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傳心法要 제 11 강] Windows Media player
http://yumhwasil.linkone.co.kr/bupmun/yy-jonsim07-01-12-2.MP3?F3dQstYo_rJDQtFArko6uA00
[傳心法要 제 11강] 여천 무비스님. 문수선원
2107.01.12. - 2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本佛上에는 實無一物이라
본불상 실무일물
본원이 청정한 본래 부처 자리에는 실로 한 물건도 없다
“본불상에는 실무일물이라 - 본원이 청정한 부처 그 위에는 실로 한 가지의 물건도 없다.” 본원이 청정한 부처라고 그랬지요. 그게 앞에서 설명한 거죠. 전부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생겼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든 그건 아무 문제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다 이 말이야. 실로 한 물건도 없다. 예를 들어서 바닷물을 뜨던 그릇을 전부 바다에다 빠뜨렸다 합시다. 컵도 양동이도 빠뜨리고 온갖 물을 뜨든 것을 다 빠뜨렸다라고 했을 때, 그 바다와 하나가 됐다 이 뜻이잖아요. 하나가 됐을 때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컵이다 양동이다 종지다 이런 것이 거기엔 차별이 있을 수가 없어. 그냥 바닷물 한 덩어리 일뿐이야. 다만 그걸 건져내어 하나하나 따로 담아두었을 때, 그 때 차별상이 나타나는 거지. 본불상에는 실무일물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해합시다. 본래 부처인 자리에서는 실로 하나의 사물도 따로 독립되어 있을 수 없다.
虛通寂靜하야 明妙安樂而已니
허통적정 명묘안락이이
텅 비어 고요하고 정적해 밝고 아름답고 안락할 따름이니
“허통적정하야 명묘안락이이니 - 텅 비어 다 통해 있고 고요하고 정적해, 밝고 아름답고 안락할 따름이다.” 아무 분별없는 텅 빈 마음자리에 턱 던져놓고 내가 거기에 안주해 버려. 그냥 마음으로 있어. 차별상에 꺼들리지 말고. 오늘 누가 나를 두고 어떻게 했느니 뭐 거기에 꺼들리지 말고 귀 팔고 눈 팔고 하지 말고 그냥 마음에다 두고 살아. 그럼 그 자리는 허통적정이야. 텅 비고 다 통해 있어.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고요해. 좌선이 필요한 게 이래서 필요한 것이라. 한 번씩 이렇게 굳이 화두 들려고 하지 말고 아무 망상도 없이 텅 빈 마음자리에다 그냥 놔둬. 자기 자신을, 우리 자신을 텅 빈 마음자리에다 그냥 나둬. 이것이 아주 중요해요.
본래 화두선이 생기기 전에는 그렇게 했어요. 그걸 소위 묵조선이라고 이렇게 명명하는데, 우리 마음이 본래의 마음으로 있는 거여. 본래의 마음자리에서 컵으로 바닷물을 뜨고 양동이로 바닷물을 뜨고 하듯이, 우리가 본래의 텅 빈 마음자리에 있지 않고, 나를 비방했다 칭찬했다 날씨가 어떻다 상황이 어떻다 내가 세상에서 어떻다 하는 그런 출렁거리는 물결로 그만 내가 꺼달려 가는 거야. 그런 현상으로 꺼달려 가면 그럼 벌써 윤회야. 그게 윤회라고.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가 한 번씩 좌선하고 기도하고 공부한다 할 때는 그런 것에서 본래의 차별 없는 마음자리. “무위진인無位眞人 - 차별 없는 참사람” 그런 차별상이 끊어진 마음의 본 모습에 가만히 있어요.
마음의 본 모습에 있는 훈련을 자꾸 하는 것이 좌선이야. 마음의 본 모습이라고 방편으로 말을 하지만, 마음의 본 모습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는 훈련이 잘 돼 있으면 차별상에 그렇게 꺼들리지 않습니다. 잘났다 못났다 내가 어떻게 산다하는 거기에 그렇게 동요 안돼요. 동요되려고 하면 바로 마음의 본모습, 자기의 본 모습으로 돌아와 버리면 되니까. 괜히 컵으로 바닷물을 떠서 작나 할 것이 아니라 컵째 바닷물에 던져버려. 바닷물에 던져버리는 식으로 내가 차별상으로 생각이 흘러가다가 그 생각을 본래 마음에다가 놔둬버려. 가지고 꺼내지 말고 그대로 그 자리에 나둬 버려. 그 자리에 나두면 전체 “허통적정虛通寂靜하야 명묘안락이이明妙安樂而已니 - 우리 마음을 잘~ 표현했어요. 허하고 통하고 적하고 정하고 명하고 묘하고 안하고 낙해. 이게 우리 본래 마음자리라. 뭐 재미있다 하는 그런 즐거움이 아니에요. 그냥 편안함의 즐거움이야.
