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 2장 12절 – 17절
성경은 한세대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보는 사람들은 말씀이 주어진 그 시대의 시대상황을 살피고 그 시대상황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 버린다면 그 말씀은 그 시대의 말씀으로 머물고 맙니다. 시대상황이 전혀 다른 현재의 상황속에서 그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현재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고서 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유명한 신학자와는 다릅니다. 신학자는 성경을 잘연구해서 가르치지만 설교자는 하나님의 현재의 상황에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신학자는 단순히 성경만 잘 연구한 학자보다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가르친 경험을 가진 자들이 더욱 요구되고 합당한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먼저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본문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말씀이 주어진 그 시대상황을 연구하고 그 시대상황 가운데서 그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을 알아 냅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한 상황 가운데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담대하게 전하고 단호하게 전하며 그리고 사랑으로 말씀을 듣는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려고 축복만을 노래한다든가 또는 심판만을 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현재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세상이야기와 다른 점은 이 말씀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통로 이고 말씀을 인도하시고 말씀이 말씀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이야기는 감동을 줄 수 있고 다짐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이야기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고 거기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사도요한에게 말씀하시며 장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환상을 통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데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나님이 설교자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지역은 박해가 집중적으로 일어나가 시작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아시아지역은 교회들 가운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교회들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이 에베소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전하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 일곱교회들은 일곱가지 유형의 교회들입니다. 교회들이 처한 상황이 다 다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에게 그 당시의 소아시아지역 일곱교회들에게 전하라고 말씀을 주시지만 그 말씀은 그 시대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시대에도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교회들이 처한 상황과 그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는 에베소교회와 같아서 교리가 정통이라고 하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지만 교회의 예배와 성도들의 삶에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단들에게는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찾지 아니하고 구하지 않는 경우에도 성령님은 근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버가모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오늘 현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 처음 문장에서 예수님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서머니 교회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버가모교회는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은 너무나 예리하여서 사람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병원에서 시티촬영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시 버가모교회가 위치한 버가모는 사탄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버가모에서 충성되게 말씀을 전하던 안디바가 순교를 하였습니다. 안디바는 사람들의 위협과 온갖 악담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버가모교회는 그 만큼 사탄을 숭배하는 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신뢰하므로 사탄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므로 고통을 당하는 버가모교회였지만 그럼에도 교회안에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 중 하나였는데 그런 그가 헬라철학에 빠져서 복음을 전하기 보다 헬라철학에 기초해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오랫동안 교회에서 악한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버가모교회는 니골라와 그에게 동조하는 자들을 받아드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말씀을 전하기 보다 세상철학을 전하거나 신변잡기를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니골라당은 헬라철학의 쾌락주의를 좇았습니다. 당시 헬라철학은 진리에 이르는 길로서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니골라당은 쾌락주의를 말하면서 성도들은 진리안에서 자유케 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 자유를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에도 사용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도 때론 쾌락주의를 추구합니다. 오늘날 어떤 이단들도 니골라당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니골라당의 행위는 발람의 행위와 같다고 하십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음란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시는 예수님은 니골라당에게 유혹된 자들까지라도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문화가 충만하고 니골로당의 유혹이 만연한 버가모교회성도들에게 이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들에게는 만나를 주시고 흰돌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만나는 예수님의 몸을 주시는 것을 말하며 흰돌은 승리자라는 뜻입니다. 이 승리한 자들은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악한 세상과 잘못된 가르침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