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반야심경(般若心經).
예수의 말은 어떤 해프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허공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몸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이 이야기는 붓다가 출가한 후 그의 생부인 정반왕을 만났던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정반왕은 붓다를 보자마자 격분해서 고함을 쳤다. 그러나 붓다는 조용히 들으면서 가만히 있었다.붓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출가할 때 그가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허공으로부터 그의 몸안에 들어왔다. 그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엽서 한장 분량의 그의 말들을 남겨놓았다. 그의 모든 말들은 불에타서 소실되었다.그리고 그가 남긴 말들은 정화(淨化)에 관한 것이다. 무엇인가 그대 몸안에 들어오려면 그대는 정화해야 한다.그 정화는 그대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목 아래의 세상에 속한 형상은, 육체적인 그 형상은 사라져야만 한다.. 스승은 사실 영혼의 살인을 할 것이다. 그는 영혼의 살인자이다. 인간 육체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홀로 신부의 방에 들어가는 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 지상의 여인의 자궁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대가 오감을 통해서 밖을 볼 때 이 세상에 그대는 홀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망망한 대양에 홀로 있는 그런 섬과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 가야 한다. 그대 내면에 광대한 우주가 존재한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우주를 모른다면 그대의 삶은 단순히 홀로있음이란 두려움과 외로움과 싸우는 헛된 낭비가 될
것이다. 그대는 망망한 대양에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가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냐는 것이다. 다섯 개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즉시 그대는 내면에 있게 된다. 이것은 너무 쉽고도 간단하다.
이 간단하고 쉬운 것을 두고 붓다는 이러한 말을 했다. "한 방울의 이슬이 대양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
그대가 다섯개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것은 태초 이래로 시작된 오랜 습관이고 버릇이다.그대가 이번 생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다. 홀로있는 섬처럼 외로움과 두려움에 살았던 것은 이번 생만이 아니다..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내면으로 향하는 이들이 에고가 완전히 성숙한 자라 할 수 있다... 시계추처럼 밖으로 나가는 극단에 도달하면 정반대로 그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내면으로 향한다. 이
진리의 길은 에고가 완전히 성숙한 자들이 걷는 길이다.
에고가 미성숙한 자들은 걸을 수 없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오직 먹는것에 집중을 해야만 한다 그들의 관심은 그냥 생존뿐이다. 명상은 부유하고 강력한 에고들이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명상이 유행을 하는것도 그들이 부유하고 강한 에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불교는 왕족과 귀족들의 종교였다. 붓다 자신도 왕세자의 신분이었다. 그의 제자들의 다수가 왕족 출신이었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안에 있는 것이다.그러나 그대에게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다섯 개의 오감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그대에게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그대에게 이 상태가 바로 죽은 시신이다. 죽은 시신의 오감은 모두 작동하지 않는다. 육신이 죽은 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다.
그러나 죽은 시신은 그대와 소통을 할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대가 내 말을 이해하려면 잠을 이해해야 한다. 잠을 잘 때 그대는 5감을 통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대는 바로 정확히 내면에 있다. 잠은 죽음과 똑같은 속성과 질(質)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잠을 잘 때 무의식 상태로 꿈만 쫒아 다닌다... 그대가 죽은 영혼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잠에서 의식을 갖고 깨어나야만 한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있다면 그리고 꿈에서 깨어만 있다면 나는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를 찾아갈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대양에 홀로 있는 섬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밖을 내다보면서 죽음과 외로움과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만나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사람들은 관속에 들어가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들이다.
붓다에게는 낮과 밤이 하나이다.
그의 의식은 낮에도 밤에도 똑같은 의식이다... 바로 그의 의식이 순수의식이다. 무의식이란 잠속에서 낮의 의식을 갖고 깨어날수만 있다면 그대는 경악할 것이다. 무중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러면 잠에서 깨어나라. 그대는 무중력의 상태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지구의 중력은 그대를 아래로 잡아당기지 못한다. 이것이 최초로 그대가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를 아는 순간이 될 것이다.. 무엇을 알든 그대가 아는 자유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의 진짜 자유를 오해한다.
선(禪)은 배우는 기술이 아니다.
명상을 배울수 있는 기술이거나, 지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선생들을 찾아갈 것이다. 선(禪)은 그대란 존재에 대한 탐구이고 나는 그런 선생이 아니다.지식이나 기술은 그대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든다... 지식과 기술을 배울 때 그대는 그저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죽음이 그대에게 그저 하나의 관찰하면서 볼 수있는 대상인가?? 죽음은 그대가 직접 겪어야할 체험이다. 그대는 죽음을 배우거나 기술을 습득할 수 없다. 그대는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
선(禪)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대의 연인도, 자식도, 그대 대신에 그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그대는 직접 내면으로 들어가 그대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죽음을 직접 체험하지도 못한
자들이 어디에서 들은 소리를 떠드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그대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이 아니다.불경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은 사탄의 존재였다.
그러나 어느 날 커다란 뱀이 혀를 낼름거리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큰 뱀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무서워 그 뱀을 쫒아내기위해 그 뱀의 머리를 발로 찼다.
이 해프닝이 있은 이후에 비로소 창세기의 여인을 속여서 금단의 열매를 먹게 유혹한 사탄의 벌로서 지상에 태어난 뱀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그대는 여자, 사탄 그리고 그대,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서 분리시키고 분별하고 차별한다. 그대가 신을 믿고 그대가 성경을 따르는 기독교인이라서 그대는 사탄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는가?그대는 자신이 신이고 천사이기에 사탄이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하는가?내가 말하겠다.그대가 바로 사탄이다. 그대는 남자이고, 여자이고, 그리고 사탄이다.
그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대상에서도 사탄을 찾지마라.
3은 의미심장한 숫자이다.
도교에서 그대의 육체에는 셋이 존재하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다. 하단전에는 뱀이 중단전에는 여인이 그리고 상단전에는 신이 존재한다. 그대는 진리와 의식과 지복이다. 이것 역시 셋이다.
그대가 지상에서 있을 때는 뱀과 여인과 남자이다.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 날아오를 때 이 셋이 변형된다... 진리와 의식과 지복으로 변형이 된다. 같은 것이 지상에 있을 때 뱀과 여인과 남자이지만 변형이 되면 진리, 의식, 지복의 셋으로 변형이 된다.
"보리살타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어 거꾸로 된 헛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셨다.'
그대가 여인이 되어 그대를 비추는 거울로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때 그대는 뒤집혀진 망상을 바로 잡는다. 그대를 제외하고 사탄은 없다. 그리고 신은 없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형상으로 진흙으로 인간을 만든 후에 호흡을 불어넣어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인간이 사탄이면서 동시에 신이다.
예수는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예수보다 더 인류에 공헌한 인간은 모세이다. 모세는 창세기를 썼다. 그리고 이 창세기를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전부 다 믿는다. 만약 그대가 육체에 촛점이 맞춰진 인간이라면 그대는 신이 4333년 전에 이 세상을 창조되었다고 믿을 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다. 4333년 전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창세기는 모세의 체험이라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대의 마음에 초자연적인 신을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