深自悟入하면 直下便是라
심자오입 직하편시
스스로 깨달아 들어갈 것 같으면 바로 그 자리가 이것이라
“심자오입하면 직하편시라 – 깊이 스스로 이러한 도리에 깨달아 들어갈 것 같으면 바로 그 자리가 곧 이것이다.” 이거야. 달리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뭔가 한 보따리 얻어서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 직하. 바로 그런 자리. 텅 빈 그 자리 본래의 마음자리에 내가 안주해 버리면 어디로 밖으로 흘러 다니지 말고 본래 텅 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버리면 그게 곧 옳은 자리다 이겁니다. 그래서 좌선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 좌선을 하다보면 그 자리에 자꾸 마음을 갖다 놓게 되고 그 자리에 갔다두는 훈련이 쌓이면 밖으로 활동한다 하더라도 크게 동요가 많지가 않지요. 활동을 하다보면 저절로 눈과 귀가 밖으로 꺼 달리게 되니까 차별상에 우리의 분별을 하게 되는데, 그렇더라도 평소에 이러한 것들을 알고 그리로 돌아가는 훈련, 이것을 자꾸 하다보면 쉽게 될 수가 있죠.
圓滿具足하며 更無所欠이니라
원만구족 갱무소흠
원만히 다 갖추어 다시는 더 이상 모자라는 바가 없나니라
“원만구족하며 갱무소흠이니라 - 원만하고 다 갖추어 다시는 더 이상 모자라는 바가 없나니라.” 欠少什麽오 그러죠. 임제스님은 그대 지금 보고 듣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그 신통방통한 기기묘묘한 그 위대한 능력, 그게 원만구족아니냐 이거야. 거기에 무엇이 더 부족하냐? 갱무소흠이니라. 거기엔 欠少什麽오. 여기엔 더 이상 모자라는 바가 없나니라.
縱使三秖精進修行하야 歷諸地位라도
종사삼기정진수행 역제지위
비록 삼지(삼아승지겁)를 수행 정진해서 모든 지위(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등)를 밟더라도
“종사삼기정진수행하야 역제지위라도 - 비록 삼지 수행해서 삼지(삼아승지겁)를 온갖 지위를 밟고 올라간다 하더라도”, 삼아승지겁은 수 억 만년의 세월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지라는 것은. 수억 만년의 세월 동안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하면서 한 시간도 하루도 일 년도 쉴 여가 없이 그렇게 정진 수행해서, 역제지위라도 - 온갖 지위를 다 거쳐서 올라간다 하더라도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온갖 수행 계위는 다~ 밟아서 올라간다 하더라도
及一念證時에는 祇證元來自佛이요
급일념증시 지증원래자불
깨닫는 순간에는 본래 스스로가 부처임을 증득함이요
“급일념증시에는 지증원래자불이요 - 한 순간 깨달았을 때는 다만 원래 자기 부처, 본래부터 자기 부처인 것을 깨닫는 것이지, 뭐 한 단계 올라갔다고 해서 한 단계 올라간 부처를 깨닫는 게 아니고, 십지 십행 십회향 이런 단계에 설사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그 올라간 그 부처를 깨닫는 게 아니야. 원래 자불. 원래부터 내 부처. 이건 닦고 자시고할 이유가 없어. 아까 이야기한 원래 자불을 깨닫는 것이라. 그 올라간 수행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야. 그래서 정말 수행한 것이 오히려 정말 후회스럽고 분하죠. 알고 보니 안 해도 되는 것을 괜히 했다 이거야.
