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긴 먹물이 미인도의 눈동자를 그리다
스무 살 때 춘원의 흙, 무정, 유정을 읽었다. 앞의 두 작품은 계몽사상을 담고 있는 내용이라 관심은 많았으나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유정은 춘원 자신이 ‘나의 작품 중 후세에 남을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유정이라’고 했듯이 남녀 간의 순수한 애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폐결핵에 걸린 정임이 죽을 결심으로 멀리 시베리아로 떠난 최석을 찾아갔으나, 최석은 이미 죽어 버린 결말을 읽으면서 읽는이의 가슴은 아스라이 아팠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나는 한국 소설사의 주류는 단편에 있다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곧 백수사(白水社)에서 나온 다섯 권짜리 한국단편소설전집을 구입하였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고 해설도 실려 있어서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한 달여 만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다 읽었는데, 춘원의 장편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문학적 향기를 맛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감명이 깊었고 지금도 가슴에 남는 것은 김동인의 작품이었다. 그때 읽었던 많은 작품들에 대한 생각이 대체로 희미한데, 동인의 작품들만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붉은 산, 광화사, 광염소나타, 배따라기, 감자, 김연실전, 발가락이 닮았다’ 등의 줄거리가 뇌리를 스친다. 동인은 춘원이 가졌던 계몽주의를 벗어나 문학은 문학대로의 미적인 예술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바,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유미주의적인 경향들로 꽉 차 있다. 이들 중 몇 작품을 들여다보자.
먼저 ‘붉은 산’의 줄거리를 본다.
만주에 조선 소작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에는 ‘삵’이라는 별명을 가진 교포 청년 정익호가 살고 있는데, 그는 난폭하고 교활한 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 그는 아주 괴팍하고 간교하게 생겼고 행동거지가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한 그가 하는 일은 투전이 일쑤이며, 싸움 잘하고, 트집 잘 잡고, 칼부림 잘하고, 색시에게 덤벼들기 잘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삵’을 동리 사람들은 쫓아내자고 합의한다. 그는 같은 조선인들을 괴롭히며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라 마을 사람들은 그를 증오하지만 그의 난폭함 때문에 차마 삵을 쫓아내지 못한다.
어느 날 송 첨지가 소출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인 지주에게 매를 맞아 죽음을 당한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를 터뜨리나 아무도 만주 지주에게 맞설 용기가 없었다. 이때 ‘삵’이 혼자 지주에게 쳐들어가 싸우다가, 맞아서 척추가 꺾인 채로 발견된다. 그는 단신으로 못된 만주인 지주의 집에 가서 송 첨지를 죽인 분풀이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정익호는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붉은 산과 흰옷은 한민족이나 조선을 상징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을 때만 하여도 온 산은 붉었고 시골 사람들은 흰 무명옷을 입었다. 이처럼 피폐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순수한 사람들. 그런데 이들은 용기가 없었다. 삵은 이러한 여건을 스스로 깨닫고 자학하여 그런 못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쁜 짓만 골라 하던 그였지만 이러한 민족적 고뇌 앞에서는 용감하였다.
억압받는 민족의 저항 의식과 조국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극적으로 표현된다. 끝부분의 이러한 전환점에서 삵의 투사적인 애국심이 애국가와 함께 들려와 읽는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다음으로 광화사를 보자.
솔거는 추한 얼굴로 태어나 열등감을 가졌으나 천재적인 화가다. 그는 산속에서 은둔해 살며 그림에만 몰두한다. 솔거는 평소에 절세미인을 그리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미인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산속에서 소경 처녀를 만난다. 그 처녀는 바로 자기가 찾던 미인의 모습이었다. 솔거는 처녀를 집으로 데려와 자신이 바라던 순수한 미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의 눈동자만 남겨 놓은 채, 그날 밤 부부의 연을 맺은 후 다음 날 솔거는 눈동자를 완성하려 하지만 소경 처녀의 눈은 전날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잃고 있었다. 화가 난 솔거는 소경 처녀의 목을 잡고 흔들다가 결국 그녀를 죽이고 만다.
그녀가 넘어지는 바람에 엎어진 먹물이 튀어 미인도의 눈동자가 찍히고 그림이 완성된다. 솔거는 미인도를 품고 다니다가 쓸쓸히 죽는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동인의 탐미주의가 그대로 나타난 작품이다. 그런데 그 미적 염원이 하룻밤의 육체관계로 인하여 순수하던 여인의 미가 추함으로 전환된다. 그에 대한 절망적인 분노의 장면은 김동인의 독특한 예술관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산’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결말 부분에서 극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넘어지는 바람에 엎어진 먹물이 튀어 미인도의 눈동자가 찍히고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절묘한 기법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촛불의 미학”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언급한 바 있다. 동인은 출중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절대 상상력’을 소유한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적 완성은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동인의 예술관을 볼 수가 있다. 미를 찾기 위하여 한 여인을 죽인다. 이것은 동인의 유미주의적인 경향을 여실히 드러낸다. 유미주의는 탐미주의,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이름으로 불려지는 개념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동인의 관점은 ‘광염 소나타’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줄거리를 보자.
