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80만 대군을 혼자서 물리친 외교가 서 희 1.서희가 태어난곳 : "서희'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 "서필"이 광종의 큰 신임을 받던 고려 조정의 재상이었고 또 고려사 열전에 그 자택에 관련된 일화도 언급되므로 당연히 집이 개경(개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서희"역시 개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 에는 "서필"이 이천(利川)사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의 본관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의 아버지, 즉 "서희" 의 조부인 "서신일(徐神逸)"이 바로 이천서씨의 시조이기 때문입니다.) 2.서희가 태어난 때 : 기록에는 서희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지 않으나 고려사 세가에 [목종 1년(998) 가을 7월 14일(庚午),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 서희(徐熙)가 졸하였다] 고 했으며, 서희 열전에는 [목종 원년(998년) 돌아가시니 57세였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94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업적 : 서희의 업적은 홀로 거란의 군영에 들어가서 소손령과 담판하여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친 것을 꼽을수 있겠지요.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조 하세요.(출처 : http://www.koguryo.org/Frame.htm) ◆ 서희의 업적 서희의 업적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하 열전을 중심으로 세가나 고려사절요 등을 참조하여 서희의 업적을 정리해 본다. 1) 절도 있고 강직한 문관 서희의 어렸을 때 자(小字)는 염윤(廉允)이고 내의령 서필의 아들이다. 성격이 위엄이 있고 바르며, 삼가고 상대방을 공경하였다 광종23년(972년) 사명을 받들어 송나라에 갔다. 그 때 십 수년 동안 송나라에 조공하지 않았으나 도착한 서희의 몸가짐에 절도가 있는 것을 본 송나라 태조가 갸륵하게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벼슬을 내렸다. 서희가 초년에 벼슬한 것은 광종 때인데, 광종(949∼975)은 고려 역대 제왕 가운데서 가장 자주적인 정신을 가지고 왕권확립을 위하여 가장 활기차게 노력했던 영걸이었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광덕(光德)]과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쓰고 서울인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하였으며(광종 11년), 한 때 [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 등은 모두 그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왕권강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해에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선다. 고려는 송나라가 들어선 다음다음 해(962)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보낸 뒤 외교관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971년 남한(南漢)을 멸망시키고, 남당(南唐)을 굴복시키는 등 남조를 거의 평정하였고, 북쪽의 요나라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972년 당시 내의사 시랑으로 있던 서희를 비롯한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서희 열전에도 나와 있듯이 10년 남짓 통교가 없던 때라(時不朝宋十數年) 송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았고 처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서희의 태도가 몸가짐에 절도가 있는 것(容儀中度)을 본 황제가 벼슬까지 내린 것을 보면 상당히 성공적인 외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희의 아버지인 서필이 바른말을 잘하는 강직한 선비였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서희도 그러한 면을 유감없이 발휘한 3가지 사실이 열전에 실려 있다. ① 왕이 몰래 절에 가서 놀아서는 안 된다 성종 2년(983년) 좌승(佐丞)을 거쳐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다. 왕을 따라 서경(지금 평양)에 갔을 때, 성종이 몰래 영명사에 가서 놀고자 하자 서희가 왕에게 글을 올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간하니 마침내 중지하고 도리어 안장과 말을 상으로 내리시고 뒤에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승진시켰다. ② 임금이 신하의 막사에 들어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서희가 일찍이 임금을 호위하고 해주에 갔을 때 성종이 서희 막사로 와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니, 서희는 "신의 막사는 임금께서 오실 만한 곳이 못됩니다"라고 했으며, 술을 올리라고 명령하니 "신의 술은 드릴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니, 성종은 마침내 막사 밖에 앉아서 어주(御酒)를 올리도록 하여 함께 마시고 끝냈다. ③ 옳은 말하는데는 관직의 높낮이가 없다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당시 7가지 바로 다스려야 할 일을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렀다. 