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 13,27)’ ‘자는 동안 원수가 와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 원수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 곧 욕망, 열등감과 상처, 후회나 미련, 분노와 원망, 게으름과 거짓, 시기와 질투,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통해 쓸모없는 가라지 씨앗을 뿌리고 자라게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원수인 악마가 우리 안에 악을 일으키게 하는 먹이(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밭에서 자라나는 가라지의 문제는 밀과 구별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곧 선과 악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더 더욱 큰 문제는 생육환경이 같은 곳에서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밀마저도 뽑힐 수 있게 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무엇이 선이고 하느님의 뜻인지도 알고 있지만, 워낙 가라지가 밀과 긴밀히 붙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합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는 한 개인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고, 공동체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요? 자는 동안! 매일 말씀과 기도와 사랑 실천으로 새롭게 밭을 일구지 않으면, 곧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라도 악마는 악의 씨앗을 뿌려 놓고 갑니다. 타성에 젖어 있고, 진심과 진정성을 갖고 하느님과 자기 삶을 마주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찰(省察)은 깨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입니다. 악마에게 빌미를 주지 않고, 자기 안에서 선과 악, 하느님의 뜻과 악마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더 나아가 결과적으로는 건강하고 튼실한 밀알을 맺게 하는 작업이 바로 성찰입니다. 성찰은 말씀을 통한 기도로써 이루어지기에, 시작은 자신이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행하시는 것입니다. 성찰을 잘 한다는 것은 내 입장과 의견을 하느님 앞에서 논하고 합의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것이 다 지워지고 비워짐으로써 하느님의 뜻만이 남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거나 어떤 일을 마치고 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찰을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평가(評價)에 치우친 나머지 칭찬과 비난이 더 난무하는 가운데,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무의식적인, 타성에 젖은, 이기주의에 빠진 잠자는 신앙의 결과입니다. 악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분열과 불목을 일으키고, 협력 대신 편을 나누어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을 악마는 절대로 놓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분열과 반목은 하느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