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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새싹
클라크 회관의 학생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마친 요코는 넓은 로비로 나갔다. 그곳도 남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유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는 사람, 팔짱을 끼고 낮잠을 자는 사람, 여럿이 모여 큰소리로 토론을 하는 사람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요코는 백 개쯤 되는 의자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눈을 들어 보니 갤러리 벽에 전시해 놓은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웬 남학생이 난간에 기대어 로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울한 눈길이었다. 첫눈에 신입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곧 저런 표정을 짓게 될까?’
신입생은 요코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이딘지 앳되어 보이고 신발이나 옷도 새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표정이나 동작에 생동감이 있었다.
요코가 사이시의 딸인 줄로만 알고 있었을 무렵만 해도 나쓰에는 요코를 진학시킬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요코의 출생이 밝혀진 후에는 진학을 열심히 권했다. 하지만 살아갈 의욕을 잃고 있던 요코에게는 대학을 가고 싶다는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실현된 입학이니 만큼 요코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학생활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까? 정말 그런 걸까!”
옆 테이블에 앉은 안경 낀 학생이 얼마간 실망한 듯이 말했다.
“그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지.”
색깔 있는 와이셔츠에 검은 신사복을 입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학생이 담배 연기를 내뿜고 나서 말했다.
“돈이 원수인 세상이야.”
“아냐, 돈은 고마운 존재야. 그런데 고마운 것은 한편으로는 원수가 되기도 해.”
검은 신사복 차림의 학생과 안경 낀 학생이 떠난 자리에 남녀 네 명의 학생이 와서 앉았다. 무슨 토론의 연장인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요컨대 베토벤은 베토벤이라 이거야.”
“그래, 베토벤은 쇼펜하워가 아니야. 모차르트도 아니고.”
네 사람은 밝게 웃었다.
요코는 이 로비에서 자신도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학창 생활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앞에 3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요코는 그 옆을 빠져나와 집회 안내판 앞에 멈춰 섰다.
1호 집회실: 영화회
3호 집회실: 다도 연구회
대집회실: 포크 댄스 연구회
요코는 안내판을 잠깐 들여다보고 나서 클라크 회관을 나왔다. 4월의 햇살이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 가득 퍼져 있었다. 요코는 현관 앞의 폭이 넓은 계단에 서서 회관 앞의 곧게 뻗은 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요코에게 부딪칠 듯이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클라크 회관에서 북쪽으로 1킬로쯤 곧게 뻗은 포장 도로를 끊임없이 차들이 달리고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다. 요코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홋카이도 대학 구내의 조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포장 도로의 왼쪽에는 농학부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북쪽에 있는 이학부의 황토색 3층 건물이 커다란 느릅나무 너머로 보였다. 느릅나무 맞은편으로는 몇 그루의 포를러가 길을 따라 하늘 높이 뻗어 있었다. 느릅나무도 포플러도 아직 싹이 돋아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봄볕 속에 부드럽고도 흐릿하게 보였다.
요코는 다쓰코가 입학 선물로 준 베이지색 커다란 가죽 가방을 흔들며 왼쪽 잔디밭 샛길로 들어섰다.
클라크 박사(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 교장 역임.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의 흉상 뒤쪽에 커다란 황벽나무가 서 있었다. 요코는 그 밑에 흰 손수건을 펴고 앉았다. 잔디가 부드럽게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기복이 있는 넓은 잔디밭은 요코가 앉아 있는 근처에서부터 약간 경사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있는 낮은 평지에서는 남녀 학생들이 배구를 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강의가 없었다. 강의가 없을 때면 요코는 학교 근처에 있는 하숙집으로 돌아가거나 이 황벽나무 밑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요코는 가방에서 뜨다 만 레이스 숄을 꺼냈다. 5월의 어머니날에 나쓰에에게 보낼 참이었다. 완성하려면 아직 3분의 1가량 남아 있었다. 요코의 손가락은 기술적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요코는 숄을 뜨면서 문득 자신을 낳아 준 미쓰이 게이코의 사진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자신은 생모에게 무엇인가 선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생모인 게이코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아니, 요코 아냐? 오랜만이야.”