성종은 재상을 모아놓고 의논하기를 "정우현이 감히 직책을 벗어난 일을 논했으니 벌을 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모두 "명령대로 하겠습니다"고 하였으나, 서희는 "옛날에는 간하는데는 관직이 없었는데 직책을 벗어났다(越職)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신이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재상 자리에 잘 못 앉아있으면서 지위를 훔치고 헛되이 녹만 먹고 있기 때문에 직분이 낮은 자가 정사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더군다나 정우현이 논하는 일은 대단히 적절한 것이니 상을 주어 장려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성종이 크게 깨달아 정우현을 감찰어사로 뽑고 서희에게는 수놓은 안장과 궁전 안에서 기르는 말, 그리고 술과 과실을 내려 위로하고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에 임명하였다. 신하들이 이렇게 바른말을 하고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직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는 현군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또한 그만큼 임금의 총애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서희에 대한 성종의 믿음이 얼마나 각별했는가는 서희가 말년에 절에서 병 요양을 하고 있을 때 성종이 베푼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종 15년 서희가 병이 나 개국사(開國寺)에 계실 때 성종이 행차하여 문병하고, 임금이 입는 옷 한 벌, 말 세 필을 절에 나누어 보시하였고, 또 곡식 1000석을 개국사에 시주하는 일을 비롯하여 명을 비는 일이라면 안 한 것이 없었다. 이듬해 조정에서 녹봉을 나누어줄 때 서희는 아직 병이 낫지 아니하였으나 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서희의 나이는 아직 관직을 내놓고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으나 아파서 조정에 나오지 못하니 물러난 사람에게 주는 녹봉(致仕祿)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2) 거란의 80만 대군을 혼자서 물리친 외교가 서희가 혼자서 거란의 병영에 들어가 소손령과 담판하여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고려사 서희 열전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성종 12년(서기993년) 거란이 쳐들어오자 서희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 박양유, 문하시랑 최량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북쪽 국경에 주둔하며 방비하였다. 거란의 동경유수인 소손녕(蕭遜寧)은 봉산군(蓬山郡, 지금의 태천과 구성의 중간)을 쳐부수고 아군의 선봉군 책임자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들을 사로잡았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하러 갔을 때 소손녕이 내거는 침략의 근거는 두 가지였다. ①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가 국경을 침범하여 빼앗아 가기 때문에 우리가 와서 토벌하려 한다" ② "우리나라가 사방을 통일하였는데 아직 스스로 와서 섬기지 않은 자는 기어이 쓸어 없애버릴 것이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항복문서를 보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손녕의 요구를 들은 서희는 바로 "화친할 수 있는 분위기가 보인다."고 간파한다.. 그러나 어전회의에서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 중신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자"던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황주(黃州)에서 절령( 嶺, 지금의 자비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주장이 나오자 성종은 마침내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서경에 있는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으나, 그래도 남은 것이 많자 성종은 적의 군량이 될까 두려워 대동강에 던져버리라고 하였다. 이때 서희는 "식량이 충분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허점을 찾아내 움직이는데 있는 것인데, 왜 서둘러 버리려고만 하시나이까. 더구나 식량이란 백성의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그 식량이 적의 손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강물에 헛되이 버리는 것은 하늘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라고 아뢰니, 성종은 그렇다고 하며 (식량을 버리지) 못하게 하였다. 서희가 이어서 "거란의 동경에서 우리 안북부까지 수 백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것을 광종이 빼앗아 가주(嘉州)와 송성(松城) 같은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쳐들어온 원래의 뜻은 이 두 성을 찾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옛땅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군사력이 크게 우세한 것만 보고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묘책이 아닙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 옛땅인데 저들이 계속 욕심을 부려 요구한다면 다 주시겠나이까. 더군다나 땅을 떼어주는 것은 만세의 부끄러운 일입니다. 임금께서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싸워보도록 한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고 강력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서희가 소손녕과 단판할 때도 당당하고 논리가 정연하였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당신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가 차지했는데 당신네가 이를 조금씩 먹어들어 왔고, 또 우리 나라와 땅이 이어져 있는데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고 사신을 보내면 무사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에) 서희는 "그렇지 않소, 우리 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땅이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평양에 도읍하였소. 