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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쉰들러네 원문보기 글쓴이: 김 쉰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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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베스트 샬롬 교회 박호종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4대강 살리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합니다.
적극 추천 드립니다.
샬롬!
*지난 7월 6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주최로 '4대강 살리기' 관련 사회포럼이 개최되었습니다. 아래는 당시 찬성측 발제자로 참여하신 박호종 목사님의 발제문입니다.
1.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은 앞(심명필 추진본부장 등 발제)에서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저의 발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정치적, 감정적 입장이 아닌, 신앙을 고백하고 성서를 삶의 중심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으로서 성서적, 신앙적, 선지적(예언적) 관점 및 태도에 중점을 두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발제를 하기에 앞서 저의 심경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제 보(洑)의 수문 설치가 거의 이루어졌고, 올해 말이면 공정의 60~70%를 마무리한다는 이 사업을 이제 와서 기독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발제를 하려니 뒷북치는 듯해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가 4대강 관련 발제를 준비한다고 하니, 주변의 어떤 분은 그걸 하느니 인부들 옆에서 삽질을 돕는 게 낫겠다는 뼈있는 농담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본인이 발제자로 나서게 된 것은, 국가적 대소사가 있을 때, 소수이지만 적극적으로 또는 극렬하게 자기주장을 펴는 그룹들 한편에, 이 주의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나 미온적이며 소극적인 다수, 즉 잘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있는 다수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대변하고 싶었고, 또한 늘 목소리 큰 소수들의 의견이 마치 전체 민심인양 둔갑되어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더욱이 이 사업을 주의 백성들이 성서적, 신앙적, 더 나아가 예언적 입장의 통찰과 객관성을 가지고 판단하게 하고자, 섬기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 성경적, 신앙적 관점을 살펴보기에 앞서 실제로 4대강 사업에 대한 찬반 양상이 어떠한지 먼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는 혹 소수의 적극적 때론 극렬한 반대 개진으로 인해 마치 대세가 그런 것 같은 분위기가 조장되고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해서 짚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전체 분위기를 고려하는 것은 정직한 신앙적 태도를 취하여 토론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입니다.
1)
4대강 유역의 단체장 당선자 - 78명 중 반대 18명
광역 자치 단체장- 조사대상자 14명 중 찬성 7/반대 6/유보 1
기초 자치 단체장- 조사대상자 64명 중 찬성 44/반대 12/
조건부찬성8 (자료출처: 조인스닷컴, 연합뉴스 )
위 통계는 다분히 지난 6월 선거 결과의 흐름과 비슷하며, 선거 결과의 지방색이 가지는 특성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입장에 정치적 성향이 강하게 반영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초 자치단체로 내려갈수록 찬성률이 높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지역적 실리와 현실성에 대한 민심이 반영된 것이라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최근 7월 5일자 지역회보「양평 백운 신문」에 ‘충청권 광역단체장 당선자들이 4대강 사업의 전면재검토를 주장하는 가운데, 양평군 등 한강수계 기초단체장들은 일제히 4대강 원안추진을 밝히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저는 이런 지역 신문 기사가 현지의 지역민 다수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종교계 - 4대강 사업에 대한 종교계의 입장이 두드러져 보이는 곳은 진보세력 주축의 천주교계와 불교계이며 일부 기독인들이 합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중 불교계의 경우, 그 입장이나 표출이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은 현 정권이 불교를 탄압한다는 종교 편향에 대한 비난과 오해를 이 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로써 종교적 압력 및 능력시위, 세 과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기독교 - 우리나라의 기독교 최대 연합 조직(66개 교단과 19개 단체)인 한기총(CCK) 및 한기총 원로 증경 회장단(길 자연 목사님) 등 기도하는 많은 순수한 단체들의 입장은 중립 혹은 찬성 쪽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본론:
위와 같은 상황과 분위기를 전제로 하여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성경적, 신앙적, 예언적(선지자적) 입장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1. 성경으로 보는 4대강 살리기 사업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원천적인 편견 중 하나는 개발을 파괴로 보는 견해입니다. 특히 환경 단체 등 친환경주의자들이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에 손을 대면 자연을 파괴한다고 쉽게 규정짓는데, 과연 자연에 손을 대면 모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반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이러한 개발에 대한 편견이 자리 잡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어디에서 이 개발에 대한 쓴 뿌리가 생긴 것인가 하며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살펴보니, 과거 서구 초기 기독교가 성경을 그릇 해석한 오류에서 이러한 마구잡이식 정복 행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 정복 시대, 그 정복의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 1장 26~28절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28절에 나타나있는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지배에 대한 든든한 명분이 되었고 이는 땅뿐만 아니라 나아가 토착 인디언들이나 유색인종들까지도 정복, 지배의 대상으로 삼게 했고, 그리하여 심지어 멸족된 부족까지 생기게 했습니다.
