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이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과정은 생략하고 그 중심내용만 언급하자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두지 않는다’였지요. 누가 보더라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임이 분명했습니다. 모든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헌법이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고쳐진 것이지요.
개헌 과정이 워낙 막무가내였던지라 자유당 내에서도 반발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유당을 탈당한 유명한 인물 중 하나가 훗날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김영삼이었지요.
외부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어서 소식을 들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개헌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오입 개헌은 자유당 입장에서도 상당한 무리수였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1956년 3월, 이승만은 요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은 더 이상 정치에 생각이 없으니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나오지 않겠다는 불출마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토록 무리수를 둬놓고 그새 이승만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샘솟아 권력욕을 버린 것일까요? 음... 좀 더 보지요.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 다음날, 부산에서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에 반대하는 온갖 단체들이 총궐기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사태를 본 이승만은 외국 기자들에게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으로서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오오, 국민이 원한다면 목숨도 버리겠다는 대통령을 보고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 날 서울에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몰려와 이승만의 재출마를 외칩니다. 그들은 우마차 800대를 끌고 와 경무대 앞에서 행진시위를 진행했지요.
재밌는 건 당시 동물이 끄는 마차는 서울시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행동은 불법이었지요.
그러나 그토록 악명 높았던 1공화국의 경찰들은 이들을 진압하려는 어떠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위대는 자유당의 관변단체였던 ‘대한노총’의 지휘를 받고 있었거든요. 대한노총은 1955년 12월부터 이승만이 재출마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시 파업을 감행하기로 결의한 바 있습니다.
즉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과 관변단체의 시위는 모두 계획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이승만이 즐겨 사용한 ‘민의’의 구축이지요. ‘위대한 영도자의 통치를 원하는 가엾은 백성’을 연출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감추면서도, 동시에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언론들은 민의를 조작하는 걸로 모자라 소와 말까지 선동에 동원한다며 ‘우의마의 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나중에는 이승만이 귀신까지 동원할 거라며 ‘귀의(鬼意)’라는 단어도 나왔지요.
이후 이승만은 우마차의 행진으로 서울 시내가 똥바다가 되는 것을 보고 “아이고 내 덕이 부족해 우리 동포들이 고생하는구려. 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으니 앞으로 서한으로만 의견을 제시하는 게 좋겠소”라는 요지의 발언을 합니다.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무대에 혈서가 우수수 날아들었지요.
결국 이승만은 “민의가 이럴진대 어찌 끝까지 내 고집만 부리겠는가. 나 이승만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이번 선거에 출마하겠소”라 말하며 불출마선언을 철회합니다. 그야말로 화려한 정치쇼였지요.
참고로 이런 식의 여론 호도는 과거 역사에서도 일어난 바 있습니다. 바로 조선왕조의 임금들이 일으킨 선위파동이지요.
임금이 딱히 건강에 문제가 없음에도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선언하고, 신하와 세자는 명을 거둬달라고 며칠간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비는 것이 선위파동의 요체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임금들은 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왕권 강화를 꾀할 수 있었지요.
양자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조선의 임금들은 전제군주정의 왕이었고, 이승만은 민주공화정의 대통령을 표방했다는 것입니다. 우스우면서도 슬픈 현대사의 한 단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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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것을 눈으로 보고 배운 03이와 對仲의
정치 쇼 또한 볼만했지요 !
유능한 선배가 있었으니 유명한 후배들이 속출한 셈이지요.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 무게가 똑 같다고 하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