잔디밭 샛길에 멈춰 선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의 반 친구인 오노였다. 그녀는 한 번도 빗질을 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요코에게로 다가왔다.
“네가 문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니시 고등학교 출신끼리 환영회를 열어 주자는 얘기가 있었어.”
“고마워, 나도 들었어.”
“어쩐지 꿈만 같구나.”
오노는 옆에 앉았다. 다리가 꽤 길어 보였다.
“꿈만 같다고?”
“그래, 넌 말하자면 우리들의 우상이었잖아?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오노는 어색해하지도 않고 말했다.
“어머나 황송해라!”
“이게 황벽나무야?”
오노는 나무 줄기에 걸려 있는 흰 표찰을 쳐다보며 말했다.
“황벽나무가 어디 약에 쓰이는지 알아?”
“건의제 아냐?”
“정답입니다! 하지만 또 있어. 이 줄기를 만지면 어떤 사람이든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된대.”
“또 엉터리 같은 수다야. 여전하구나, 넌.”
그때 조금 떨어진 낮은 언덕에 드러누워 이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오노가 가버린 후 요코는 황벽나무 줄기에 손을 살짝 대고는 미소를 지었다. 무수히 홈이 파여 있는 거친 나무 줄기였다. 이것을 만지면 어떤 사람이든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오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요코는 지금 무엇을 만진다 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요코는 다시 레이스 뜨개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게이조도 도오루 오빠도 기타하라도 다카기 아저씨도 모두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치가사키의 할아버지도 이곳 의학부 출신 내과 교수였다. 지금 요코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또 한 사람………’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친아버지 나카가와 미쓰오도 이곳 이학부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요코는 어머니 게이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찍은 사진 속의 나카가와 미쓰오를 떠올렸다.
‘그분도 이 구내를 살아서 걸어다녔을 테지.’
요코는 문득 왼쪽 경사진 쪽에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를 발견했다. 어깨에 짙은 갈색 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크림색 스웨터를 입은 한 학생이 엎드린 채 다리를 연신 움직이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스웨터가 왠지 눈에 익었다. 분명히 저 스웨터 차림의 학생은 그저께도 이 근처에 앉아 있었다. 저 학생도 이 근처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요코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레이스 실뭉치가 엎드려 있는 그 학생 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학생은 실뭉치를 손에 들고 요코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요코는 얼굴이 빨개져서 일어나려고 했다.
“괜찮아요. 내가 갖다 줄께요.”
학생이 재빠릴 뛰어 올라왔다.
“이곳은 뜨개질할 만한 장소가 못 되는 것 같군요.”
학생은 요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밝은 눈이었다. 그리고 어딘지 어린 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이 나무 밑을 좋아하나봐요? 그저께도 또 그 전날에도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학생은 요코와 잔디밭에 마주보고 앉았다.
“어머!”
“문과지요? 난 이관데….”
학생은 빙그레 웃었다. 웃고 있지만 어딘지 그늘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마음에 스며드는 듯한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어떻게 아세요?”
“교양학부 강의실에서 가끔 보았거든요.”
얼굴이 갸름한 편으로, 어딘지 신경질적인 인상이 도오루와는 달랐다. 양미간에는 더욱 격한 기질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댁도 이곳을 좋아하나 보군요?”
“아니, 뭐 특별히 이곳을 좋아하는 건 아녜요. 댁이 언제나 이곳에 와서 앉아 있으니까 나도 오는 것뿐이에요.”
“네?”
요코는 무심코 학생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답변이 궁해진 요코는 잠자코 숄을 뜨기 시작했다.
“날 건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요? 난 이곳에서 댁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 놈은 건달이라고 생각하는 감각이 댁에겐 없나요? 만일 댁이 그런 사람이라면 난 싫은데요.”
“건달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직감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직감? 참 편리한 말이군요. 난 작년부터 댁을 찾고 있었어요.”
“우린 방금 알게 된 거 아닌가요?”
“아녜요, 난 작년 9월에 도청 근처의 교차로에서 댁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는 미쓰이 게이코의 작은아들 다쓰야였다. 그러니까 요코의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었다. 물론 요코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아, 그때 그 사람이었군요. 하지만 그때 보았을 때는 학생 같지 않았는데요.”
