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축하! 감사합니다.
오늘은 2015년3월 월례회이면서
동시에 내가 생일잔치의 주인공이 된 날입니다.
김헌무동문, 이형진동문과 함께...
월례회에서 모처럼 만난 63명 동문 모두가 우리들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생일잔치를 베풀어 준 동창회장 홍주보 둥문과 39회 동문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나로서는 큰 영광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오늘이 내 생일인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말하자면 주민등록증에 동록된 1939년3월18일이 내 ‘생일’이 된
것입니다. 나는 평생 이 날을 기준으로 학교에 입학했고 육군간부 후보생이
되었고 대학교수에도 임명되고 또 정년을 맞아 퇴임되었습니다. 또 비행기를
탈 때도,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갈 때도 이 날자를 가지고 갑니다
따지고 보면 이 날은 경북 경산군 와촌면 시골마을에서 5일장이 서는 날입니다.
우리 ‘아부지’께서는 이 날 ‘하양’장에 가시면서 중간에 와촌면 사무소에
둘러 나의 출생신고를 한 날이지 실제로 내가 태어난 것은 음력으로
1938년 무인생이며 생시는 음력 10월17일 새벽녘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일을 아는 것은 우리 가족밖에 없고 거저 가족들끼리만 ‘진짜’ 생일을 치
뤘을 뿐, 가족밖에서는 3월18일을 내 생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의 전통적 사회구조입니다. 이런 사회구조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세대의 진면모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39동문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와촌촌사람’인 나는 정말이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당시 전국에서 난다 긴가
하는 인재들이 다 모인 경맥 39회 동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내 어린시절을
돌이켜보면 나같은 우직한 ‘촌놈’도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 공부 참 잘
한다”라는 벽촌시골 와촌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를 곧이곧대로
믿고 일생을 착각속에 살아온 게으르고 안이하고 무식한 사람이지요. “공부
잘 한다”는 한 마디에 정말 “공부 잘 하고 머리 좋은 놈”으로 착각하고 있으
면서도 그것을 마치 진실인양 믿고 운 좋게 살아온 ‘행운아’인 샘이지요.
1959년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때는 교수말씀 잘 듣고 시험 잘 보고 학점 좋게
따서 사회학 교수 되는게 착각속에 산 나의 꿈이었다고 할까? 다행히, 하늘이
보우하사, 여러 교수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사회학과 조교(무급)가 되고
또 유급조교를 했고 그리고 육사 교관 - 국방대학교 교수 - 충북대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4년8월, 40여년간의 교수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을 했습니다만 돌이켜보면 한 것도, 남긴 것도, 가르킨 것도 없이
허송세월을 보낸 한심하고 무심한 사람입니다. 사회과학도로서 개인적
성찰능력은 커녕 확률적 이론에 사로 잡혀 일생을 제도制度의
수인囚人으로 살았으니 말입니다.
kb39 멤바들은 나를 친구로서, 대학교수로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해
줬습니다만 솔직히 교수생활 40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렇게 허전하
고 허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년퇴임식에서 나는 울부짖었지요. 나는 지금
까지 40년간을 대학교라는 제도권에 목이 메달려 노예생활에 시달려왔지만
오늘 교수라는 타이틀의 온갖 구속과 압박을 벗어버리고 내일부터는 “나를
찾아” 떠나는 유쾌하고 즐겨운 여행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리라고.... 그리고
맹세했지요.
그러나 나를 대하는 현실은 너무나 허망하고 허전하고 실망스러웠으며
‘방콕대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선 것이 해외
골프여행이였지요. 정년퇴임 다음 해인 2005년의 경우 무려 4개월간을
해외(주로 태국의 골프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을
달래지는 못 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해결책도 아니었고요.
kb39 여러 동문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나는 동문 여러분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전임 이영식회장은 나
를 ‘부화장‘으로 출세시켜 줬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들이지요. 동문들 중에는
특별히 나에게 격려와 충고를 해 준 고마운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할
일을 잃어버리고 방황할 때 내에게 내가 할 일을 친히 알려준 사람이 바로
여기 동문들입니다. 이름 밝히기는 죄송하지만 당시 사이버 회장 서성영 동
문, 이연 동문, 박래진 동문, 김재덕 동문, 이용수동문...이 나에게 홈페이지
동참을 강요하였고 사진취미, 웹 프로그램에 눈을 뜨게 충격파를 던져
줬습니다.
“교수가 그것도 모르냐”라는 눈치(?)였지만 나에게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일들’
을 가르쳐준 동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따라
배워보려고 애썼지만 친구들의 가르침이란 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내가 직접 파고 들기로 작정하고 서점을 찾아 헤메다가 “HTML 웹디
자인”이란 학습서를 발견하고 그 때부터 책에 메달렸습니다. 나는 곧장
Hyper Text Markup Language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
습니다.(초보의 초보에 속하는 수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긋지긋했던
책보기와 글쓰기를 스스로가 다시 찾아 빠져들게 된 것이지요.
나는 열심히 여러 서적들을 편력했고 내 나름대로 나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웹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컴 앞에서 밤을 샌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몸도 망치고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지만
나는 지금도 컴작업을 할 때면 세상만사를 잊게 되는 ‘무아’의 경지에 들곤
합니다. 나의 훌륭한 안식처가 되기도 하지요. 제 아들은 아직도 “아빠!
아빠가 그런걸 해서 뭘 해?”라고 핀잔을 주지요.
오늘은 내가 정년퇴임한지 10년7개월이 지나는 날입니다. 만10년이란 긴긴
세월속에서도 나는 아직도 ‘나’를 찾지도 못했고 자유보다는 속박이 나를 짓
누르고 있으며 여행보다는 또 다른 조직에 얽메여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
세입니다. 성현들은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가르쳤습니다만 나에게는
生卽苦만이 절실한 것은 아닌지? 그래도 39동문들과 함께라면 나의
남은 날들도 한없이 행복하리라 확신합니다.
