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마음의 문은 닫히는가? / 칠통 조규일
마음은 처음부터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살다보니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보호 본능적으로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보호 본능적인가? 그것은 업(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왜? 업(식)덩어리를 보호 본능적으로 보호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업(業識)이 나라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이 닫혔다는 것은 통하여 있는 것(곳)에 담을 쌓고 벽을 만들어 막아서 통하지 못하도록 단절했다는 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단절인가? 안과 밖의 소통으로부터 단절이다. 왜 안과 밖의 소통으로부터 단절하면서까지 마음의 문을 닫는가? 그것은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다.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란 업(식)덩어리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
업(식)덩어리라고 하는 영(靈)이고 정(精)인 윤회의 주체가 나라고 생각 의식 인식하고 있는데 그 내가 안에서 밖으로 원활하게 나아가야 하는데 나아가는데 걸림이 있고 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데 걸림이 있게되니 걸림이 있는 것으로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보호막을 한다는 것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안에서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는 나라고 하는 업(식)에 맞으면 받아드리고 맞지 않으면 닫으면서 분별적으로 선택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은 전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이는 전생에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영혼의 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어머니 자궁에 들어가고 자궁에 들어가서 어머니 자궁에서 잉태되어 자궁의 양수란 바닷물에서 자라면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 뱃속에서 양수란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10달 동안 항해를 한다. 인간의 몸을 태어나기 위하여 이때 양수란 망망대해의 바다는 어머니는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서 양수란 바다가 출렁이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고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어둠 깊은 양수란 바다를 건너는 태아는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하여 온힘을 다하여 어둠 깊은 망망대해의 바다를 건너온다. 살기 위한 사투를 버리며 그렇게 10달 동안 양수의 바다를 건너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다.
이 과정에서 즉 태교의 과정에서 이미 마음의 문이 닫혀 있을 수도 있다.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자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자기 자신이 살기 위하여 ...이렇게 태교를 거쳐 인간의 몸 받아 태어났을 때 역시도 태교에 따라 각기 서로 다르다. 태어났을 때부터 각기 다르다. 전생의 업에 따라 다르고 자궁이란 망망대해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다르고 어떤 영양과 어떤 소리를 들을 들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둠 깊은 자궁의 양수란 바다에서의 차이가 크기는 하되 그래도 자궁의 양수를 건너 인간의 몸 받아 태어났기에 태어남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거의 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 마음의 문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호흡문들이 열려 있다. 보이는 호흡문이든 보이지 않는 호흡문이든 모두 다 열려 있다.
태어난 살아오면서 자라면서 보이지 않는 호흡문은 서서히 닫히고 보이지 않는 호흡문이 닫힘과 함께 마음의 문도 세상과 부딪치면서 닫힌다. 어릴 때에는 부모 형제의 주변에 의하여 마음의 문이 닫히고 또는 열려 있게 되고, 자라면서 주위 환경과 부딪치는 사람들에 따라서 또한 마음의 문이 닫히거나 열려 있게 되고, 자라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주위 환경과 부딪치는 사람들에 따라서 마음의 문이 닫히거나 열려 있게 된다.