백성수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함께 범죄의 광기를 지닌 인물이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종교 활동을 통해서 광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병이 들자 백성수는 약값을 구하기 위해 담배 가게에서 돈을 훔치다가 붙잡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백성수가 출옥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묘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깊은 원한을 품게 된 백성수는 그 담배 가게를 찾아가 방화를 저질렀으며, 그 불길에 흥분해서 ‘광염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K에게 발견되면서 음악계에 데뷔했다. 그리하여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그 쾌감에 도취되어 창작욕을 불태우는 비정상적인 욕망에 시달리게 된 다. 얼마 동안 참고 있던 백성수는 또다시 방화를 저지르고 ‘성난 파도’를 작곡했으며 자신의 광기를 완전히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성수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 밤중에 다리 밑에서 노인의 시신을 마구 던져 짓뭉갠 다음 ‘피의 선율’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심지어 사랑하던 여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간(屍姦)을 저지른 다음 ‘사령(死靈)’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이에서 보면 그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살인을 저지른 끝에 결국 범죄자로 붙잡혔다. 음악가들의 탄원으로 일단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정받아 정신병원에 있으며 K씨가 ‘이 사람은 음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정상인데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게 맞는 것인가’라는 고민을 들려준다.
걸작을 낳는 예술가의 광기에서 비롯된 범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답변이 엇갈리며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다.
주인공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불을 지르고 또 죽은 시체를 간음하고 나아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것 역시 작가의 유미주의 예술관에서 나온 것이다. 기존의 예술은 교훈적인 내용과 같은 다른 목적을 전달하는 데에 예술을 이용했다. 소설 속에서 백성수가 추구하는 예술은 다른 목적이 전혀 없는 예술 그 자체이다. 오로지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서 기존의 예술적인 관습을 깨뜨린 것이다.
탐미주의는 부도덕하거나 추한 것에서까지 미(美)를 찾으려고 하는 문학관이다. ‘모든 것의 희생 위에서 희귀한 예술이 완성된다’는 김동인 작가의 성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악(惡)도 미(美)’라는 그의 ‘미에 대한 광폭적인 동경’을 나타낸다. 동인은 광염소나타에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선과 미, 이 상반된 양자의 합일점을 발견하였다. 나는 온갖 것을 ‘미’의 아래 잡아넣으려 하였다. 나의 욕구는 모두 다 미다. 미는 미다. 미의 반대의 것도 미다. 사랑도 미이다. 미움 또한 미이다. 선도 미인 동시에 악도 또한 미다. 가령 이런 광범위한 의미의 미의 법칙에까지 상반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존재다.”
괴팍한 모습과 행동으로 빚어지는 ‘삵’의 태도, 흉한 모습으로 태어난 화가 솔거의 미인도에 대한 광적인 집착 그리고 백성수의 예술창작에 대한 광기 어린 행동 등은 모두 이러한 추(醜)를 통한 미적 열정 즉 추미(醜美)를 추구한 것이다.
그는 평양의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동인은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경제관념이 없던 그는 사치벽으로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옷과 구두를 맞춰 입고 백금 시계에 백금 시곗줄을 달아 차고 다녔으며, 갖은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 수집을 취미로 삼았다. 경마, 마작 등 도박에도 몰두했으며 낮에는 고급 요정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 명을 데리고 놀았고, 밤에는 프린스 호텔에서 또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 일본도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 수시로 놀러다녔으며, 담배 한 갑을 사려고 중국에서 신의주까지 인력거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선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까먹은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에 보통강 수리 사업에 뭣도 모르고 투자했다가 쪽박을 찼다. 그 많은 재산은 물론이요 선친이 남겨준 400평짜리 대저택도 모조리 날렸다. 가뜩이나 난잡한 김동인의 오입질에 생활고까지 겹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부인은 결국 자식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출해 버려 졸지에 이혼남이 되기도 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저질렀던 이러한 수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변명하는 논조를 쓰기도 했다.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쓰러졌는데, 그 후 병이 악화되어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이후에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떠나려 했지만 이미 중풍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그는 왕십리 자택에 홀로 남았다.
결국 7개월이 지난 1951년 8월이 되어서야 가족이 집에 들르니 김동인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누군가에 의해 김동인은 집 근처의 밭고랑에 시신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의 시신은 거두었으나 당시의 상황이 어려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해, 결국 1951년 11월 화장을 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김동인은 이렇게 얼룩진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예술가란 어떤 이상을 향해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며, 지상 세계에서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김동인의 생각이었다. 작품에서처럼 그의 삶도 추미(醜美)를 좇았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