그래 부처님이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깨닫고 나서 보니까 자신은 대단하거든.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다른 사람 한 번 살펴보자 하고 다른 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중생들 낱낱이 살펴보니까 전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똑~같이 갖추고 있는 거야. 그걸 보고 부처님은 참 “기재기재奇哉奇哉 라 -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처음으로 말했어요. 부처님 수준에서 신기한 게 어디 있겠어요? 그분이 신기하고 신기하다 한 부분이 거기에서 그랬어요. 자기 자신은 그러한 희생과 노력을 치루고 나서 부처가 됐는데, 전혀 그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단 돈 십 원도 어디 보시한 적도 없고, 반장 동장 자리도 하나 내놓고 출가한 그런 예도 없는 그런 사람들도 그대~로 자기하고 똑같이 여래의 지혜의 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는 이게 신기하다. 이 일이 신기하다. 그랬어요. 그래 모든 사람들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 불가촉천민들 모습을 보면 저것이 사람인가? 짐승인가? 짐승도 보통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아니라 갖다 버린 짐승 같은 그런 모습이라고.
지금도 가보면 사실은 그래요. 그런 모습을 갖춘 외형을 가졌더라도 그런 분들 마음 자리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음자리와 똑같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거예요. 그래서 “기재기재奇哉奇哉 라 - 신기하고 신기하여라.”어째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똑같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었는가? 이런 감탄의 말씀을 하셨잖아요. 불교의 위대성은 바로 이러한 도리를 깨달은데 있고, 또 이러한 도리를 우리들 각자의 것으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지증원래자불祇證元來自佛이요’ 참 좋은 말이죠. 삼아승지겁 동안 정진하고 수행해서 지위를 밟아 올라갔다 손치더라도, 수 백 년 동안 아등바등 용맹정진하고 온갖 삼천대천세계만한 칠보와 무엇으로서 보시해서 설사 공덕을 닦았다하더라도 깨닫고 보니까 뭐라고? 원래 自佛을 깨달았을 뿐이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부처를 깨달았을 뿐이다.
向上에 更不添得一物이니라
향상 갱불첨득일물
위를 향하여도 궁극에 가서는 다시 한 물건도 첨가한 것이 없으리라
“향상에 갱불첨득일물이니라 - 궁극에 가서는 다시 한 물건도 첨가한 것이 없느니라.” 육바라밀 닦는다고 뭐가 첨가되는 것도 아니고 참선한다고 첨가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수행을 한다하더라도 부처위에다가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야. 자불- 원래 자불 위에다가 한 물건도 첨가하고 보태는 것이 아니더라. 절대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최상승의 가르침입니다. 보통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닦아야 되고 보시해야 되고 지계 계행을 가져야 되고, 온갖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시장에 늘려있는 수많은 그런 가르침들이 대다수인데, 이건 그런 가르침하고 다른 거죠. 그래서 그게 보태지고 보태져서 결국은 부처가 되는 줄로 알고 있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절대 그게 아니에요. ‘갱불첨득일물이리라’고 했잖아요. 하나의 물건도 거기에 더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부증불감不增不感이다. 부증불감不增不感.
卻觀歷劫功用이 總是夢中妄為라
각관역겁공용 총시몽중망위
수 억만년의 세월동안 공을 쌓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꿈 가운데 하는 허망한 일이니라
“각관역겁공용이 총시몽중망위라 - 도리어 관찰해 보건데 역겁(삼아승지겁)은 수 억만년의 세월동안 노력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서 공을 쌓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꿈 가운데 하는 건립이니다. 허망한 일이다.” 허망한 일이니까 하나마나한 일이지요. 그래 부처님의 6년 고행 때문에 깨달았다하는 것도 허망한 일이다 이거죠. 그것도 맞지 않는 일이야. 그저 그 분의 경력이 그럴 뿐이지 6년 고행이 부처되는데 도움이 되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부처가 된 당처자리에는 하나~도 도움이 될 것이 없고 안했다고 해서 하나도 손해 볼 것도 없고, 그래서 낱낱 중생들을 보니까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더라는 이런 말씀을 하신 거죠.
故로 如來云 我於阿耨菩提에 實無所得이니
고 여래운 아어아뇩보리 실무소득
그러므로 여래가 말씀하시길 최상의 깨달음에 있어서 실로 얻은 바가 없나니
“고로 여래운 아어아뇩보리에 실무소득이니 -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길 최상의 깨달음에 있어서 실로 얻은 바가 없나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금강경에 있는 말이죠. 본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당신이 깨달았다고 해도 더 첨가된 것이 아니야. 원래 자불이야. 이게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어. 그래서 얻은바가 없어. 다 있는데 뭘 얻었어. 괜히 남의 집에 있는 것 가지고 자기 집에 있는 것을 주워서, 아 ~ 어디서 이렇게 좋은 것을 주웠냐고 이런 것하고 똑같은 거지. 본래 자신의 자기 집의 것인데 새삼 발견하고는 새로 얻은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거죠.
