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형 통일
역대급 치적을 남긴 왕들의 공통된 업적은 '도량형 통일'이었다.
도(度)는 길이, 양(量)은 부피, 형(衡)은 무게를 말한다.
도량형 통일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초석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진시황이 그 시초다.
15년간 집권한 그가 만들어 낸 도량형 통일은 2000여 년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역시 '미터법'으로 대표되는 도량형 통일을 일궈냈다.
우리도 고려의 정종, 조선의 세종·영조 등이 그랬고, 개화기의 갑오경장 역시 도량형 통일을 내걸었다.
박정희 정권 때 '엿장수 가격'을 대신해 내세운 '정가제'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왜 도량형 통일이 중요할까.
과학을 발전시키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시대를 상상해보자.
고기 한 근을 사려고 갔더니 손님에 따라 500g, 100g 등 제각각 준다면 누구는 횡재했다고,
누구는 억울하다고 느낄 것이다.
옷감 한 필을 사려는데 여기는 2m고, 저기는 1m라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 도량형은 정치의 으뜸 명분인 '공정(公正)'의 가치를 세우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고기 한 근, 옷감 한 필의 도량형을 속일 방법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도량형을 통해 구현하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인간의 소망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심정을 최대한 활용해 집권한 이들이 보여주는 공정과 정의의 도량형은 어이가 없다.
세간을 들썩이게 했던 몇몇권력자들의 이름 글자는 수많은 국민에게 '도량형 파괴'와 동의어이다.
자기편은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나도 무죄추정하여 도량형파괴도 지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상대방[敵]은 의혹만 불거져도 범죄자 낙인을 찍는다.
자기편은 공적(功績)에 대한 가산점이 무한대이고, 상대편은 과실에 대한 감점이 무한대이다.
기형적 지배 구조의 새로운 권력기관 설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것도 이 기관이 권부개혁은커녕
'도량형 파괴처'가 될까 봐서이다.
이런 공포심은 최장집 등 진보 진영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도량형 파괴의 최종 목적은 권력자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도량형 통일의 기본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소고기 한 근의 도량형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는 얘기다.
권력자와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도량형이 달라지는 게 불(不)공정이요, 반(反)정의다.
프랑스 혁명 직전엔 왕족과 귀족이 맘대로 만든 15만여 개의 도량형이 있었단다.
우리는 권력자들이 기존의 도량형을 무너뜨리고 자기들 멋대로의 도량형을 주장하며
'정의 바로 세우기'라 우기는 아이러니를 숱하게 목도해 왔다.
이런 건 진보가 아니라 퇴보가 분명하다.
(chosun.com/2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