이런 일 이후, 이에 대한 반성과 반동으로 서구에서 환경보호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자연 동정적인 친자연주의 경향이 점차 뉴에이지 운동에 편승되거나 자연을 의인화 또는 신격화하는 범신주의나 샤먼, 정령숭배로 무분별하게 굴절되었고, 동시에 기독교를 공격하는 분위기로까지 증폭되었습니다. 근간에 대박을 낸 《아바타》와 같은 영화는 사실상 범신주의 내지 힌두사상이 반영된 영화로서 이런 추세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역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찾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중심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성경의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대한 답을 과거 무분별한 정복의 근거가 되었던 창세기 1:26~28절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 28절 중, “다스리라”는 구절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다’이며, ‘다스리다’, ‘치리하다’, ‘경영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창 2:15,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 히브리어로 “아바드”이며 이는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의 자연을 정복하되 결국은 다스림으로 생명체들을 보존하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되, 다른 모든 생물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과거 ‘정복과 파괴’ 신학의 오류가 되레 자연을 숭배하는 경향을 대거 일으킨 것과 달리 이 ‘다스림’의 신학은 자연을 잘 다스리고 치리하라는 선한 경영에 대해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자연은 더욱 풍성해지고 갑절의 소산을 맺고 풍성해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창세기 1장 28절의 정복과 다스림에 대한 말씀이 이번 4대강 살리기 개발에 있어서 핵심적인 진리를 제공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창세기 6장의 언약 역시 노아로 통해 구원을 받고 다스림을 받은 구절과 로마서 1장 24~25절 및 8장 19절 이하에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된 인간을 기다린다는 말씀도 다스림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 믿습니다.
4대강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탁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만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과 치리, 곧 경영입니다. 이 피조물을 잘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자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다스림의 결과는 열매이고 풍성함입니다.
1) 자연을 다스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의 원시림과 같은 울창한 숲에서 발생하는 산불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들 국가는 거의 원시림 가까운 울창한 숲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숲에서 원인모를 산불이 발생하곤 하여 그 원인을 살펴본즉, 돌봄이 없는 원시림에서 일어난 자연적 마찰에 의한 산불로 밝혀진 것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돌볼 때 더욱 보존될 수 있습니다.
2) 혹시 시골에서 자란 분들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 고향에 가보십니까?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친숙하고 자연환경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10~20년 흘러 고향을 가보았더니, 내가 벌거벗고 수영하던 하천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손 하나 대지 않고 방치하니 결국 자연 도태되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가꾸고 경영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저는 이번 발제를 준비하던 중, 『강은 살아있다』라는 책 32쪽과 33쪽을 보면서 고개가 가로저어졌습니다. 60~70년대 사진과 오늘날의 사진, 2,30년~3,40년의 간격을 둔 사진들을 대조시켜 놓고서는 ‘한강에서 벌거벗고 목욕하던 시절을 이렇게 망쳐놓았다’라는 식으로 전개한 상식 이하의 자료를 보고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확신하건대 만약 그대로 방치했다면, 지금 한강은 개천정도로 졸졸 흐르거나 아예 사라졌을 것입니다.
3) 저는 4대강 지역의 정비 및 보(洑) 설치 작업현장을 직접 가서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스림이지 강을 헤집어 파괴하려는 것이 아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사람에 의해 아름답게 만져지고 경영되어질 때 풍성해집니다. 인간이 자연을 사랑함으로 경영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제가 4대강 대부분의 보에 방문하면서 썩어 냄새가 나는 곳, 다 침식되어 강의 형체가 소멸되어 가는 곳도 모두 직접 보았습니다. 제 고향의 하천은 벌써 거의 말라버렸습니다.
