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은 있음에 대한 부정
사르트르가 자신의 사유를 철학적으로 집대성한 저서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이다. 이 책은 말년까지 이어진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텍스트이다. ‘현상학적 존재론을 위한 시론’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르트르의 사상은 현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때 사르트르의 현상학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현상학보다는, 그것을 존재론적 층위로 확장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더 근접한 듯하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삶 혹은 존재의 기본적인 양태를 분석하고 있는데, 여기서 인간의 삶이나 존재는 전적으로 ‘의식’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다. 사르트르는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는 대상과 의식이 마주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현상학적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현상들이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삶의 과정에서 펼치는 근본적인 활동이며 몸도 그 일부라는 점에서 이 책이 존재론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존재론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존재와 무》는 과거의 철학이 인간의 존재, 즉 실제의 삶보다는 공허한 추상적 관념에만 머물러왔음을 비판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 책은 ‘무(néant)’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여기서 논의의 초점은 기존의 철학에서 다루어온 ‘무’의 개념을 비판하고 그것을 존재론적 층위로 확장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헤겔의 ‘무’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데, 이는 헤겔의 ‘무’ 개념이 전통적 견해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관념론적 형태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존재와 무》의 핵심적 개념인 ‘즉자존재’, ‘대자존재’, ‘대타존재’ 등은 헤겔의 철학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사르트르는 헤겔이 ‘무’와 ‘존재’를 매우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전락시키고 있음을 비난한다. 사르트르는 “존재란 존재하는 것이며, 무란 (비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l’être est, le nêant n’est pas).”라는 현실적으로 자명해 보이는 명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전통적인 철학에서의 ‘존재’, ‘무’와 같은 개념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위배하고 그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관념화하였다.
가령 헤겔의 논리학은 “순수한 존재(있음)란 순수한 없음(없음, 무)이다.”라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없음, 무)에 존재하는 것(있음, 존재)이라는 특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궤변일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순수한 있음이 순수한 없음과 동일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그저 순수하게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고 치자. 그 어떤 것에 대한 정보나 특성, 가령 크기, 색깔, 냄새 등의 어떠한 정보도 없이 그저 있다는 사실만을 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러한 있음은 우리에게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즉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에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매우 명확하다. 원래 무란 비존재인데 헤겔의 철학에서는 이러한 비존재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무’란 비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무란 무엇일까? 사르트르에 따르면 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무는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없다고 생각될 뿐이다.
이 주장은 얼핏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알고 보면 명쾌한 논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때 없다는 것은 ‘있음에 대한 부정(négation)’이다.
가령 지금 내 지갑에 만 원이 없고 삼천 원만 있다고 하자. 지갑에 있는 것은 삼천 원이다. 이때 만 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 만 원의 없음은 삼천 원이라는 현재의 있음에 대한 부정적 양상에 불과한 것이다. 없음, 즉 결핍은 우리가 있음의 상태를 어떤 다른 상태와 비교해볼 때 발생하는 가상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만 원이라는 가상적인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만 원이 없다는 생각, 즉 무의 상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무’란 그 자체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닌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부정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곧 세상의 존재는 원래 충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때 충만하다는 것은 풍요롭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단지 세계 자체가 풍요로움이나 결핍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뜻에 가깝다. 결핍은 어떠한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해서 부족함을 느낄 때, 즉 그 상황을 부정할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삼천 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는 삼천 원을 그보다 더 큰 돈과 비교할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는 애초에 어떠한 결핍이나 무도 없는 그저 그렇게 있는 존재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그저 원래부터 이렇게 있는 존재를 ‘즉자존재(être-en-soi)’라고 부른다. 원래 모든 존재는 즉자존재이다. 땅에 있는 흙이나 산의 나무, 내 앞의 컴퓨터 등 모든 것들은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이다. 설혹 내 앞의 컴퓨터가 고장 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 작동하는 컴퓨터가 필요한 나에게 결핍이자 무일 뿐, 그 컴퓨터 자체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 자체, 즉 세계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으며 존재 자체는 충만하다.
그런데 무 혹은 결핍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면 그러한 무를 만드는 존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존재는 논리상 스스로 충만한 존재, 즉 즉자존재이기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존재를 ‘대자존재(être-pour-soi)’라고 부른다. 대자존재란 간단히 말하면 의식존재, 즉 인간존재를 의미한다.
즉자존재와 달리 대자존재는 부정(무, 없음)의 계기를 자신의 속에 반드시 지니고 있다. 가령 인간은 지갑에 삼천 원이 들어 있을 경우 그것을 항상 다른 액수와 비교한다. 또한 자신의 외모를 충만한 상태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도 충만한 상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은 결코 돌, 나무, 심지어 말이나 낙타와 같은 즉자존재가 될 수 없으며 현상태를 부정하는 무의 계기를 자신 속에 지닐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부정’을 ‘자유(liberté)’의 개념과 연결 짓는다. 왜냐하면 부정이란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 없이 존재하는 나무, 돌, 강아지와 같은 즉자존재와 달리 대자존재인 인간은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려 할 경우 오히려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는 곧 대자존재가 근본적으로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상태에 안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의 상태가 불안하다는 것은 곧 다른 상태를 갈구함이며, 이는 달리 말하면 현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자유의 의미이다.
자유란 대자존재를 즉자존재와 구분 짓는 본질적 특성이다. 자유란 부정이기에 충만한 현재의 있음(존재)이 아닌 지금 없는 것을 향한다. 따라서 자유 또한 결핍이고 무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선고는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니라 비극임을 주장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유라는 비극적 선고는 대자존재인 인간에게 내려진 운명이며, 이러한 비극은 대자존재가 다른 대자존재와 마주칠 때 더욱 확실하게 나타난다. 대자존재인 인간은 다른 대자존재와의 마주침을 피할 수 없다. 현실에서 다른 인간과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인간은 이미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한다. 가령 대자존재인 인간은 즉자존재와 마주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심각한 정신착란이나 분열증 환자가 아닌 이상 길거리의 돌을 보거나 나무를 볼 때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대자존재인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는 익숙해지기 전까지 불안하다. 자신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 또한 그 사람의 시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원초적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러한 타인의 시선은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부의 시선이다. 가령 어린 사르트르가 어휘를 선택하거나 억양을 조절할 때 그것은 외할아버지에게 맞추기 위함이다. 외할아버지라는 다른 대자존재가 사르트르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할아버지의 시선은 사실상 사르트르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사르트르는 외할아버지에게 사랑을 갈구하였기에 스스로 할아버지의 시선으로 자신을 감시한 것이었다.
이는 사르트르만의 얘기가 아니다. 자유롭고자 욕망하는 대자존재인 인간의 내부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자유롭고자 갈망할수록 사랑받고자 갈망할수록 그는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글을 읽게 될 독자의 시선이 내 머릿속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눈초리는 나에게 지옥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즉자존재인 양 무시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눈초리가 지옥이지 않겠지만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다른 대자존재인 여성을 즉자존재처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관행을 박탈하고 그림 속의 여성 또한 나를 노려보는 대자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없음은 있음에 대한 부정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