若有所得이런들 燃燈佛이 卽不與我授記라하시며
약유소득 연등불 즉불여아수기
만약 얻은 바가 있다면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며
“약유소득이런들 연등불이 즉불여아수기라하시며 - 만약 얻은 바가 있었던들 연등불이 수기하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이야.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얻은 것이 있으면 그건 외도고 잘못된 것이니까. 본래 얻지 않아도 다 갖추고 있는 그 도리 때문에 연등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를 해서 그대는 언제언제 부처가 될 것이다. 라고 이렇게 수기를 했다 이런 말입니다.
又云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라
우운 시법 평등 무유고하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우운 시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라 -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다.” 금강경에 유명한 말이죠. 평등해서 부처라고 더 가졌고 중생이라고 해서 덜 가지고 있고, 불교 믿는다고 해서 많이 가졌고, 기독교 믿는다고 해서 불성이 없고 부처가 아니고 그런 게 아니야. 불교를 비방하고 부처를 비방하는 사람도 부처님이야. 부처가 들어있지 않고는 그렇게 비방할 줄 모르지. 비방할 줄 아는 게 부처의 능력이거든. 이런 소리도 우리가 비록 경전을 공부해서 하는 소리라 하더라도 이런 소리도 불교인 밖에 못하는 거야. 불교를 비방하는 그 능력이 바로 부처야. 부처님이라고.
是名菩提라하시니 即此本源清淨心이
시명보리 즉차본원청정심
이 이름이 깨달음이니 곧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청정심이
“시명보리라하시니 즉차본원청정심이 - 이것이 이름이 깨달음이다 곧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다.” 이거야 시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라- 높고 낮음이 없고 일체 인이 다 평등한 그 자리가 바로 이것이 깨달음이다 보리다. 즉차본원청정심이 - 곧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 마음자리. 본원청정심 참 좋지요. 근본자리. 그리고 아주 훌륭한 마음.
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착하다 사양을 잘 한다 겸손하다 그래서 청정심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 그것 아니에요 그렇게 알면 큰일이야.
본원청정심은 본래부터 아주 뛰어난 마음, 훌륭한 마음, 텅 빈 마음.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욕심 부릴 줄 알고, 화낼 줄 알고, 욕도 할 줄 알고, 칭찬도 할 줄 아는 이런 능력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소리지. 그 사람은 말끝마다 칭찬만하고 좋은 소리만하고 어디가도 그 사람은 칭찬받는 사람이다. 이래서 청정심 절대 아닙니다. 그것 제발 알아야 해요. 그 악한 사람 천하에 아주 악하고 극악무도한 사람도 똑같이 근본자리는 청정심이야. 본원청정심이
與衆生諸佛世界와 山河有相無相과
여중생제불세계 산하유상무상
중생과 부처세계와 더불어 온 산천초목 삼라만상 형상이 있든 형상이 없는 것과
“여중생제불세계와 산하유상무상과 - 중생과 부처세계와 더불어 온 산천초목 삼라만상 형상이 있든 형상이 없는 것과
遍十方界가 一切平等하야 無彼我相하나니
변시방계 일체평등 무피아상
시방세계 일체가 평등해서 너와 나의 상이 없나니
“변시방계가 일체평등하야 무피아상하나니 - 저 은하계 우주계 전체 일체가 평등해서 피아(너와 나)의 상이 없다.” 너는 잘났고 나는 못났고 하는 그런 차별상이 없이 똑같다. 피아상이 없다 이거야.