생일축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5.3.25.
kb39재경 3월례회에서
나의 생일축하에 답하여
동강 도흥열 합장
첫댓글생일축하를 한 월례회에는 못 갔지만 東江의 진솔, 겸허하며 담백한 글을 읽고보니 평소의 都 명예교수님이 더 크게 보입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아마도 그런 인품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모두 東江을 더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신고된 생일이라지만 이왕 굳은 생일,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도교수, 진짜 생일에 축하드릴게요. 그간 배우고 가르치고 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게 결국은 60년만에 오늘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고 그 가운데 작은 부분이지만 최선을 다한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봅니다. 결코 세습의 수인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노후는 평소 일하느라고 잊고 살았던 자신을 돌보며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먹고싶은것도 먹고 가고 싶은 곳도 가보며 살라고 주신 시간들입니다. 주변과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는게 화백의 자유스러움이고 행복이기도 합니다. 늘 즐겁게 사세요
정암님! 석포님! 효천님! 고맙습니다. 사실인즉, 그날 생일잔치때 각자 한마디 해야 하는 순서때문에 나도 카메라를 쥔채 뭔가 한마디 했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아리송해서 희미한 기억이나마 더듬어 재구성해 보았습니다만 복많게도 이렇게 좋게 봐주시고 또 축하해 주셔서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小周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溪山님! 모처럼 방문에도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溪山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지소조라니요 농담이라니요. 당치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난과 같은 향기가 풍기는 하나된 마음, 同心之言 其臭如蘭 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79년도 국방대학원에 입교하여 도흥열 교수님의 훌륭한 사회학 강의를 들었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생각해 보니 그때 함께 강의를 들었던 우리 39동문으로 해병대 권혁연 동문(예,대령) 그리고 육군의 이삼석동문(예,대령)이 있었고 또 혈기 왕성했던 그시절이 새삼 그립군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늦었지만 선생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첫댓글 생일축하를 한 월례회에는 못 갔지만 東江의 진솔, 겸허하며 담백한 글을 읽고보니 평소의 都 명예교수님이 더 크게 보입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아마도 그런 인품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모두 東江을 더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신고된 생일이라지만 이왕 굳은 생일,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도교수, 진짜 생일에 축하드릴게요. 그간 배우고 가르치고 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게 결국은 60년만에 오늘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고 그 가운데 작은 부분이지만 최선을 다한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봅니다. 결코 세습의 수인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노후는 평소 일하느라고 잊고 살았던 자신을 돌보며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먹고싶은것도 먹고 가고 싶은 곳도 가보며 살라고 주신 시간들입니다. 주변과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는게 화백의 자유스러움이고 행복이기도 합니다. 늘 즐겁게 사세요
생일의 自評이 巨 한 것을 읽으니 또 다른 도약을 꿈꾸는 것 같아 좋소이다. 생일 잔치에 초대가 없어 참석을 못 하였구려.
늦은 축하를 받아 주시요. 감사 합니다.
정암님! 석포님! 효천님! 고맙습니다. 사실인즉, 그날 생일잔치때 각자 한마디 해야 하는 순서때문에 나도 카메라를 쥔채 뭔가 한마디 했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아리송해서 희미한 기억이나마 더듬어 재구성해 보았습니다만 복많게도 이렇게 좋게 봐주시고 또 축하해 주셔서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동강의 글을 대하니 거울 앞에 서있는 것 같으이! 白髮은 면류관이고 세월은 축복이라 하지않는가 너무 진솔한 감사말씀이네. 늦었지만 축하 드리네. 중학교 가교사 시절 책샹 훌썩훌쩍 넘던 날쌘돌이 도흥열이 모습이 생각난다. 해피 바스데이!!! (사진: 滄波, 사이판에서... 동강 작품)
금송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중학교때의 나의 모습을 기억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나 스스로도 내가 그때 무슨 짓을 했는지 구체적 사례가 떠오르지 않거든요. 거저 촌닭 성내 갖다놓은 몰골이였으려니 정도로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금송! 참 머리 좋습니다요.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더 축하 축하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내내 건강하소서.
계절이 바뀌니 춘곤인가,만사가 귀찮아 39홈페이지에도 한참 못들어갔더니 동강의 생일 이야기가 실렸네요. 게다가
내가 회장이 되면서 동강을 부회장으로 추대,큰 출세나 시킨것처럼 써놓아 비록 농담이지만 罔知所措,할말이 없네요.
생일에 얽힌 얘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축하합니다.
小周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溪山님! 모처럼 방문에도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溪山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지소조라니요 농담이라니요. 당치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난과 같은 향기가 풍기는 하나된 마음, 同心之言 其臭如蘭 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79년도 국방대학원에 입교하여 도흥열 교수님의 훌륭한 사회학 강의를 들었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생각해 보니 그때 함께 강의를 들었던 우리 39동문으로 해병대 권혁연 동문(예,대령) 그리고 육군의 이삼석동문(예,대령)이 있었고 또 혈기 왕성했던 그시절이 새삼 그립군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늦었지만 선생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崙菴님! 축하 감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6년의 세월이 흘러간 '수색 골'의 일까지 기억하고 계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큰 영광입니다 그려. 국대원을 거처간 동문으로는 문창선동문을 비롯 이삼석 권혁연 동문, 그리고 이기수 라영호 양상태 동문들이 생생합니다. 권혁연 동문은 그후에도 청주에서 예비군 대대장하면서 나하고 다시 만나 2-3년을 더 보냈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