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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
사도행전 10:1~23
오늘 본문 말씀은 만민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도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구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인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청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그 이방인 백부장의 독실한 믿음을 보시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 때 하신 말씀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태복음 8:10~12)
라고 하셨습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천국에 주님과 함께 식사 자리에 기대어 누워 먹고 마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방인들도 구원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명백한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번 들었으나 깨닫지를 못하고 오랜 문화적,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의 구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고 종교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편견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초대 교회 사도들 역시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유대인들처럼 음식도 율법의 정결 규례를 따라 정결한 것만을 먹어야 하고, 할례도 행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이방인도 얼마든지 문화, 인종, 언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사도들조차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복음만 그대로 받아들이면 얼마든지 유대인 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이 구원받는다는 점을 알려주시고자 주도적으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일에 선택받은 사람이 이방인 중에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요 유대인 중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초대 교회 최고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인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견고하게 가로놓였던 장벽을 허무는 이 일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방 선교의 문을 여는 데 쓰임받은 고넬료는 기도와 구제의 사람이었습니다.
1절로부터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구제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1절에 보면, 가이사랴에 사는 이탈리야 부대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소개됩니다. 가이사랴는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 항구로부터 약 4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항구 도시로서 헤롯 대왕이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를 기념하여 만든 신설 항구입니다. 그 항구는 엄청난 재력을 쏟아 부어 인위적으로 화려하게 지은 항구로서 그 당시 헤롯의 별궁도 거기에 있었고 후일에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가이사랴에 로마 제국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는 로마 군대의 중대장 격에 해당하는 백부장으로서 대단한 실세를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고넬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넬료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까닭은 그가 세속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경건함, 그의 신앙의 독실함은 크게 두 가지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많은 구제 활동이었고 또 하나는 신실한 기도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이른 말도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말합니다. 4절에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상달되다’라는 단어는 구약의 제사에서 번제를 드리면 동물의 고기와 기름이 타면서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그 향을 받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와 소제의 유향을 태운 기름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맡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는 구약의 제사법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도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바로 기도의 제사요 구제의 제사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고 한 말씀하였으니, 선교 헌금 역시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13:15,16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고 하였으니, 찬양도 향기로운 향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며 베풀고 나누어주는 선행의 손길 역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이렇듯 구약의 제물을 제단에 태워서 그 기름이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 받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신실한 기도 생활, 긍휼한 마음으로 베푸는 나눔의 손길, 감사한 마음을 담은 찬양, 선교와 몸된 교회를 위한 각종 봉사와 헌신의 수고 등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다 상달되어 기억하고 잊혀지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6:10 말씀에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수고를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기억하신다는 점을 믿고서, 한평생 부지런히 주님과 교회를 뜨겁게 섬기며, 신실하게 기도하며, 늘 찬양하며, 구제를 힘쓰며, 교회 밖 세상의 모든 이들까지도 구제하며 베푸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베드로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자 하셨습니다.
9절로부터 1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어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여기서 보면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따라 베드로를 모셔오도록 사람을 보내어서 그들이 다음날 욥바 성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욥바의 해안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제 육시 곧 정오 시간에 기도하러 그 집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비가 귀하니까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고 그 지붕 사방 난간을 높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쉬기도 하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는 다목적용으로 쓰곤 했습니다. 베드로도 정오 기도 시간에 기도하고자 지붕에 올라간 것입니다.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곤 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의 시편 55:17 말씀에 이르기를,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국 시대의 노년의 다니엘도 그 습관을 유지하였으니, 다니엘 6:10 말씀에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늘 수시로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도, 구별된 기도 시간 곧 정기적인 기도 시간을 고수하려고 애썼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수시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무시로 기도하기를 힘쓰되, 정기적인 기도 시간을 갖도록 마음에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각자 하루의 생활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부지런히 기도하면서 지내지만 각자 하루 중에 일상적으로 시간을 구별하여 드린다면 가능한 시간을 정하여서 그 시간을 지키기를 힘씁시다. 다니엘이 국무총리의 그 바쁜 일정에서도 하루 세 번을 구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지켰다면, 우리도 마음 먹고 자기 일상을 살펴보면 분명히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을 하루에 적어도 삼십분이라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해받지 않는 그 시간을 주님께 구별하여 내어드립시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그 시간에 우리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조용히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실 말씀도 그 정한 시간에 우리에게 들려주실 것이요,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고 지시할 일들도 생각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날 베드로가 지붕에서 기도하였을 때에 어느 정도 기도하자 유별나게 허기가 강하게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몬 집의 사람들에게 점심을 준비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시장기가 강하게 찾아오고 아래층에서는 음식조리 냄새가 지붕 위로 슬슬 올라올 때인데, 갑자기 베드로에게 황홀경이 찾아왔습니다.