此本源清淨心이 常自圓明遍照어늘
차본원청정심 상자원명변조
본래 청정한 마음은 항상 저절로 원망하게 밝고 두루 비추나니
“차본원청정심이 상자원명변조어늘 - 이 본래 근원이 청정한 본원이 청정심이 항상 저절로 자동으로 원만히 밝게 비추나니” 햇빛은 그늘도 있고 그렇죠. 마음의 광명은 그늘도 없어요. 원명변조어늘 - 두루두루 비추어 늘. 우리 마음자리를 참 설명 잘 했어요. 본원청정심이 항상 저절로 원명변조라 원만히 환~하게 두루두루 비추거늘
世人은 不悟하야 秖認見聞覺知為心하며
세인 불오 지인견문각지위심
세상 사람이 깨닫지 못하여 견문각지 위주로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하지마는 그것만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세인은 불오하야 지인견문각지위심하며 - 세상 사람이 깨닫지 못하여 나는 견문각지 중심으로 어쩔 수 없이 자꾸 이야기를 하지마는 그것만이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거지.” 견문각지를 통해서 우리가 마음의 근본자리를 이해하라고 자꾸 견문각지를 말을 하지마는 견문각지 그것만이 마음이다 이렇게 하면 안돼요. 그럼 견문각지 -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춥고 덥고 화나고 슬퍼하고 기뻐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없나요?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의 마음의 물결일 수가 있고 또 하나의 조각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가지고 내가 자꾸 이해하기 쉽도록 마음 마음 하지만, 본래 마음자리는 그것만을 가르친 게 절대 아니죠. 그건 정말 물결에 불과한 겁니다. 전체 물은 아니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해서
為見聞覺知所覆하야 所以不睹精明本體하나니
위견문각지소부 소이부도정명본체
다만 견문각지를 오인해서 마음으로 삼으며 견문각지에 덮여서 정미롭고 밝은 본래의 마음을 보지 못하나니
“위견문각지소부하야 소이불자정명본체하나니 - 다만 견문각지를 오인해서 마음으로 삼으며, 견문각지에 덥힌 바가 되어서 아주 정미롭게 밝은 본래의 심체 본래의 마음 그 자체를 보지를 못하나니” 그렇죠. 그저 보고 듣고 말할 줄 아는 이것이 마음이다. 물론 마음이에요. 그것만이 마음이라고 하면 그 모든 능력 다 가지고 있는 그 본래의 마음자리는 못 볼 수가 있어. 이 말이 그 말이야. ‘소이부도정명본체하나니, 정명한 본래의 마음 체를 보지 못하나니’
但直下無心하면 本體自現하야
단직하무심 본체자현
바로 당장에 무심할 것 같으면 본래의 심체가 저절로 들어나니
다만 곧 바로 무심하면 그런 차별된 마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끊어진 자리 그게 이제 무심이죠. “단직하무심하면 본체자현하야 - 바로 당장에 무심해질 것 같으면 본체가 마음자리가 저절로 들어나 거기에 계합해 버리는 것이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그것이 본체자현이라.” 본래의 심체가 저절로 들어나니
如大日輪이 昇於虛空인달하야
여대일륜 승어허공
마치 큰 태양이 허공에 떠올라
“여대일륜이 승어허공인달하야 - 비유하건데 마치 큰 태양이 허공에 한 낮이 되어 이렇게 떴다 이거야.”
遍照十方하며 更無障礙니라
변조시방 갱무장애
시방세계를 두루두루 비추며 더 이상 장애가 없느니라
“변조시방하며 갱무장애니라 - 시방세계를 두루두루 비추며 더 이상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건 또 비유니까 그렇지. 우리 마음은 비유를 태양에다 할 수도 있지마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태양은 그림자라도 있지만, 우리 마음은 사실은 그림자가 없어요. 환하게 비치는 능력. 아는 능력은 태양이 비추는 것에다 비유는 할 수 있어도 전체가 우리 마음이 태양과 똑같다 이렇게 하면 틀립니다. 비유는 어느 부분만 들어서 하는 거죠.
우리 마음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어떻다 라고 하는 것. 그런 차원에서 봐도 우리 마음의 문제는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고, 또 이런 정말 마음을 제대로 깨달은 분들이 보는 그 마음은 이건 우리가 쉽게 이해가 안돼서 그렇지 정말 어마어마한 마음자리인데 그것이 내 손에 딱 잡히지 않아서 긴가민가 싶고, 또 얼른 납득이 안 될 뿐이지 사실은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누구든지 똑같이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하고.
또 이러한 것을 참, 이런 스님 같은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자꾸 이근공덕으로 귀로 스치는 그런 인연이라도 지어 놓으므로 해서 언젠가 이것이 눈이 확 뜨이고, 내 마음에 확 다가서지 않겠나 하는 이런 기대를 해 봅니다. 아무튼 어떤 차원에서 보더라도 불교가 이 마음을 발견해서 모든 문제의 근원을 마음에다 집중시켜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 만고에 더 이상 좋은 가르침이 없어요. 아까 그런 세상의 어떤 예화를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정말 세상에 만고의 이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마음의 원리를 깨달아서 마음의 원리에 입각해서 하는 이런 가르침은요. 그걸 아셔야 돼요. 불교가 위대한 점이 바로 그런 점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전심법요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퍼온 곳 : http://cafe.daum.net/yumhwasil/835Q/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