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健忘). 우리말 사전은 그 뜻을 이렇게 달고 있다.
'한번 보거나 듣는 것을 잘 잊어버림(forgetfulness). 사물을 잘 잊어버림.' 이렇게 설명하는 정의는 '잊어버린 대상'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으나,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통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습적이거나 그 정도가 넘어서면 일종의 병적인 증후군으로 간주한다(memory loss).
'나를 잊지 말아요(Don't- Forget Me-Not)'
누구나 사춘기 시절에 한번쯤 들어보며 가슴 뭉클하게 되새기던 말로 '애달픈 사랑의 사연이 깔린' 꽃 이름이다. 이것이 노래가 되어 '잊지 말아 달라는 꽃말'로 통하게 되었지만, 굳이 풀어헤쳐, 다른 말로 표현하라면 두 가지 의미를 달 수 있다.
첫째 외적으로는 인간의 건망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건망에서 오는 무관심, 잊혀져 버린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내적인 몸부림이 깔려있다.
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간다.
"닥터-"
환자는 머뭇거린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듯.
"닥터-제 기억력이 어제와 같지 않아, 요즈음은 금방 들은 말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병이 아닐는지요?"
심각하게 호소한다.
"그래요?"
의사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입안에서는 그의 이름이 맴도는데 선뜻 혀가 돌아 주지 않는다. 그것도 2 십여 년을 넘게 돌 보아온 주치의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지요?"
의사의 물음에 환자는 오히려 당황하고 그를 쳐다본다.
피장파장의 사실.
"나이라는 것이......다 속여도 연륜만큼은 속일 수 없으니-. "
심각한 환자의 표정에서 나올만한 대답이란 이 말 밖에는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생체현상의 건망이야 따질 게재가 못되기 때문에 물망초의 본래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문제는 바로 "잊는 다는 사실"에 있다. 즉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요, 또 그 것을 빙자한 '모른 척'과 무관심을 더욱더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가리켜, '망각이 아니라 사실의 과정과 인간의 심리적인 기초, 즉 그렇게 하고 싶은 갈망(?)의 표출이다'고 말한다.
'나의 기억은 '나는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 따위 짖을 힐 까닭이 없지 않는가'라고 냉정하게 털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는 기억에서 물러서고 만다.'고
그렇다면 기억이란 무엇인가? 먼저 심리 의학적인 설명을 보자.
기억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적응능력을 결정 짖는 요소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과학에서는 가장 적은 노력으로 적응을 해 나가게 하는 정신활동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의 형성과정을 보면 3단계로 나누는데, 먼저 받았던 인상을 받아드리는 등록이 있고, 다음은 등록된 인상을 간직하는 보유과정. 그리고 그것을 회생시키는 재생의 단계로 나눈다.
여기서 기억장애라는 증상은 기억과잉. 기억상실. 기억착오로 나누어 보게 되는데 건망이란 기억상실 즉 보유에서 재생의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들이나 망상적 정신병에서 나타나는, 기억과잉에서 나오는 다른 기억들의 상실이나 기질적인 상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리적 요인에서 오는 소극적인 기억상실은 인간의 양면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소극적 기억상실. 즉 건망으로 통하는데 그것도 심하다 보면 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망각은 불안한 경험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소위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도피다. 인생에 있어 흠집이란 살아온 연륜처럼, 얼굴의 주름살만큼이나 정신적인 면에서도 이골지게 만든다. 그래서 얼굴의 주름을 펴는 성형수술을 하듯, 누구에게나 잊어버리고 싶은, 외면하고 싶은 기억들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필름을 잘라 내 버리듯, 해리(解離.Dissociation)하고 싶은 방어과정에서 기억상실(記憶喪失. Amnesia)증이나 '병적인 거짓말쟁이(Pseudologia Phantastica)'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억착오(記憶錯誤. Paramnesia)증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건망을 가리켜 희망(喜忘)및 선망(善忘)이라 하고 있다. 말뜻으로 보면 희나 선이나 기분 나쁜 감을 주는 글자는 아니니, 잊고 사는 것이 좋다는 뜻을 반영하는 것일까?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을 달아 놓고 있다.
먼저 신지(神志)라는 관점으로, '노(怒)함이 그치지 않고 정도를 넘어서면 신(腎)이 손상을 받아 지를 상하게 하고 지가 상한 즉, 앞에서 했던 말도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靈樞>'고 했고 단계(丹溪)는 너무 심한 근심과 걱정으로 심포(心包)를 상하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심과 비가 상하여 정신이 단소(短少)해지고, 神志가 불청(不淸)하게 되고, 또는 담(痰)으로 인하여 발생한다.<丹溪心法>고 하였다.