만약 국경을 따진다면 귀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국경 안에 있던 것인데 어찌 조금씩 먹어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훔쳐 살고 있습니다. 교활하고 간사한 그들이 통로를 막아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더 어렵기 때문에 알현을 못하고 사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소. 만일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길이 통하면 어찌 사신을 보내지 않겠소.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전해 천자께서 들으신다면 어찌 가엾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리요"라고 하였다. 고려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방에게 명분을 주어 회유하는 내용이다. 결국 거란의 1차 침입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서희가 소손녕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거란-송-거란의 역학관계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당시의 전황과 소손녕의 심중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 여진을 물리치고 압록강까지 확보한 전략가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땅이었던 대동강 이북이 무주공산이 된다. 후고구려 때부터 대동강을 건너 서경을 차지한 뒤 고려에서는 청천강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와 옛 발해 땅을 두고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그 결과가 성종 12년(993)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이 때 바로 서희의 담판이 있었던 것이다. 서희가 소손녕과 논쟁할 때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훔쳐 살고 있습니다. 교활하고 간사한 그들이 통로를 막아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더 어렵기 때문에 알현을 못하고 사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소. 만일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길이 통하면 어찌 사신을 보내지 않겠소.]라고 하여 여진인들이 살고 있는 땅을 확보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고 그 땅을 개척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 요나라에서도 자신들의 지배아래 들어오지 않은 생여진의 처리에 어려움을 겪든 때라서 고려의 이러한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거란과의 담판이 있은 뒤 서희는 성종 13년(994년) 지체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 두 진과 곽주(郭州), 귀주(龜州) 두 고을에 각각 성을 쌓았다. 이듬해(성종 14년, 995년) 또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과 홍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고, 또 그 다음해(성종 15년, 996년) 선주(宣州), 맹주(孟州) 두 고을에 성을 쌓았다. <표 2> 서희가 쌓은 성 자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세가와 열전. 고구려 때의 지명은 {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성의 규모는 {고려사} 82권, 지36, 병(兵)2, 성보(城堡) 주1) 병지 성보조에서는 맹주성을 14년에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2) 영주에 쌓은 성은 고려사 세가나 열전에는 나오지 않고 병지 성보조에만 나오는데, 조선조 현종 8년(1667) 유계가 고려사를 바탕으로 지은 {여사제강}에는 995년에 3성을 쌓은 것으로 정리하였다. 주3) {동사강목}에는 [안의는 지금의 귀성부 남쪽 170리에 있고 흥화는 지금의 의주 남쪽 55리에 있다. 나중에 영주(靈州)로 바꾸었다]고 해 흥화가 곧 영주라고 하였다 . 이렇게 해서 서희는 서북지역 4진 4주에 성을 쌓은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구주는 본래 고구려의 만년군(萬年郡)이고 곽주는 고구려의 장리현(長利縣)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구주와 곽주는 고구려 이후 발해 땅이었으나 발해 때의 지명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 때와 발해 때의 지명이 같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희가 서북 고려 땅을 압록강까지 확보한 때 서희는 55세였다. 그러나 바로 그해 건강이 좋지 않아 절로 들어가 투병하다 2년 뒤(998) 돌아가신다. 고구려 옛땅을 회복하겠다는 분명한 논리와 명분, 그리고 확고한 의지를 가진 서희 선생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고려가 보다 넓은 영토를 확보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다. 라. 서희에 대한 후세의 평가 한 인물의 위대성은 생존 당시에 관한 기록도 중요하지만 사후 그를 어떻게 평가했느냐에 따라 저울질 할 수 있다. 서희에 대한 후세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대부분의 사서에 고려사에 나온 서희의 열전이나 북방을 개척한 기사들이 주요 기사로 다루어지고 있다. 대부분 중복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반복하지 않고 다만 후세들이 서희를 평가하는 부분만 모아서 정리해 본다. 1) 고려의 종묘에 모신 서희의 위패 현종 18년(1027년) 종묘에 위패를 모실 때 성종 묘정(廟庭)에 최승로(崔承老), 최량(崔亮), 이지백(李知白), 이몽유(李夢游)와 함께 태사 내사령 서희의 위패를 모셨다. 