2. 신앙적 관점에서의 4대강 살리기 사업
사실상 5대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4대강 사업으로 명명된 것은 4대강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강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지 혹 크리스천 대통령에 의해 성경 상에서 따온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어쨌든 공교롭게도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생명의 발원지로 4대강이 언급되어있는데, 본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이 사업이 진정 이 민족을 살리는 4대강 사업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개발 사업 현장의 강 유역(한강 일부)에 사는 농민들을 대변한다는 목회자들의 태도에서 신앙적이지도 성서적이지 못한 반(反)신앙인적인 태도를 보는 것은 유감입니다. 지금 강유역의 농민들이 사용하는 땅은 농민들의 땅임과 동시에 모든 국민의 땅이고 국가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땅은 지역에 따라 범람과 홍수의 상습 피해 지역이 되곤 해서 나라가 지역민들에게 보상을 해왔던 땅입니다. 이러한 땅을 국가가 국민 전체를 위해, 그 지역 전체주민들을 위해 공유한다고 합니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나누자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신앙인으로 취해야할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을 반정부 반정권운동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1) 기도하는 자세(딤전 2:1~4)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적인 대소사를 논할 때, 우선 윗 권위를 축복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나가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건강한 신앙인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윗 권위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는 훼방의 말과 좌파와 다름없는 선동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고, 더군다나 농민들을 대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농민들을 이용해 본인들의 주장을 대변케 하는 자세는 신앙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주의 계명을 지키고 또 가르칠 수 있을까요? 성경의 어떤 의인이, 어떤 순교자가 악독을 배설하고 죽었습니까! 제가 목회하는 지역에서도 화해 단지 철수 및 보상 문제로 복잡한 상황 가운데 우리 교우 중 몇 가정이 이 문제에 엮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저는 무척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때까지 축복주신 것 감사하고 길을 찾자고 조언하며 함께 기도했고 현재 우리 교우는 적절한 보상에 만족하며 감사함으로 이주를 했고 현재 잘 정착된 상태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며 행동이지만, 우리는 늘 신앙적 입장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신도들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신앙의 편에 서기 위해 애쓰는데, 특히 목회자들이 정부를 ‘살인마’로, 공권을 ‘적’으로 규정하여 분위기를 선동하는 것은 해결방법으로 좋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반신앙적인 자세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섬뜩한 용어의 돌출은 좌파로 오인 받는 요인도 되므로 참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2) 선교적 관점(마 28:18~20)
마 28:18~20에는 주께서 믿는 자에게 명하신 위대한 계명과 사명이 나와 있습니다.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4대강 사업은 대단한 선교적 가치를 가집니다. 저는 선교회 출신으로 그간 많은 선교지를 가보았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재앙으로 여기는 두 가지 큰 자연재해가 있는데, 엄청난 가뭄/흉년과 홍수가 그것입니다. 물관리가 나라의 사활적 과제인 이들 선교지들에게 있어서 작금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향후 많은 생명과 나라를 살리는 일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선교지 국가들에서 우리나라의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교지의 간절하고 현실적 필요와 목마른 요구에 대해 우리는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선교적인 관점에서도 이 사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3) 정직
계 21:8에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둘째 사망이라.” 4대강 개발현장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추측과 억지, 또는 거짓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4대강의 물이 흐르지 않고 막힐 것이라는 말도 진실이 아닙니다. 보들의 문이 열리고 닫히므로 홍수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물의 계속적인 흐름을 조정해 줄 것입니다. 또, 곳곳에 어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물고기들이 오르내리며 산란할 수 있는 대비도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과 준비 없는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공사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거짓이며 이런 거짓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진실된 신앙적 자세가 아닙니다. 기독교계는 중립적이고 정직한 태도와 입장에서 관찰자와 견제자로서 이 사업이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받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4대강 16개보를 거의 모두 다니며 관찰하고 지역을 살피고 소문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어느 지역에선 공사 중 몇십 마리의 물고기가 죽은 것을 마치 수백 수천 마리가 떼죽음 당한 것으로 날조 비방한다는 말을 지역주민이 전하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우리 기독교계는 정직한 견제자이며 조언자로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의 선지적 역할
계 8:10~11에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 날에 강들의 3분의 1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간 이 성경구절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으로밖에 보질 못했으나, 이번 4대강 사업을 바라보며 이 구절이 선지적으로 해석되어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지금은 시대적으로 혼란스럽고 분열되고 어지러운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때, 즉 말세라고들 말합니다. 이때에 4대강 개발은 계시록에 말씀 안에 있는 마지막 때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강들에서, 특히 대표적으로 인도의 갠지스 강과 같은 강은 엄청난 영적인 간음이 행해지는 강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온갖 병균과 미신, 정령술이 가득한 이 강이 혹 계시록 8장의 말씀에서처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진노의 근원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 개발이란 교회가 선지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영적인 의미도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한,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다.”(시 74:13~14)는 시편 말씀은 이러한 강 개발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본다면,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수천 년간 강 아래서 이 땅을 묶고 있던 옛것이 끊어지고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는 의미를 부여해주는 예언적인 사업인 것입니다.
