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7일(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일상에서 한발 물러나는 시간 어른이 돼서 세례를 받은 교우들 대부분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또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기 위해 입교해 오는 거 같다.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자신이 복종해야 할 진리를 찾기 위해서 그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고 그분이 바로 진리이고 영원히 사는 길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잘 찾아 얻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며 신나고 때론 그 반대로 복잡한 세상사와 인간관계를 피해 들어 왔는데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고, 행사는 그저 행사로 끝난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 영원한 세상을 맛보지 못한다.
오늘도 코헬렛이 남긴 묵상을 나눠 받는다. 그는 세상 모든 거에 때가 있음을 보았다. 태어나고 죽고, 심고 거두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전쟁하고 평화를 되찾는다. 세상만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조하는 코헬렛의 모습을 상상 해본다. 이는 만물 중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영물이라고 불리는 맹수 호랑이도 사람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호랑이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관조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창조주 하느님을 당연하게 여기고 이미 그 섭리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는 걸지 모른다. 반면에 사람은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 비로소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흔적을 간신히 조금 알아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닌 구세주 메시아에 대한 대중적인 바람은 세속적이고 기복적이었다. 때가 차면 힘과 능력을 지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부정을 없애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막상 구세주가 왔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만들어 처형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그분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봤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루카 9,20)”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셨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루카 9,22)” 하기 때문이었다. 그 함구령에 대해 학자들이 하는 주장을 여럿 들었지만 잘 모르겠다. 병자들을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풍랑을 잠재우는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써 구세주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능력과 힘을 지닌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죽기까지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시다.
구세주는 아침이슬 내리는 거처럼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짐승처럼 들에서 지내는 비천한 목동들 몇 사람과 저 멀리 이국땅에서 찾아온 세 사람만 구세주를 보았다. 그건 사탄도 몰랐다. 온 세상 곳곳 아닌 곳 없이 하느님의 흔적이 있지만 사람은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하느님은 내 안에서 그리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통해 말씀을 건네 오시는데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듣지 못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신비로운 구세주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나? 하느님은 세상에 다 드러나 있고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구세주 예수님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잃어버린 본래 인간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고 오셨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바람만 갖고 있다면, 코헬렛처럼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나와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다 드러나 있고, 이미 수천수만 번 들은 구원의 신비를, 동물과 식물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지만 지금 이 시간처럼 제 일상과 제 자신에게서 한발 물러나 제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 주님과 마주하는 시간이 없으면 허무하게 사라질 세상살이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게 제 안에 그 흔적을 남겨 놓으셨지만(로마 1,19-20), 그것만으로는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도 마음은 영원한 세상에 두게 이끌어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