교차로 한복판에 멈춰 선 소년의 얼굴이 마치 덤벼들 듯 격한 표정을 하고 있던 것을 요코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나요? 그런데 용케 기억하고 있었군요.”
“차로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 날 이후 줄곧 난 댁을 찾고 있었어요.”
“왜였죠?”
다쓰야는 요코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처음에 교양학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댁을 부를까 했어요. 그때 댁은 어떤 사람과 얘기하면서 지나가 버렸지만…….”
샛길과 근처 잔디밭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요코는 왠지 기분이 상했다.
“나도 댁과 같은 교양학부인데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어요. 하긴 교양학부만도 학생이 2천 명이 넘으니까요. 그런데 우연히 이곳이 댁의 휴식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요코는 새삼스럽게 다쓰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를 나눈 동생인줄도 모르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괴상한 놈이라는 표정이군요.”
“무엇 때문에 나에게 관심을 갖는지 알고 싶어요.”
요코에게는 전부터 호의를 베푸는 남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생처럼 이상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기분 나빠요?”
“약간 그런 생가도 없지 않아요.”
“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유예요. 너무 시시해서 웃을지도 모르겠어요. 사실은 댁이 우리 어머니를 꼭 닯았기 때문이에요.”
“아니!”
순간적인 기지였다. 요코는 레이스 실뭉치를 일부러 떨어뜨렸다.
실뭉치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요코도 일어나 실뭉치를 따라 내려갔다. 실뭉치를 쫓으면서 요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을 닯았다니 친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그렇다면 이 학생은 동생인 것이다.
‘동생!’
미쓰이 가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들었다.
‘알려지면 곤란해!’
실뭉치를 쥐고 요코는 그 자리에서 몸을 웅크렸다.
“왜 그래요?”
어느새 다쓰야가 옆에 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하지만 얼굴색이 안 좋아요.”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뛰어왔기 때문이에요. 조금 현기증이 났을 뿐이에요.”
요코는 몸을 웅크린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괜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름이 뭐예요?”
요코는 얼굴을 쳐다보기가 두려워 잔디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미쓰이 다쓰야라고 해요.”
‘역시 그렇구나!’
요코는 온몸에 떨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미쓰이 씨군요.”
요코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액의 이름은 알고 있어요.”
“그래요?……미쓰이 씨는 막내 맞죠?”
“어떻게 알았어요? 둘뿐인데 내가 밑이에요. 어머니를 닯은 사람을 쫓아 다니다니 젖도 안 떨어진 유치한 녀석이라고 생각했겠군요. 하지만 나로서는 조그마한 미스테리예요.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나 걸음걸이 까지도 비슷해요. 이렇게 직접 얘기를 나누다 보니 목소리도 닮았어요.”
“어머, 믿어지지 않아요.”
요코는 간신히 침착성을 되찾고는 일어섰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닮은 분이……”
“믿어지지 않나요? 그럼 우리 어머니를 한번 만나보면 어떨가요? 그러면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예요.”
“싫어요, 나를 닯은 사람이라니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요.”
요코는 실뭉치를 돌돌 감으면서 황벽나무 아래로 갔다.
“댁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여자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싫어하나 보죠? 자신의 존재가 침범당한 것으로 여겨지나요?”
다쓰야의 얼굴을 바라보는 요코의 마음은 착잡했다.
“우리 어머니하고는 어찌 되었든 나하고는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어요?”
“친구요?”
‘친구가 아니라 넌 내 동생이야.’
“네, 하지만 난 특별히 친한 친구는 만들지 않아요.”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미쓰이 씨, 내가 댁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왜 친구가 되고 싶어하죠?”
요코는 레이스 실과 뜨개바늘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나란 인간은 지나치게 병적인 게 아닐까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일이라면 적당히 넘겨 버릴 수가 없었어요. 아무튼 댁이 우리 어머니를 닮았다는 건 나에게 중대한 일이에요.”
“………..”
“뭐랄가, 우표를 수집하는 인간의 심리와 비슷한 것인지도 몰라요. 어머니에 관한 것은 모두 수집하고 싶어요. 이해하기 힘든가요?”