성종 때의 5대 명신으로 평가한 것이다. 서희가 돌아가신 뒤에도 요나라와의 외교에서는 때때로 서희와 소손녕 간의 담판을 상기시켜 고려의 권리를 주장하는 예가 있었다. 선종 5년(1088) 9월, 태복소경 김선석을 요나라에 보내서 각장( 場, 국가가 교역을 허가하고 전매 이익을 보는 곳)을 없애줄 것을 빌었는데, 김선석이 가지고 간 표문에 [세 번 우러러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으시니 비록 번거롭게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이 두렵지만 어찌 우리가 바라는 바를 말하지 못하고 침묵만 지킬 수 있겠습니까. … 그 때 배신 서희가 경계를 맡아 관할하고, 유수 소손녕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상의하여 각각 양쪽 경계에다 여러 성을 나누어 쌓게 되었습니다. …]고 한 것을 보면 서희가 돌아가시고 9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효력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2)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서희 의정부가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고려 왕조(高麗王朝)의 태사 개국 무열공(太師開國武烈公) 배현경(裴玄慶)·충렬공(忠烈公) 홍유(洪儒)·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장절공(莊節公) 신숭겸(申崇謙) 등 4인은 모두 <고려> 태조(太祖)를 추태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1등 공신(一等功臣)이 되었습니다. … 태조와 함께 배향(配享)되었습니다. 태사 내사령 장위공(太師內史令章威公) 서희(徐熙)는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한다고 성언(聲言)하며 침입하였을 때 성종(成宗)이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려고 하였고, 또 서경의 창고(倉庫)에 있는 곡식을 풀어 대동강(大同江)에 던져 버리고자 하였으나, 서희가 불가함을 여러 차례 말하고는 자청하여 소손녕의 진영(陣營)에 가서 거듭 논설하여 힐난(詰難)하니, 그 말하는 기품(氣品)이 강개(慷慨)하였으므로 소손녕이 강제로 하지 못할 것을 알고 파병(罷兵)하여 돌아갔으며, 또 <서희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 여진(女眞)을 쫓아내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등지에 성을 쌓았으므로 성종과 함께 배향(配享)되었습니다. … 이와 같은 사람들은 각 왕대(王代)에 배향된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청컨대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 때 함께 제사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3) 조선시대 기타 사서에 나타난 서희 ①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나타난 서희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송나라에 구준(寇準)과 부필(富弼)이 있는 것만 알고 고려에도 일찍이 서희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을 모른다. 거란은 그 강력한 병력을 믿고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점령하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소손녕은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봉산군을 깨트리고, 선봉군을 사로잡아 크게 성세를 떨치며 공갈협박으로 항복을 강요하였다. 성종은 서경에 납시었다가 급히 개성으로 돌아오니 여러 신하들이 의논을 올림에, 어떤이는 항복하자 하였고 어떤 이는 땅을 주자고 하였다. 성종이 땅을 갈라주자는 의론에 따르려고 하여 그 계책이 크게 잘못되었는데도 신하들 가운데 감히 반론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희는 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힘써 역설하며 한번 싸우고자 하였으니, 바로 구준(寇準)이 황제에게 몸소 정벌하도록 권한 것과 같은 계책이다. 또한 서희는 사신으로 거란에 나가 예로서 대항하여 굽히지 않으니, 포악하고 사나운 오랑캐도 놀래고 감동되어 끝내 화친을 맺었으니, 봉명사신으로서의 법도를 지킴이 또한 어찌 부필부필(富弼)만 못하겠는가? 당시에 만약 서희의 계책이 없어서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면, 절령 이북 땅을 우리가 다시 보유할 수 있었겠는가? ②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난 서희 문종 2년(1452)에 고려의 왕족 후예 왕순례를 찾아 제사를 주관토록 하고, 사당의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였으며, 왕순례를 부사로 삼았다.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을 배향하였다. ③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나타난 서희 내가 살펴보니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말하기를 '… 만약 고려가 몇 년 동안 국력을 길러, 왕성한 기세를 이용하여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군사를 풀어서 우리 옛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면, 거란이 그 형세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 소손녕이 침입했을 때, 서희가 '귀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계 안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거란 땅을 침식하였다 말하는가?'라고 하자,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하물며 거란이 막 그 땅을 얻었던 그 때는 상황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유리했었다. 