이점에 대하여 의감<醫鑑)은 '건망이란 멍청하게도 자신이 한 일을 잊어버리는 증이니, 심력을 다하여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요, 이는 심과 비 두 경에서 이상이 발생한 것이다. 심은 사(思)를 맡고 비 또한 사를 맡는데 사려가 과다하면 심(心)이 상하고 혈이 손모되어 신이 집을 지키지 못하며 비가 상하면 위기가 쇠약해져 쓸데없는 생각을 자주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므로 건망이 발하게 된다... 먼저 심혈을 기르고 한가한 곳에서 안일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육음(六陰)과 칠정(七情)을 멀리하고 자제한다면 자연 쾌유가 되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
소극적 건망과는 거리가 먼 기질적 건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원인은 심비부족에서 오는 것이며 결국은 신정(腎精)의 허쇄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비는 혈의 근원으로, 신은 정수(精髓)근본으로, 사려가 과도해지면 비가 상하여 음혈이 손모되고, 방사(房事)가 지나친 즉 정이 마르고 수가 쇠해져 뇌의 영양이 불충분해지므로 쉽게 건망 한다.
이점은 나이가 들수록, 노경에 들면 기억력이 희미해지며 잠이 줄어지는 경우와 같다 할 것이다. 원래 건망이란 불면과도 관계가 깊어 양자가 같이 야기되어 치료에 있어서도 심혈을 자양하고 비신을 보하는 것을 주로 한다. 변증상 치료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심기허(心氣虛)
오래된 병이나 나이가 들어 장부가 허약해지거나 과도한 땀이나 설사로 인하여 기혈이 손상되었을 때 나타나는 심기허증(心氣虛證)으로, 심은 혈맥을 주관하고 (心主血脈), 기는 혈의 사(師)로 심기가 부족하면 기 또한 단소 해져 심계 정충하고, 과도한 운동은 기를 소모시키므로 심한 운동을 하게되면 증상이 가중된다.
땀이란 심의 액(心之液)으로 심기가 허하면 발한을 수렴하지 못해 자한증상이 나타나고 (心主汗液), 기가 허해지면서 면부를 자양하지 못하므로 면색이 창백하고(心其華在面) 신기(神氣)불청 하여 건망이 발생한다(心主神志).
치료. 양심안신(養心安神)
처방. 천왕보심단(天王保心丹), 백자양심환(柏子養心丸).
심신양허형(心神兩虛型)
이 증은 심양허와 신양허로부터 시작하여 심신양허에 이른 것으로 심양허증과 신양허증이 동시에 나타난다. 정의 부족은 체질적으로 소체가 약하거나, 오랜 병으로 인하여 정혈이 약해져 신음(腎陰)의 부족을 초래하고 신정이 부족하고 수해를 자양하지 못하여 공허(空虛)하기 때문에 두훈. 이명. 건망이 나타나고, 요부가 실양 된 즉, 요산(腰酸)이, 허화가 동하여 정관(精關)이 불고하므로 유정(遺精)조루(早漏)가 나타난다.
치료. 양심보신(養心補神)
처방. 구녹이선교(龜鹿二仙膠) 합 공성침중단(孔聖枕中丹)
구판(龜板). 용골(龍骨). 원지(遠志). 석창포(石菖蒲). 녹용(鹿茸). 인삼(人蔘). 구기자(枸杞子).
심비양허형(心脾兩虛型)
이 증은 병후실조나 만성출혈, 음식의 부절제, 또는 과도한 사려로 지나치게 되면 심혈허(心血虛)증과 비기허증(脾氣虛證)이 함께 나타난다. 심혈(心血)이 상하게 되면 심음(心陰)이 부족하여 심신을 자양하지 못하므로, 심계(心季). 건망(健忘). 역경(易驚). 다몽(多夢). 불면 등이 나타나고, 비기가 허약하여 비의 운화기능(運化機能)이 실조되므로 사지가 나른하고. 먹어도 살이 오르지 않는 납매(納 )현상이 나타나며 복창(復脹)과 함께 대변이 부실해진다. 비의 운화기능 실조는 혈의 부족을 야기하고, 혈허는 면색을 얼굴에 윤기를 잃게(不華)하므로 누렇게 떠 보이게 한다.
심계와 건망이 나타나는 것은 심비휴허(心脾虧虛)로 인하여, 혈이 생할 원천을 잃은 것이며, 혈의 운행이 무력해져 심에 영양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훈(頭暈)목현(目眩)은 기혈이 양허(兩虛)하여 뇌에 이르지 못하므로, 청양(淸陽) 또한 뇌에 오르지 못해 뇌를 자양하지 못한 것이다. 설질(舌質) 담담(淡淡). 태박백(苔薄白). 맥세약(脈細弱).
치법. 보양심비(補養心脾). 영지안신(寧志安神)
처방. 귀비탕(歸脾湯)을 가감한다.
인삼(人蔘). 황기(黃耆). 백출(白朮). 백복신(白茯神).
산조인(山棗仁). 용안육(龍眼肉). 목향(木香).감초(甘草).
당귀(當歸). 원지(遠志). 생강(生薑). 대조(大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