“알 것 같기도 해요. 어머니를 유별나게 좋아하나 보군요?”
“유치원 어린이에게도 반항기가 있다고 하잖아요? 나야 대학생이 된 이 나이까지 어머니를 좋아하니 경멸을 당해도 어쩔 수 없겠지만.”
“아니에요. 미쓰이ㅣ 씨는 무척 솔직한가 봐요. 남자는 대체로 어머니를 좋아한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머니를 귀찮아하죠. 미쓰이 씨는 자기 감정을 숨기거나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아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는 어머니를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댁한테는 웬일인지 나도 모르게 말해 버리고 말았네요.”
따쓰한 무엇인가가 요코의 마음속에 전해졌다.
“그럼 또 만나요!”
다쓰야는 갑자기 일어나 손을 들어 보였다.
“안녕!”
요코도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다쓰야는 재빨리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얼핏 보니 그의 오른쪽 어깨가 약간 올라가 있엇다.
잔디밭 언덕으로 올라간 그는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울타리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다쓰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요코는 억눌렀던 뜨거운 것이 한꺼번에 몸 안에서 분출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상체를 힘없이 앞으로 굽히고는 잔디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잔디 위에 떨어졌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육친을 만난 것이다.
‘육친!’
그것은 뜻밖의 감동이었다. 요코의 긴 머리칼이 봄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였다. 요코는 하숙집 이층 방에서 아침부터 노트정리를 하고 있었다. 약간 낡은 3칸짜리 방 한구석에 책상이 창문 쪽으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 나쓰에가 새로 만들어 준 엷은 초록색 커튼과 책장 위의 일본 인형이 방을 산뜻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요코는 그 날 이후 다쓰야와 복도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는 겸연쩍은 듯이 웃고 나서,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말만 던지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요코는 다음 강의 시간이 급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섭섭했다.
그러나 지금 요코는 그때의 다쓰야를 떠올리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쓰야!’
요코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 보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컴컴한 복도에 준코가 서 있었다.
“어머, 어서 와요.”
“무척 어두운 복도네요. 낮에도 전등을 켜야 할 것 같아요.”
이 하숙집을 소개해준 준코는 자기 책임인양 그렇게 말하고는 꾸러미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어린이날 선물. 김밥이에요.”
“어머, 좋아라. 고마워요, 준코 씨.”
“어때요, 이 하숙집………?”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음식도 맛있고 아저씨와 아줌마도 좋은 분이에요. 게다가 학교와 가까워서 구내에 있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하숙집은 클라크 회관 바로 옆을 지나 동쪽으로 약간 들어간 곳에 있었다. 거리에 면한 좁은 뜰에 키 큰 라일락이며 주목나무 등을 심어 놓은 낡은 목조 이층의 조용한 가정집이었다.
하숙집이라고 해도 하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요코 한 사람뿐이었다. 학교가 가까워 친지의 특별 부탁으로 그의 딸을 있게 한 후로 요코가 세 번째 하숙생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준코 어머니와 사촌간이었다. 그래서 준코의 소개로 요코는 이 집에 하숙을 하게 된 것이다. 쉰이 조금 넘은 주인 아저씨는 시대의 어느 큰 상사에 근무하고 두 딸은 모두 출가하고 없었다.
“기타하라 씨도 놀러 오나요?”
“놀러요? 아뇨, 아직………”
“그 사람, 닥터 과정을 밟고 있다죠? 지독한 공부벌렌가 봐요.”
“그런가 봐요.”
눈이 내리던 날, 아사히가와까지 요코를 찾아왔던 기타하라를 생각하면서 요코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저, 요코 씨.”
“왜요?”
“오빠는 가끔 이곳에 와요?”
“지난번에 한 번 왔다갔어요.”
“그래요?”
준코는 잠시 말이 없었다.
“김밥 지금 먹을래요? 갑자기 배가 고프네요. 준코 씨도 배고프죠?”
하숙집에서는 점심은 주지 않았다. 요코는 자주색 포트에서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눈을 내리뜨자 요코의 속눈썹이 더욱 길어 보여 무척 아름다웠다.
“배가 너무 고파 현기증이 날 정도예요.”