이러한 관계로 마음의 문을 보면 보통 마음의 문은 3개로 보여진다. 사람에 따라 3개가 다 열려 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3개 중 2개는 닫혀 있는 경우가 많으며 1개 이상 닫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개가 모두 다 열려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어릴 때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가 생활하면서 자꾸만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뜻과 의지와는 다르게 행함으로 피해를 받게 되니 자연스럽게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즉 내가 살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살아보니 못살 것 같으니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며 자기식 대로 살려고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자기식(自己式)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식) 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업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란 전생에서부터 가져온 업(식)덩어리에 붙어 있는 업에 따라 나라고 하는 내 방식(方式) 즉 업(식)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어려서부터 시작해서 자라면서 또한 그러하고 자라서도 또한 그러하다. 자기를 보호하고 생존 본능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여는 것은 업(식)을 보호하고 업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못 살 것 같은 곳이나 것에서도 처음은 힘들어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잘 적응하며 산다. 이렇게 우리의 본성은 살아가고 있고 살아지는 것이다. 살아가고 살아지는 속에서 행한 행위를 소유하고 행한 행위에 집착하게 되다 보니 행한 것을 끌어안게 되고 끌어안아서는 행한 행위로 인한 것에 대하여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하고 기대한 것이 실망으로 돌아오고 그러다가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고서는 또 다시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하게되고 행위를 해서는 또 기대가 무너지고 무너져서는 실망하게 되고 실망해서는 기대한 것으로부터 상처를 입는다. 그러면서 열려 있는 마음의 문은 서서히 닫힌다.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행한 것에 기대하고 행한 것에 무엇인가를 바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다면 실망할 것도 없고 상처 입을 것도 없다. 기대하거나 바라고 행했기 때문에 실망하고 실망해서는 상처를 입거나 또는 더 이상 행하기 싫어져서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처음 무엇인가 바라거나 기대를 바라고 행할 때는 기분 좋게 행한다. 그리고 행함에 걸림이 없고 자유롭다. 행하고 나서 바라거나 기대한 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낙담하고 상처를 입고는 이제 실망과 낙담 상처로 인하여 걸림과 장애가 생겨서 부자연스럽게 행하게 되고 행해도 망설이게 된다. 망설이다 행한 것에 또 기대와 바램을 갖는다. 아니 행하면서부터 기대와 바램을 갖고 행한다. 그렇게 행한 것이 기대대로 바램대로 잘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또 잘못된다면 이제 더 행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마음의 문은 서서히 닫히는 것이다. 행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타인을 위한 것이든 행한 것으로부터 닫히는 것이다.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닫히는 것이다. 만족스럽지 못하니 닫히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불만족인가? 그것은 바로 업(식)으로부터의 불만족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으로부터 업(식)덩어리로부터의 불만족이다.
자등명은 바로 여기서부터 닫혀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업으로부터...업은 마음으로부터 닫혀 있는 것이다. 마음은 안으로부터 닫혀 있는 것이다. 안은 밖으로부터 닫혀 있는 것이다. 자등명이 닫혀 있지 않고 현현하기 위해서는 밖이 열려 있음으로 안이 열리고 안이 열림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림으로 업(식)이 떨어져 나가고 업(식)이 떨어져 나감으로 자등명이 현현해야 한다.
밖은 이미 열려 있다. 다만 밖으로부터 열려 있음은 밖으로부터 대상이 있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열려 있지 않을 뿐이다. 밖으로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이다. 마음의 문이 열리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대상을 갖지 않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대상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행하되 행함에 있어 대상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행하되 행함을 소유하며 기대하거나 바라지 아니하고 머무름 없이 행하면 된다. 머무름 없이 행할 때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게 되어 걸릴 것도 없게 된다. 걸리 것이 없을 때 마음은 활짝 열려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하되 행했다는 생각도 갖지 말며, 행하되 행한 것을 소유하려 하지도 말며, 행하되 행한 것을 소유하며 기대하거나 바라지 말라. 행한 것을 생각하거나 소유하거나 기대하거나 바라다보면 열렸던 마음의 문도 행한 것으로 인하여 닫히게 되나니 머무름 없이 행하라.
머무름 없이 행하라 하니 그럼 인연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걸리지 말고 장애를 갖지 마라. 그것이 인연이든 인연이 아니든 걸리지 마라. 그렇다고 인연을 외면하라는 것 아니다. 인연에도 장애를 갖지 말고 걸리지 말고 도리를 다하라. 도리를 다하되 걸리지 말고 장애를 갖지 마라.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다하지 못한 도리로 걸리고 장애를 갖나니 그대가 있는 그곳이 어디든 도리를 다하라. 도리를 다하되 머무름 없이 행하라.
머무름 없이 행하면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게 되어 닫혔던 마음도 열린다. 비록 마음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행함에 있어 행한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마음의 문은 서서히 닫히기 시작해서 행함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대하고 바랬던 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않음으로 닫히게 되나니 행하되 행함 없이 행하고 행하되 머무름 없이 행하라. 그래야 닫혔던 마음은 열리고 열렸던 마음은 닫히지 않는다.
본래무명이 도래한 이후부터 행한 행을 소유함으로 해서 소유한 것으로부터 마음의 문은 닫혀 왔느니 닫힌 마음의 문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생에서의 일도 아닌 오랜 과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지를 알고 닫힌 마음의 문을 사방 팔방 시방으로 열고 본래 성불의 자리에 들어갈 일이다.
2010. 01. 09 12:25
첫댓글 자세한 내용 참 반갑고, 잘 알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새기며 갑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