교회가 시대적인 선지자로 외쳐야 할 소리는 정의와 공의뿐 아니라 시대적인 영적, 선지적 해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업에 대해 선지적, 예언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마치는 말
이상 부족하나마 성서적, 신앙적, 선지적 관점에서 4대강 사업의 의의에 대해 피력해보았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의 젖줄인 4대강을 보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다 효율적으로 가꾸고 관리하자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격 착공에 들어간 지금, 정부와 관련 전문가들 그리고 국민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것들을 내와야 할 것입니다. 사업자체를 저지시키기 위한 시도나 반대를 위한 반대 그리고 오늘과 같은 찬반논쟁은 이제 그만 멈추고,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건설적인 지혜와 비판이 풍부하게 논의되길 바랍니다. 이 과정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참여로 진정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4대강 사업에 찬성하는 대다수 기독교단들 및 단체들이나 보수적 정치 단체들과 어르신들의 의견은 진부하고 답답한 사람들의 고집이라고 폄하하는 반면, 소수의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젊은 외침만이 참 선지자적이라는 한편의 논리입니다. 찬반 대립을 자칫 세대의 대결로 호도할 수 있는 이 같은 발상은 반기독교적인 태도이므로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반대편에 서야 젊은 의식이고 의식 있는 사람인 듯 세대를 가르는 것은 말라기 4장에서 경고한 것처럼 주님의 책망을 받을 만한 죄입니다.
평양부흥 100주년을 지나, 우리는 이 땅의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이 민족과 열방의 부흥을 가져오는 또 하나의 발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속에 깊이 형성되어 있는 세대간의 불신이 불식되고, 이 나라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는’ 세대간 연합의 기름 부으심이 온전히 부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기름부음이 편만할 때,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앞당겨질 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4대강 살리기' 사회포럼(7/6): 박호종 목사님 발제문
글쓴이 : 관리… 날짜 : 10-07-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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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개신교적인 논리인것 같네요..
목사가 하느님 얘기로서 논리를 펴면 신자들은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개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 필요성이 없는 곳을 개발하면서 나라의1000년 대계를 망치고..
후손들에게 물 부족국가를 만들어 주는게 문제란거죠..
지금은 북한의 땅굴을 파헤치고 우리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깨닫지못하는 무능한 지도자를 둔 우리의 현실이 암담하기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겁니다.
하느님 팔아서 먹고살려면 성경 공부 제대로하시고..
평양 부흥이라는 말로 혼자 신앙인척하지맙시다.
목사가 지금 평양에서 뭐라고
얘기 히고있는지 알잖습니까?
평양에 진정한 교회가 있나요??
알고나 얘기합시다..
ㅉㅉㅉㅉ
"성결이란 금식이나 육체적 엄격성, 또는 외적인 개발을 위한 수단들이 아니라 니 모든 것이 포함된 내적인 성품, 즉 하나님의 형상(겸손, 온유, 청결, 믿음, 소망, 사랑등 포괄적인 습성)을 닮은 영혼의 거듭남을 뜻한다." -존 웨슬리-
당연히 개발해야합니다. 우리나라의 하천? 진정한 의미의 하천이 아닌지 오래되었습니다. 도로 항만 철도 공단 댐등..국가산업발전위해 많은 분야를 개발하는 가운데 오직 하천은 그 와중에 쓰레기장또는 하수처리장처럼 가꾸지 못했습니다. 여름한철 비지나가면 군데 군데 강바닥에 물고여서 썩는 곳이 우리나라 하천입니다. 물이 없는데 무슨 고기가 살며 새가 날아오며 환경이 살아납니까? 4대강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하천을 정비해야하며 향후 부족할것이 예상되는 용수(식수포함)확보도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의 수자원분야 기술은 세계적입니다. 수중보로 물이 썩는다는 것은 옛기술입니다. 놀라운 공법 많습니다.
끌어다 어거지로 붙이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