“어머, 현기증씩이나……..?”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벽돌색 슈트 밑에 받쳐입은 흰 블라우스가 아주 깔끔한 느낌을 주었는데 준코에게 잘 어울렸다. 요코는 노트를 치운 책상 위에 찬합을 올려놓고 찬장 속에서 작은 접시와 젓가락을 꺼내 놓았다.
“참 맛있네요.”
“그래요? 내가 만든 건데.”
“솜씨가 좋군요. 아주 예쁘게 말았어요.”
요코는 표면이 반들반들한 김밥을 새삼스럽게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난생 처음 만들어 본 거예요. 밥을 많이 해서 여러 번 연습했어요. 그러니까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어머, 황송해라.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겠네요.”
“덕분에 앞으로는 연습하지 않고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요코 씨는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멸치 국물도 손이 덜 가면 맛이 금방 달라지잖아요. 그런 까다로운 점이 좋아요.”
“어머, 우리 집은 약국을 하잖아요. 멸치 국물 같은 건 끓일 시간이 없으면 인스턴트 가루를 우려내서 만들어요.”
“우리 어머니는 남달리 꼼꼼하세요. 멸치라든지 다시마, 가다랭이포 같은 걸 그때그때 준비해 놓는 걸요.”
“대단하시네요. 그럼 오빠도 인스턴트 식품은 싫어하겠어요.”
준코는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어머, 내가 외 이러죠? 하지만 요코 씨의 오빠는 깊은 산골짜기의 옹달샘처럼 깨끗한 느낌이 들어 약간 신경이 쓰여요.”
하고 어깨를 움츠리고는 김밥을 입에 넣었다.
“고마워요, 칭찬을 해줘서……”
요코의 긴 머리털이 약간 흔들렸다.
“저, 요코 씨네 같은 남매끼리도 가끔 싸움을 하나요?”
“싸움요?”
요코는 갑자기 허를 찔린 것처럼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도오루와 자신은 싸움다운 싸움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도오루는 무슨 일이 있을세라 자신을 감싸주기만 했던 것 같았다.
“글쎄, 싸움을 해본 기억이 없네요. 오빠는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어서……”
“어머, 싸움도 안 해요? 여느 남매답지 않군요.”
무심코 한 준코의 말이 요코에게는 아프게 들렸다.
“맞아요, 우린 남매 같지 않아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건지도 몰라요.”
요코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녜요, 요코 씨와 오빠는 사이가 아주 좋아 보여요……하지만 요코 씨, 난 사이가 좀 나쁘더라도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나, 이번 달은 용돈이 모자라’하며 응석을 부리는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겠네요, 준코 씨는 외동딸이라.”
요코는 다시 다쓰야를 생각했다.
“그래요, 외동딸은 너무 쓸쓸해요. 오빠도 언니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형제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더군요. 세상 사람들을 보면 말이에요. 그런 게 참 이상해요.”
“아마 모든 일이 다 그런가봐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대학에만 들어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가 봐요. 우울한 얼굴을 한 학생들이 많아요.”
“그래요, 집이든 차든 애인이든 일단 손에 넣고 보면 별것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마찬가지일까요, 인간이란?”
“그래요, 집이든 차든 애인이든 일단 손에 넣고 보면 별것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마찬가지일까요, 인간이란?”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겠지요……하지만 연애 결혼을 한 사람 중에도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많아요.”
“실망이 크네요. 난 멋진 연애 결혼을 할 꿈을 꾸고 있는데…..하지만 어렵게 연애 결혼을 해도 싫어진다면 헛일이잖아요. 저기, 요코 씨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요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
“있지요.”
“어머, 있다고요? 멋지네요!”
연애를 동경하고 있는 준코를 보며 요코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준코 씨, 맛있게 잘 먹었어요.”
요코는 젓가락을 놓았다.
“뭐 별것도 아닌데요. 근데 그 뒤로 어떻게 됐어요?”
요코는 말없이 맞은편 지붕 너머로 보이는 홋카이도 대학의 숲을 바라보았다.
“벌써 오래 전 일이에요. 지금은 없어요.”
“왜요? 싫어졌나요?”
“아뇨.”
“그럼 좋아하면서도 단념했어요?”
“아녜요.”
