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철학 이야기
노벨상을 거절하다-사르트르 (1)
아무리 욕심이 없다 한들, 현재 지구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예롭고도 큰 상, 노벨상을 거절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이를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유산 약 3150만 크로네(현재 한화 가치로 약 2,373억 원)를 스웨덴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 재단이 설립되었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비용으로 1901년부터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경제학, 문학, 평화의 6개 부문에서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노벨상을 수여하고 있다.(2018년 기준 노벨재단의 기금은 한화 약 6,368억원으로 증가)
상은 금메달, 상장, 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조금씩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에는 해당 부문의 상금을 나누어 지급한다. 한국인 수상자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한데, 그는 2000년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어떻든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바로 그 상을 거절한 철학자가 있었다니. 그는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1905년~1980년. 실존주의의 대표자)이다. 사르트르는 철학과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정치, 사회 활동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가장 왕성한 지성의 힘을 발휘한, 불세출(不世出)의 거장이었다. 특히 1964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을 거부한 것은 오히려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 사건(?)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1964년에 사르트르는 자서전적 소설『말』을 썼고, 이로 인하여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최상의 명예와 5만 달러(2011년 기준약 145만 달러 =약 19억 원)의 상금을 거부하였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 치우침으로써, 그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자신의 라이벌인 카뮈보다 늦게 선정된 데 불만을 품고, 수상을 거부하였다는 설도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카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이방인』과 『페스트』가 있다.
참고로, 지금까지 노벨상을 거부한 수상자는 모두 6명이었다. 1938년 독일의 쿤(화학상), 1939년 독일의 부테난트(화학상), 1939년 독일의 도마크(생리학 의학상), 1958년 소련의 파스테르나크(문학상), 1964년 프랑스의 사르트르(문학상), 그리고 1973년 베트남의 레둑토(평화상).
이 가운데 3명의 독일인은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상장과 메달을 받았다. 반면, 소련 정부의 방해로 죽을 때까지 상을 받지 못한 파스테르나크는 1989년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을 수령했다. 이들과 달리, 사르트르는 자의(自意)로 노벨상을 거절한 케이스이다.
1973년 베트남 평화협상에 대한 공로로 키신저와 함께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레둑토는 자신의 모국(베트남)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노벨상 수상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도 있다. 미국의 리처드 파인만(1965년 노벨 물리학상)은 새벽에 수상 소식을 듣고(시차 때문), "왜 자는 사람을 깨우냐?"면서 화를 냈다. 그리고 한 기자에게 “노벨상을 받지 않고 싶은데, 어찌 하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그러면 그걸로 더 유명해질 겁니다."라는 답변을 듣고 마지못해 받았다고 한다.
2002년 10월의 어느날 오후, 일본 다나카 고이치(화학상)는 외국에서 회사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상 이름이 노벨이라고? 설마 그 유명한 노벨상은 아닐 테고...’라 생각했고, 심지어 동료들의 ‘몰래 카메라’가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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