10절에 ‘황홀한 중에’라고 했는데, 원문 그대로의 표현은 황홀한 상태가 그를 덮쳤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상치 않게 비몽사몽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꿈인지 생시인지 잘 알지 못한 상태인데 하늘에서 큰 보자기 그릇이 내려오고 그 안에 온갖 짐승들, 곤충들, 새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즉시로 그 음성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알아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은 베드로가 삼년 반 동안이나 늘 곁에서 들으며 함께 지냈던 바로 그 주님의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 음성을 듣는 즉시로 그 음색과 어조와 속도와 무게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무리 주님의 음성일지라도 그 하신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그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유대인의 전통적인 식사 규례인 구약 율법의 음식 규례를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보자기 그릇에 담긴 짐승들 중에는 돼지도 있고 독수리도 있고 바닷가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부정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방인이나 먹지, 유대인들은 절대로 먹지 않았고 베드로도 이 규례를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잡아 음식으로 먹으라고 하시니,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며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분명한 어조로 다시 이렇게 베드로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보자기 그릇에 담긴 모든 것들을 다 깨끗하게 하시고 그것들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허락하셨는데 네가 감히 이것을 더럽다 먹을 수 없는 속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다시 그에게 묻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셨으며, 베드로는 또 다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를 반복하여 대답하셨고 주님께서도 그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으며, 주님이 베드로에게 묻고 대답하고 명하시는 이 대화를 다시 한번 더 반복하여 세 번씩이나 동일한 대화가 반복된 후에 그 보자기 그릇이 하늘로 올리워갔습니다.
사실 이 황홀경 속에서 보자기 그릇의 비유와 주님의 가르침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음식의 논쟁을 벌이실 때에 제자들 앞에서 이미 가르쳐주신 동일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 후에 제자들만 모인 자리에서 이르시기를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마가복음 18,19)
고 가르쳐주신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바 있는 내용이 바로 모든 종류의 음식물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제시한 음식 정결 규례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것입니다. 그 규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로 물든 이방인들과 교제를 일정 기간 막으시고 거룩함을 훈련하기 위한 일시적 목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써 구원의 역사가 성취되었고, 이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야 할 때가 되었으니, 이 시점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장벽으로 막는 이러한 음식 규례는 폐지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그렇게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초대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고 구원의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좁은 해석의 틀안에 갇혀 있으니, 예수님께서 이 편견과 장벽을 깨뜨리고자 베드로에게 환상 중에 이렇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보자기 그릇에 담긴 세상의 모든 음식물들이 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속되거나 부정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노라고 친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이 편견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았기에, 세 번이나 주님과 변론하면서 주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거절하며 자기는 못 잡아 먹겠다고 반복해서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편견과 고집이 얼마나 강한가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오랜 전통과 신념과 문화적 습성은 주님께서 이미 여러번 가르쳐주셨고, 또 이렇게 환상 중에 세 번이나 친히 말씀하셔도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 유럽인과 미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 오래되었건만 흑인과 동양인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노예로 사고 파는 악을 행하였던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우리나라 와서 선교하시던 미국의 백인 선교사님들도 우리나라 조선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더 우월하다는 교만함이 마음에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 점을 지적하였기 때문에 깊이 회개한 후에 공개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선교사 수련회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님 로버트 하디에 의하여 1905년의 원산 기도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원산부흥회가 1907년에 크게 일어난 평양대부흥의 전조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서양 선교사님들이나 백인 기독교인들이 과거에 가졌던 여러 가지 잘못된 편견과 아집과 같은 것들이 우리 안에도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그처럼 말씀하셔도 안 바뀌고 고집피우며 나의 생각과 판단을 붙들고 주님의 가르침을 한사코 거절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그렇게 계속 거절하면 주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불순종하며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사울 왕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2~23)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저런 경험과 배움과 문화적 전통을 통하여 얻게 된 완고하게 굳어진 사상과 가치와 판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것들이 주님의 뜻, 주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온전치 못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다. 그렇게 말씀에 맞지 않은 것이 있을진대 우리가 기꺼이 내 판단과 내 고집을 내려놓도록 합시다. 그러할 때에 주님께서 이전보다 더 넓고 온전한 지식의 세계, 더 풍성한 진리의 세계와 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들이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성령께서 베드로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순조롭게 만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17절로부터 23절 전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노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베드로가 황홀한 중에 보았던 보자기 그릇의 환상과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에 마침 그 해변가 시몬의 집 대문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큰 소리로 지붕에 있는 베드로에게까지 들리도록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누가 자기를 찾으러 왔다보다 하면서도 계속하여 아까 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 마음 속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게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노라”