요코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준코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준코 씨, 난 말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약을 먹고 사흘 밤 나흘 낮을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다시 살아났어요.”
요코는 터놓고 말했다.
“어머, 정말이에요, 요코 씨?”
준코의 얼굴에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말이에요. 그러고 나서도 난 한동안 계속 살아갈 의욕을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아직도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어요.”
“그랬어요? 요코 씨, 미안해요. 난 전혀 몰랐어요.”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래서 나한테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살 의욕을 잃어버린 거예요?”
준코는 요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너무 꼬치꼬치 캐물어서…..”
준코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에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말없이 구름을 바라보던 준코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산다는 것이 요코 씨 같은 사람에게도 괴로운 일이었군요.”
절실히 공감하는 목소리였다. 요코는 무심코 준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느 때와는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준코 씨에게도 괴로운 일이 있나요?”
“물론 있고 말고요.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란 있게 마련 아닌가요? 하지만 지금은 걱정 없어요. 살아갈 의욕이 충분히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거 다행이에요.”
준코에게 괴로운 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처럼 살인범의 딸로 자란 정도의 괴로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누굴까?”
준코의 두 눈이 빛났다. 들어온 사람은 도오루였다. 준코는 깜짝 놀라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치더니 커튼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런 준코를 보고 도오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리 나와요, 준코 씨.”
준코는 겸연쩍은 듯 커튼 속에서 살며시 나와 도오루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군요, 준코 씨.”
준코는 아직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방금 준코 씨가 손수 만들어 온 김밥을 모두 먹어 버렸지 뭐야. 미안!”
“아냐, 난 먹고 왔어. 이거 니시무라의 애플파이야.”
“고마워, 오빠. 이거 디저트로 같이 먹어요. 준코 씨.”
“다정한 오빠가 있어서 요코 씨는 참 좋겠어요.”
준코는 부러운 듯이 말했다. 도오루와 요코는 무심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오빠하고 같은 집에서 하숙하지 않아요? 그러는 게 편리하잖아요?”
파이 상자의 리본을 풀던 요코의 손이 순간 멎었다.
“아뇨, 남매라도 가끔 만나는 게 좋은 거예요.”
도오루가 준코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준코에게 자신들은 진짜 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얼른 밝혀야 하지 않을가 하고 생각했다. 방금 자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준코는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그것은 단순히 처녀다운 수줍음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준코는 혹시 자신에게 관심 이상의 그 무엇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매란 게 그런 건가요? 말도 안 돼요. 나라면 날마나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싶을 것 같은데.”
“맛있어 보이네요. 어서 드세요, 준코 씨.”
요코는 자른 애플파이를 준코와 도오루 앞에 내놓았다.
파이를 먹다 만 준코는 가게 일을 거들러 가야 한다면서 애석하다는 듯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돌아갈 때 준코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언제 시코쓰 호수나 죠잔 계곡에 놀러가요. 기타하라 씨 차로 가면 되겠네요.”
“좋아요.”
도오루가 흔쾌히 대답하자, 준코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참 순진한 아가씨야.”
준코가 돌아간 후에 도오루가 말했다.
“하지만 나보다는 어른이던걸. 뭔지는 모르지만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야.”
“그래? 내 눈엔 중학생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보일 만큼 그녀는 영리해. 준코 씨는 남한테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나봐. 언젠가 식물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
“자신은 뭔가 괴로움을 갖고 있다는 얼굴을 하고 싶은 게 청춘 시절이잖아. 하지만 요코, 네가 겪은 괴로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야.”
“그건 알 수 없지. 세상에는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으니까.”
도오루는 말없이 요코를 바라보았다.
그는 요코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다쓰야에 관해서였다. 도오루는 어젯밤 게이코의 부탁으로 산아이 호텔 로비에서 그녀를 만났다. 거기서 그는 다쓰야가 요코를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코다 다쓰야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요코가 다쓰야의 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도오루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요코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기지 않았나 하여 몹시 불안했다.
“여러 가지 괴로움? 하긴 그렇군.”
무심코 한숨을 내쉰 도오루를 보며 요코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왜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오빠?”
“응. 사실은 어젯밤에 다쓰야와 네가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래?”
