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회의 원동력, 하느님의 영
2사무 5,1-7.10; 마르 3,22-30 / 연중 제3주간 월요일; 2024.1.22.;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이었던 사울과 그 아들 요나탄이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고 나서 백성의 민심이 다윗에게로 쏠리자 백성의 원로들이 다윗을 임금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2사무 5,1-2).
이렇게 하여 다윗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렸고 나라도 융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하느님의 눈 밖에 나자 사무엘 예언자가 다음 왕위에 적합한 재목을 찾아 이사이의 막내 아들이었던 어린 다윗에게 처음으로 기름을 부은 후, 장성하여 민심의 지지를 받게 된 다윗에게 두 번째로 기름을 부은 것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을 붓는 예식을 하는 뜻은 하느님의 영을 받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사울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었던 첫 기름부음 예식이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부합한 일이었음은 백성의 원로들이 자발적으로 기름을 부은 오늘 독서의 상황이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반역 혐의를 무릅쓰고 사무엘이 예언자로서 단독으로 거행했던 혁명적인 첫 예식이 백성의 원로들이 민심의 지지를 대변한 민주적인 예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다윗을 성왕으로 추앙하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도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2사무 7,12.16).
과연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며 악령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율법 지식으로만 무장한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이러한 영적인 진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분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고 있으며”(마르 3,22) 아예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 3,30)고 중상모략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어조로 단죄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
이를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도리에 어긋난 자가 도리어 스스로 성내고 업수이 여긴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사탄이 백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창조 이전의 어둠을 연상시키는 혼돈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공생활을 시작하기 앞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정체와 사탄이 지배하는 영적인 어둠의 현실을 알고 계셨기에 하느님의 영으로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바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을 부르셨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으며,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와 손이 오그라든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 모든 활동이 그 일환이었습니다.
만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의심이 들었다면, 먼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다는 터무니 없는 모략 대신 그분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는 공개적인 소문을 내기 전에 자기 자신들이 왜 예수님께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를 뒤돌아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시기심을 발견하고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마귀 들려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 온 장본인들임을 인정하고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대해서도 자신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풀기 위해서 엉뚱하게도 예수님께 중상모략으로 화풀이를 해 댔던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하느님께 구원되어 성숙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는 감정과 판단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이 그 무엇이든 받아들이고나서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생기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생기 있는 영혼을 간직한 이들이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공동체도 살아나게 할 것은 물론입니다. 이것이 평화스런 세상의 기초입니다.
사회는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은 그 몸과 마음을 영혼이 움직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과 생명력을 주고 받는 통로이기에 인간과 사회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영이 그 흥망성쇠를 좌우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으면 인간은 생기를 얻어 행복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영이 지배하게 되어 불행해집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인간이 다스리는 사회는 공동선이 증진되어 번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구조악이 만연되어 망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물론 인류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하느님 자비의 큰 수확을 거두게 할 수 있는 복음화 제3천년기의 과업으로 아시아 복음화를 상정하고, 전체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혼을 이끌어 주실 하느님의 영을 다음과 같은 열 가지 공동선 과제로 식별한 바 있는데, 그 주제가 ‘아시아에서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한 인간 발전 봉사’입니다(사도적 권고, ‘아시아 교회’, 제6장, 32-41항).
- 첫째는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하느님 나라의 보편적인 가치들, 즉 평화와 정의 그리고 연대성과 자유에 바탕을 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하여 현대 가톨릭교회가 지난 백년 동안 검증한 진리의 이정표입니다.
- 둘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으로서, 사회교리의 대전제입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특히 현대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입니다”(사목헌장, 1항).
- 셋째는 아시아 대륙에서 늘어나고 있는 새로운 가난한 이들 즉 피난민들, 망명자들, 이주자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들은 아는 이들이 없고 언어도 낯설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고립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이 인간적 존엄성과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지지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 넷째는 아시아 대륙에 여전히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은 원주민들 가운데에서도 낮은 사회 계층에 속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사회 참여를 돕고 교육과 의료 복지에서 공동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다섯째는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죽음의 문화’에 맞서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연약한 생명을 보호함으로써 진정한 인간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 여섯째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보건 사도직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멸시받고 버림받은 이들, 특히 마약과 에이즈의 희생자들을 위해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 일곱째는 가톨릭계 학교에서 소수 민족들과 시골의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일입니다. 이로써 신앙을 토착화하고 아시아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존중을 가르치며 종교 상호 간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 여덟째는 평화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 분쟁과 갈등 상황 속에서 교회는 평화와 정의 그리고 화해를 이룩하려는 국제적인 노력과 종교 상호 간의 노력에 깊이 투신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 아홉째는 소외 없는 세계화를 이룩하는 일입니다. 종전의 세계화 추세는 가난한 이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으며 서구 선진국들에서 만연되고 있는 세속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소비 문화를 조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의 민족들과 사회를 지탱해 왔던 전통적 가정과 사회적 가치들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이 소외되지 않고 전통적 가치들이 보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열째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환경 보호의 사도직은 모든 사람에게 환경을 돌보아야 할 윤리적 의무를 상기시키는 일이며, 우리 세대의 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선도 위하는 일입니다.
이상 열 가지 공동선 항목은 아시아인들에게 이루어져야 할 현대판 치유와 구마의 사도직 활동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하느님의 영을 받아 선정을 베풀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에서는 독서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어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성령을 모독한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을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죄’(마르 3,29)를 저지르지 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아시아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를 실현하여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길 역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위에 언급된 열 가지 공동선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시편 89편, 화답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