이 기회를 잃어버리고 물러나와 조그마한 땅덩이만 지켜서 천하의 약한 나라가 되었고, 조롱 속의 새와 우물안 개구리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여 풍습도 이 때문에 잗다랗게 되어 버렸다. 아! 이 또한 우리나라의 운명이리라' 하였다. 나 안정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먼저 싸운 뒤에 화친을 요구하면 화친이 성립된다. 만약 그 기세만 보고 놀래 화친만 하려고 일삼는다면, 적은 우리를 한없이 농락하고 능멸할 것이다. 이 때에 만약 대도수의 승리와 서희의 굴복하지 않는 의기가 없었더라면, 화친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적의 끝없는 요구를 채우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니, 이 일은 후세에 거울로 삼을 만하다. 유개(兪棨:조선 중기 사람. {여사제강} 등을 지었다)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를 대우할 때 교제상의 예절을 이처럼 단호하고 엄하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려가 거란을 섬길 때에는 서희, 강감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기발한 계책을 세워 승리를 제압하여, 먼저 군대를 쳐부수고 그런 뒤에 교제를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적이 감히 우리를 경멸하지 못했던 것이니, 후세에 그 덕을 본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는 신하로서 몽고를 섬기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강하게 하려는 기세가 없는 채, 오직 몽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굽히는 것만으로 고식적으로 면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몽고가 우리나라를 대우함도 또한 종이나 노예를 대하듯 하여서, 매번 사신이 하나 오기만 하면 온갖 것을 다 요구하여 온 나라가 떠들썩했으니, 또한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하였다. 그가 지은 속 파한집 서문에서 낱낱이, 고려시대의 문학지사를 말하면서, "고려에는 교화가 크게 일어나 이따금씩 어질고 훌륭한 사람들이 나왔다. 광종이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했는데, 그 때는 왕융, 조익, 서희, 김책 등이 가장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하였다. ④ {휘찬여사(彙纂麗史)} 역사기록자는 논한다. 나라가 융성할 때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는 큰 집안이 있어서 명예와 복록으로 한 대의 으뜸가는 공신이 있었다. 서필, 서희, 서눌 세 사람이 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는데 이들은 부자와 비교해 볼 때 그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고 어질고 후덕함이 이길보(李吉甫: 당나라 덕종 때 반란을 진압한 신하)보다 나았다.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가서 한마디 말로 강한 오랑캐를 물리친 장위공 서희의 높은 공은 당나라의 곽분양(郭子儀 :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고 이민족의 침임을 막아 汾陽郡王에 봉해졌다)과 송나라 부정공(富鄭公: 송나라 인종 때 富弼을 말하는 것으로 거란의 割地요구를 힘써 반대하였다)도 이에 따르지 못할 것이다. 공정하고, 충성하고, 곧고 밝아 일마다 충성을 다한 것은 그야말로 대신의 풍채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강역고에 "서북로 연혁을 보면 … 소손녕의 군사를 서희가 물리치므로 우리에 전화위복이 되어 수백리의 땅을 넓혔다 … 압록강 방비가 완비되었다"고 하였다. ⑥ 설봉서원기(雪峰書院記) 이천은 여주와 광주 두 고을 사이에 있는데 … 이 때문에 나름대로 '옛사람들은 고을에서 선생이 죽으면 반드시 추모하는 행사를 열어 그의 사당에 제사 지냄으로써 풍속을 올바르게 이끌었다. 우리 마을이라고 어찌 그런 인물이 없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 고을의 스승과 선비들과 상의하여 그런 인물로서 고려에서는 태보 내사령을 지낸 서공, 조선에서는 징사(徵士)였던 이공, 좌찬성을 지낸 김공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 서공의 이름은 희, 자는 광윤이며, 대대로 이 고을에서 살아온 정민공 서필의 아들이다. … 그러니 고려의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이 이 누구의 덕분이겠는가? 또 그 후 공은 여진을 몰아내고 변방에 성곽을 쌓아 삼한의 억조창생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벼슬은 삼공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위인데 고려 왕씨의 사당에 모셔져 지금까지 제사가 이어져 온 것은 행운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 4) 근대의 서희에 대한 평가 ①신찬초등소학(新纂初等小學) 권5, 제24과 이에 세상 사 이 일컷되 徐太保의 三寸舌이 簫遜寧의 八十萬兵을 당?愎? ?態旅÷甄? ② 유달영(柳達永), [서희선생의 동상을 세우는 글] 한나라 한 민족의 가장 큰 자랑이 그 배출된 인물에 있듯이 한 고을의 자랑도 이와 다름이 없다. 943년에 서희 선생은 이 고장 이천에서 탄생하였다. 그 뛰어난 용기와 슬기와 뜨거운 애국충성은 이 나라 역사에 영원히 찬란한 횃불이 될 것이다. 993년에 강성한 거란의 대군이 물밀듯 몰려와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같아 항복을 하느냐 국토를 떼어주느냐 이렇게 국론이 갈피를 못 잡을 때에 선생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 속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을 꾸짖고 달래여 대군을 이끌고 스스로 물러가게 하여 나라와 민족을 보전하였다. 그후 다시 여진을 몰아내고 일곱성을 쌓아 국세를 압록강에까지 이르게 하고 998년에 56세로 별세하였다. 이 위대한 인물의 정신과 기개를 후손들의 가슴속에 깊이 길러주고자 하는 염원에서 군민들의 정성을 모아 동상을 세우는 바이다. [출처] 거란의 80만 대군을 혼자서 물리친 외교가 서 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