요코는 누구한테서 들었냐고는 묻지 않았다. 다만 희공 통통한 손으로 볼을 살짝 매만졌을 뿐이었다.
“어젯밤 오타루의 네 어머니를 만났어.”
요코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쓰야가 너하고 친구가 되었다고 기뻐하는 모양이야. 다쓰야의 입을 통해 쓰지구치 요코라는 이름을 듣고 그분은 엄청 놀란 모양이야.”
“…………”
“그분은 누구보다 다쓰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그는 언젠가는 네가 누구라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거야. 그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 해도 무섭다는 거야.”
문득 요코의 눈빛이 흐려졌다. 하지만 잠시 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너무 깊이 사귀지 말기를 바라는 거겠지.”
어젯밤에 게이코는 이렇게 말했었다.
“만일 다쓰야가 그 애를 사랑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더 늦기 전에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크게 상심할까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요, 쓰지구치 씨.”
그러나 도오루는 이 말을 요코에게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나도 깊이 사귀고 싶지는 않아. 그것이 다쓰야를 위하는 일일 테니까.”
다쓰야라고 부르는 것도 도오루에게는 뜻밖이었다. 자신보다도 다쓰야 쪽이 요코와 가까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다쓰야는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그럴까? 하지만 니시 고등학교 출신들 중에는 네가 양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게다가 다쓰야는 직감이 예리한 성격이라…….”
“그럼 어떡해? 휴학이라도 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까지야………”
도오루로서도 이렇다 할 좋은 방법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요코가 대학에 진학한 건 좋은데 입학하자마자 성가신 사람을 만나게 되서 큰일이야.”
‘성가신 사람 아닌데.’
요코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무작정 다쓰야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착잡하기는 요코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는 다쓰야로부터 저주를 받을 존재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큰일이야.”
잠자코 있는 요코에게 도오루는 되풀이하여 말했다.
“날씨가 좋은데 밖으로 나갈까?”
도오루는 요코와 단둘이서 방안에 있는 것이 영 어색했다.
“그럴까? 근데 노트 정리를 좀 할까 했는데……..”
“노트 정리? 입한한 지 얼마 안 되잖아. 좀더 여유를 갖는 게 좋아. 그보다는 밖에 나가 일광욕이라도 하는 게 어때?”
요코는 도오루와 단둘이 걷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매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도오루는 먼저 밖으로 나와 요코를 기다렸다. 하늘은 푸르고 싹이 돋기 시작한 들의 나무 그늘에는 노란 수선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도오루는 담배를 문 채 집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전찻길 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학생이 보였다.
다쓰야였다. 순간 도오루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재빨리 걸어갔다. 자신이 요코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불안해서였다. 게이코의 문병을 갔을 때부터 이미 다쓰야는 수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요코를 찾아온 게 아닐까?’
도오루는 불안했다. 요코의 하숙집에서 3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기독교 회관이 있었다. 도오루는 그 옆에 몸을 숨기고는 살그머니 엿보았다. 아니나다를가, 다쓰야는 요코의 하숙집 앞에 서서 상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요코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 요코가 나올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요코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빠와 함께 외출하려구요. 어머, 근데 오빠가 대체 어디 간 거지?”
요코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코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쓰야는 쓰지구치 씨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약간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도오루는 어젯밤에 게이코가 한 말을 떠올리면서도 가슴을 조이며 두 사람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코는 여전히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하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요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전찻길 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쯤 들어갈 간격이 있었다.
‘휴일에 일부러 오타루에서 찾아온 걸까?’
도오루는 요코에 대한 다쓰야의 관심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백 미터쯤 걸어가 건널목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란히 왼쪽으로 건너갔다. 건너간 길모퉁이에 담배 간판이 걸린 식료품 가게가 보였다. 그곳에 멈춰 선 요코가 옆에 있던 다쓰야에게 가볍게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다쓰야도 한쪽 손을 들어 보이고 건널목을 되돌아와서 역 쪽으로 걸어갔다. 삿포로 역의 북쪽 입구가 그곳에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쓰야를 배웅하던 요코가 식료품 가게로 들어갔다. 도오루는 요코가 들어간 식료품 가게를 향해 급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