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216)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4장 자객 형가(荊軻) (1)
한(韓)나라에 이어 조(趙)나라마저 멸망하여 진나라에 통합되자 천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고을이 한 나라인 성읍(城邑)국가가 이웃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종묘를 허문 경우는 보아왔으나,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뽐내며 중원에 위용을 떨치던 강대국이 한순간에 이렇듯 흔적없이 사라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아직 망하지 않은 위(魏)나라, 초(楚), 연(燕), 제(齊)나라 등은 기겁을 했다.
언제 자기네 나라도 종묘를 허물고 진왕(秦王)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였다.
이보다 더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실감나던 시기가 있었을까?
모두 숨죽이고 다음 차례가 자기네 나라가 아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즈음, 진나라 수도 함양성 왕궁 안에서 천하를 놀라게 한 대사건이 발생했다.
진왕 정(政)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미리 짚어보면, 이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나라 대 나라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리는 것은 대체로 군사력이었다.
그런데 전국 말기에 들어서면서 진(秦)나라의 군사적 우위가 보다 분명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힘 약한 일부 나라는 종전과는 다른 비상수단을 착안해냈다.
그것이 바로 진왕 정(政)에 대한 암살 시도였다.
암살(暗殺)은 대개 사사로운 이해관계 혹은 원한에 얽혀 이루어진다.
춘추시대에 공자 광(光)이 자객 전제(專諸)를 시켜 오왕 요(僚)를 암살한 것은 그가 왕위를 탈취코자 한 개인적인 욕심에서였다.
또한 전국시대에 들어 자객 예양(豫讓)이 조양자(趙襄子)를 암살하려 했던 것은 주군 지백(知伯)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과 의리에서였다.
그런데 이때 발생한 진왕 정(政)에 대한 암살 시도는 전혀 그러한 성격이 아니었다.
- 침략자 진왕 정만 없애면 멸망의 공포에서 벗어나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의거(義擧)의 성격이 짙은 발상이었다.
이 의거의 주인공은 자객 형가(荊軻).
그 뒤로 조연급의 배우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이 사건은 전국시대 말기의 성격을 대변하는 하나의 전형이므로 좀더 소상히 그 경위를 살펴보겠다.
앞서 이 의거의 주연배우를 형가(荊軻)라고 했지만 실은 그 이면에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 있었다.
다름아닌 연나라 세자 단(丹)이다.
그랬다.
이 사건은 대륙 동북방에 자리잡은 연(燕)나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먼저 세자 단(丹)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예감했겠지만 세자 단(丹)은 비운의 사내였다.
그는 말이 연(燕)나라 세자일뿐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내내 타국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다.
소년 시절은 조(趙)나라 한단에서 볼모로 지냈고, 성인이 되어서는 진(秦)나라 함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다.
한(恨)이 컸으리라.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어린 소년인 감나(甘羅)에게 탈출 방법을 물으려고까지 했을까?
그러나 운도 나빴다.
감나(甘羅)를 찾아가려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나는 결국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가?‘
함양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고달펐다.
그는 원래 함양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낙심하지는 않았다.
진왕 정(政)과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즉, 그가 조(趙)나라 한단에서 인질 생활을 할 때 진왕 정(政, 당시 조정)도 한단성에서 숨어지내고 있었다.
두 소년은 서로 같은 처지임을 알고 각별하게 지냈다.
그 조정(趙政)이 이제는 어엿한 진나라 왕이 되었다.
'반가이 대해주겠지.‘
이런 기대감에 세자 단(丹)은 함양성에 들어섰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진왕 정(政)은 세자 단(丹)을 냉대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차가운 눈길로 그를 대했다.
배신감이 일었다.
분노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는 초강대국의 왕(王)이었고, 자신은 약소국의 인질이 아닌가.
우울한 나날의 연속.
그러던 중에 한(韓)나라가 멸망하고 이어 조(趙)나라마저 멸망 직전에 놓이는 것을 보았다.
'조만간 연(燕)나라도 위험하다.‘
위기를 느끼고 밀서 한 통을 써서 비밀리에 아버지 연왕 희(喜)에게 보냈다.
장차 큰 불행이 연(燕)나라에게까지 미칠 것 같습니다.
부왕께서는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두십시오.
아울러 소자를 돌려달라고 청하십시오.
진(秦)나라에서 풀려나 연나라로 돌아가기만 하면 소자가 진나라의 약점을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연왕 희(喜)는 세자 단(丹)의 부탁대로 진나라로 사신을 보내 요청했다.
- 과인의 병이 몹시 깊습니다.
바라건대 세자 단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러나 진왕 정(政)의 대답은 매몰찼다.
-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에서 뿔이 돋아난다면 모를까, 그러기 전에는 돌려 보낼 수 없다.
이 말을 들은 세자 단(丹)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 까마귀들이여, 어찌하여 머리가 까만 것인가!
재미난 일화가 전해온다.
세자 단(丹)의 이 탄식을 듣고 그 다음날 까마귀들의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일 리 없다.
그 정도로 세자 단(丹)의 한숨이 하늘에 사무쳤다는 뜻이리라.
진왕 정(政)이 자신을 돌려보낼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자 단(丹)은 새로운 결심을 했다.
'탈출하자.'
얼굴에 숯을 칠했다.
옷도 바꿔 입었다.
숯 파는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나서 함양성을 빠져나갔다.
낮이면 숨고 밤이면 걸어 마침내 함곡관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정주 땅에 가면 문계대(聞鷄臺)라는 대가 있다.
연나라 세자 단(丹)이 진나라를 탈출하여 연나라로 돌아갈 때 여기서 첫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떠났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윽고 세자 단(丹)은 무사히 연나라 도읍 계성(薊城)에 당도했다.
계성은 현재의 북경(北京).
연나라 도읍이라 하여 현재도 연경(燕京)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조나라 장수 이목(李牧)이 회천산 아래서 대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연나라 세자 단(丹)은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왕 정(政)에게 복수하고야 말리라!'
그러나 군사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달리 취할 수단이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암살.'
이때부터 세자 단(丹)은 자객이 될 만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일을 <사기(史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연나라 세자 단(丹)은 일찍이 조나라의 인질로 있었는데, 진왕 정(政)이 조나라에서 태어나 사이가 좋았다.
정(政)이 즉위하여 진왕이 되자 세자 단(丹)은 진나라의 인질로 갔다.
진왕 정이 연나라 세자 단에 대해 대우가 좋지 못했으므로 세자 단(丹)은 이를 원망하여 도망쳐 돌아왔다.
연(燕)나라로 돌아와 보복할 방법을 생각했다.
얼핏 보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진왕 정(政)의 암살을 계획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만의 시각일 뿐 그 행간을 잘 살피면 연(燕)나라의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나 다름없는 자신에 대해 안면을 몰수했다는 것은 곧 진왕 정(政)의 마음속에 연(燕)나라를 집어삼킬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 세자 단(丹)이 모은 사람으로 장사 하부(夏扶)와 송의(宋意)가 있었고, 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도 있었다.
장안군 성교의 난 당시 둔류성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친 진나라 장수 번어기(樊於期)가 산속에서 숨어 살다가 세자 단(丹)의 문하로 들어온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 문객들 중 세자 단(丹)은 번어기를 가장 아꼈다.
언젠가는 그를 앞세워 진(秦)나라로 쳐들어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서였다.
역수(易水) 동쪽에 성 하나를 쌓아 번어기에게 내주었다.
그래서 연나라 사람들은 그 성을 번관(樊館)이라고 불렀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