이것은 황홀경 중에 보자기 그릇을 볼 때에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과 달리 이 소리는 그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 심령 속에서 나직하게 마음으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는 의사 전달 수단을 보면, 먼저 환상 중에 천사가 명백히 나타나서 고넬료에게 분부하신 경우도 있고, 베드로가 기도하다가 황홀경이 덮쳐서 갑자기 비몽사몽 상태가 되어서 그 속에서 주님께서 친히 환상을 보여주면서 위에서부터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혹은 이렇게 조용히 깊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중인데 내면에서 조용히 들려주시는 주님의 영의 음성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영적인 다양한 의사전달 방식이 주의 백성들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천사도 활동하고 있고, 환상도 있고, 비몽사몽의 영적 황홀경도 있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실 수도 있고,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서 조용히 말씀해주시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는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나, 혹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나, 혹은 간혹 기도하는 중보 기도자의 예언이나 방언 통역을 통하여 말씀해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주님의 참 말씀일진대 언제든지 순종하여 행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말씀을 기다린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형태의 의사전달 방식이든지 그의 적절한 주권적인 때에 우리에게 말씀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도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주님의 음성이 분명한데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면서 거절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듣지 않으려 한다면, 결국 주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7:17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는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상황일지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주님께서 반드시 기록된 말씀이든지, 예언의 말씀이든지, 내면의 성령의 음성이든지, 때로는 환상이나 천사의 방문을 통해서라도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주의 뜻이면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서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립시다. 그러할진대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살펴볼 것은 23절에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고 하는 말씀에서 ‘유숙하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유숙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크세니죠’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손님을 모시고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나그네를 자기 집에 모시어 식사도 하고 잠도 주무실 수 있도록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6절에서도 이미 나왔는데,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이 베드로를 자기 집에 모시고 유숙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 43절에서는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여러 날’이라는 말은 하루나 열흘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두장이 시몬은 베드로를 자기 집에 모시고 해변가 중심의 모든 성도들을 계속하여 돌보고 지도할 수 있도록 숙식을 오랫동안 제공해왔음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렇게 주의 종들을 유숙하게 돕는 자들을 일일이 기록해놓음으로써 유숙하는 봉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을 떠나 저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 성에 가서 전도하였을 때 첫 성도였던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가 사도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강권하여 모신 일도 기록하고 있고, 후일 사도 바울이 삼차 전도 여행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그와 함께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는데 그것이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나손의 집에서 머물려 하기 위함이라고 사도행전 21:16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가 난파하여 머물게 된 멜리데 섬의 추장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배에 탄 사람들과 바울을 영접하여 사흘 동안 친절히 대접하였다가, 바울의 안수로 그 집 추장의 부친의 질병이 낫게 된 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도 나그네들을 대접하고 특별히 주의 종들을 자기 집에 모시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13:2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구약 시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성을 멸하려고 시찰차 방문한 두 명의 천사를 천사인 줄도 모르고 평범한 나그네인 줄로만 알고 자기 집에 모셔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하였다가 소돔 성이 멸망당할 때 천사의 도움으로 롯의 가족이 구출받은 은혜를 입었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종들과 나그네와 사람들을 가정에서 대접하여 모신 자들은 다들 복을 받은 기록이 허다합니다. 다윗 시대에 갈렙 지방의 여주인 아비가일, 마하나임의 바르실래,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 엘리사 선지자 시대의 수넴 여인, 예수님을 식사 대접으로 섬긴 베다니의 마르다 자매들, 바울과 교회를 늘 음식으로 대접하였던 고린도교회의 가이오 등 수많은 기록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풉시다. 남을 대접하기를 기쁨으로 행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풍성한 복과 은혜를 그 가정에 더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완전한 이방인인 고넬료를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 베드로와 만남을 갖도록 이끄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 구원의 문을 열고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사를 고넬료에게 보내주시어 말씀해주시고, 베드로가 기도할 때에 환상 중에 주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말씀해주시고, 환상의 뜻을 깊이 생각할 때에 베드로의 내면에 성령께서 친히 조용한 음성을 들려주시어 성령께서 그 사람들을 보내셨다고 간섭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이방인 구원의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열심히 역사 속에 개입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도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열심을 내시고 일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이러한 불굴의 사랑과 완고한 우리를 지치지 않고 깨우쳐주심과 세미한 음성과 섬세한 손길로 인도해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이 앞으로도 우리를 천국 문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매어 인도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줄을 누구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며 더욱더 기도 생활에 힘쓰고 구제에 힘을 씁시다. 하나님의 뜻일진대 언제든지 내 편견 아집 버리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백성들을 대접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늘 친절히 대하고 대접하고 베풀기를 힘씁시다. 그리함으로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펼쳐나감으로 장차 우리가 주님 나라에 갔을 때에 우리의 모든 수고가 기억하신 바 되어 주님으로부터 복된 상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