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박현수(1966~ )
떨어진 불꽃은
손아귀를
가만히 오므린다
다음에는
하느님이 떨어질 차례란 듯이
[시가 주는 여운]
단풍잎은
하느님이
뛰어내려야 할
불꽃 손아귀다.
시들면서
손가락 오므린다.
~~~~~
단풍
박형준(1966~ )
바람과 서리에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
무덤을 지키고 선 나무 한 그루,
저녁 햇살에 빛나며
단풍잎을 떨어뜨린다
자식도 덮어주지 못한 이불을,
속에 것 다 비워 덮어준다
무덤 아래 밭이 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종아리에 불끈 일어선 정맥처럼
혼자 자라 시퍼렇게 빛나는
무 잎사귀
[시가 주는 여운]
단풍은
무덤을 덮어주는 이불
생뚱맞게
홀로 시퍼런
무 잎사귀에도
조용히 내린다.
~~~~~
단풍나무 길에 서서
장철문(1966∼)
꽃잎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다
신록의 단풍잎 사이에서 와서
신록의 단풍잎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선을 그리며
유성우(流星雨)가 떨어지고 있다
궁창(穹蒼) 속에서 와서
궁창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흙이었으며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꽃이었으며
꽃으로 돌아갔었다고 해도 좋다
햇살이
신록의 단풍나무숲을 투과하고 있다
신록의 단풍잎을 투과하고 있다
사선을 그리며 사라지고 있다
사라지는
어느 한순간도 잡을 수가 없다
(……)
[시가 주는 여운]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단풍잎
유성우(流星雨)마냥
떨어지고 있다.
시궁창에서 시궁창으로
흙에서 흙으로
꽃에서 꽃으로
햇살 사이로
꽃잎 사라진다.
자연의 순환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
석남사 단풍
최갑수(1973~)
단풍만 보다 왔습니다
당신은 없고요, 나는
석남사 뒤뜰
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저물 무렵까지 나는
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만 붉히다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없고요
[시가 주는 여운]
석남사에 갔으나
단풍 속에
당신은 없고
얼굴 붉힌채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오네
~~~~~
‘단풍나무 빤스’
손택수(1970~ )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시가 주는 여운]
베란다 창문을 넘어
날아가
하필
아파트 화단
단풍나무에 걸린
아내의 구멍난 빤스
구멍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첫날밤처럼
화끈거리는 내 볼
바알갛게
달아오르는
에로틱한 서정 (抒情/敍情)
가난한
글쟁이 남편의 자책
단풍나무 위에서
부끄럽게 나부낀다.
~~~~~
‘단풍’
신현정(1948~ )
저리 밝은 것인가
저리 환한 것인가
나무들이 지친 몸을 가리고 있는 저것이
저리 고운 것인가
또 어디서는 짐승이 울고 있는가
어느 짐승이 덫에 치인 생채기를 핥고 있는가
저리 뜨거운 것인가
[시가 주는 여운]
단풍은
밝고 환한
나무의 외투
단풍은
덫에 치인
짐승의 생채기
뜨겁게
핥는 생채기
~~~~~
'단풍 속으로' 중
박명숙(44)
드디어 산빛은 가속을 내고
폭풍처럼 불길이 들이닥칠 때
티끌도 흠집도 죄다 태우며
미친 하늘이 덤벼들 때
맞습니다
길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 우리 몸뚱이 통째로 말아버리면
어디선가 어둠도 저린 발가락 피가 나도록
긁고 있겠지요
접었던 시간의 소매를 내리며
먼 기억들이 박쥐처럼 날개를 펴고
휘몰아치는 단풍 속으로 속으로
마구 날아드는 것이겠지요
[시가 주는 여운]
단풍
폭풍처럼 불길로 번지다.
단풍
피가 나도록 긁은 상처
단풍 속으로
마구 날아드는
기억의 편린들
~~~~~
'단풍 연어' 중
김영무
바다를 떠나 강물 거슬러
계곡을 따라 폭포 뛰어넘어
산골 시냇물에
알 낳으러 가자
가는 길 험한 길
오호라, 윗입술 휘어지고
등줄기에 힘살 박혀
온몸에 단풍 든다
[시가 주는 여운]
단풍은
종족 번식을 위한
처절한 사투
단풍은
온몸의 생채기
단풍은
시냇물에 낳은 연어의 알
~~~~~
단풍
정환웅
산허리는 불붙고 있다
타지 않는 불
그 불에 데인 마음
뛰는 그 마음
가라앉힐길 없어
발만 동동 구른다
[시가 주는 여운]
타지 않는 불에 데인 마음
뛰는 그 마음
가라앉힐 길 없어
발만 동동 구른다.
단풍을 보면,
2004. 03. 20
眺覽盈月軒 (보름달을 멀리 바라보는 집)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