음을 향하지만, 사라짐을 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는 의롭게 살았다고 말해질 수 있지만, 지혜롭게 살았다고 말해질 수 없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에 의한 처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기 때문에 율법을 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무모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상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지 않으신 것을 단적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혜롭게 세상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서사하는 복음은 지혜의 내용일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삶의 지혜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혜가 미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혜는 세상의 좋음으로 그칩니다. 세상의 좋음을 넘은 십자가는 지혜를 넘어갑니다. 십자가는 지혜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임으로, 십자가로 전개되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지혜의 서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새 언약은 지혜의 내용이 아닙니다. 옛 언약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지혜롭게 살지만, 새 언약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금지 조치가 있을 때, 두려움 때문에 하지 않음은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지가 부과되지 않는 삶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의 금지를 해체합니다. 예수님은 하지 않음으로 세상으로부터 그분 구별됨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일 수 없는 원수를 향한 사랑으로 그분 구별됨을 보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지 않음으로 보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온전한 언약의 삶이 보입니다. 함께의 삶은 세상에서 하지 않음으로 보일 수 없습니다. 두려움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으로 보입니다. 원수를 향한 사랑은 지혜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원수를 보복하지 않음은 지혜로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의 사랑은 지혜를 넘어갑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은 병자와 함께하는 사랑을 보입니다. 함께의 사랑은 두려움에 수반된 금지로 막아지지 않습니다. 함께의 사랑은 세상의 좋음에 담아지거나 두려움의 금지에 의해 막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함께의 사랑을 향한 길입니다.
함께는 지혜에 담아지지 않습니다. 지혜는 기본적으로 개인의식에 근거됩니다. 사람들은 개인들로 지혜롭게 삽니다. 그들은 개인들로서 세상에서 좋음을 추구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하지 않음을 보입니다. 그들이 개인들로 사는 한, 지혜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은 개인들로 추구되지 않습니다. 개인들은 어떻든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껏 지혜롭게 삽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혜를 추구하는 한, 개인들로 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새 언약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은 세상에 근거한 지혜를 보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은
세상의 지혜일 수 없습니다.
죽임과 죽음은 아버지를 떠난 타락된 세상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타락된 세상에
아버지와 함께를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의 지혜를 넘어
아버지와 함께를 보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함께로 인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