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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686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추풍령 너머 김천
『택리지』에 “임진년에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 군사를 시켜
고을 뒤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서 뜸질하게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서 땅의 정기를 눌렀는데 그 후로는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기록된 대로, 선산에서는 빼어난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인전이 “아득한 낙동강은 남쪽으로 띠를 이루고,
우뚝 솟은 험한 봉악은 북녘으로 성이 되었도다”라고 읊었던 고을이 선산이었다.
원래 선산군에 딸렸던 구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구미시 선산읍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는데,
구미 부근에 있던 고을이 인동현(仁同縣)이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면 서쪽으로 긴 강물이 아득히 흐른다.
잡초 우거진 평평한 들녘과 모래밭에 푸릇푸릇한 경치로 에워싸인 곳이 칠진이다.
푸른빛 뾰족한 산봉우리에 아침에는 구름이 일고 저녁에는 놀이 끼어서
아침저녁으로 변하여 그 모습을 헤아릴수조차 없는 곳이 금오산인데,
곧 충신 길재가 그 옛날 세상을 피해 숨어 살던 곳이다.
강혼이 지은 『망호헌기(望湖軒記)』에 실린
구미 일대의 모습은 점차 세상의 변화 속에서 엄청난 변모를 하게 되었다.
시절은 예나 다름없이 봄빛 가득한데, 사람은 사라져 마을이 텅 비었네.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던 옛날과 달리 이곳에 구미산업단지가 활성화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대단위 아파트들이 세워졌고,
구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선산의 서쪽에 자리한 고을이 본래 신라의 금산현(錦山縣)이었던 김천시다.
조선 정종 때 왕의 태(胎)를 황악산에 봉안한 뒤
군으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금릉(金陵)이라고 하였다.
직지사 천왕문
선산의 서쪽에 자리한 고을이 본래 신라의 금산현(錦山縣)이었던 김천시다.
조선 정종 때 왕의 태(胎)를 황악산에 봉안한 뒤 군으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금릉(金陵)이라고 하였다.
금천역의 이름을 따서 김천면이 되었다가 1949년에 김천시로 승격된 김천시는
금릉군을 포함하게 되었다.
조위가 지은 『동헌중수기』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청주를 경유하는 일본 사신과 우리나라 사신은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을 정도로 실로 왕래의 요충지다”라고 하였고,
이첨이 시에서 “낡은 집이 산기슭에 의지하였고 위태로운 다리 옅은 모래를 건넜다.
땅이 기름져서 가을에 풍년 들었고 나무는 해마다 꽃도 안 피네”라고 노래한
김천은 교통의 요지이며, 김천의 진산인 황악산에는 직지사(直指寺)가 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 © 유철상1996년에 문을 연 직지성보박물관은
경부 북부지역의 여러 절에서 전해오는 불교문화재를 모은 곳이다.
직지사 대웅전 © 유철상직지사는 418년에 묵호자(墨胡子)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김천 서쪽이 곧 추풍령이다.
지금은 영동군에 편입되었지만 본래 경북 금산군 황금소면 지역이었고,
이곳에 있던 역이 추풍역(秋豊驛)이었다.
“관아의 서쪽 35리에 있다.
동쪽으로 문산역까지 30리며,
남쪽으로 지례 작내역까지 60리다.
서쪽으로 황간 신흥역까지 20리이며, 북쪽으로 상주 낙서역까지 60리다.
대마 두 마리, 중마 두 마리, 소마 열 마리, 역리 서른두 명, 역비 한 명이 있다”라고
실려 있던 추풍령 고개를 노래한 가수가 오기택이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가는 그 세월을 뒤돌아보며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그립구나, 추풍령 고개
추풍령 고개는 지금은 경부선 열차와 경부고속도로가 나란히 줄지어 달리고
고속전철까지 지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길목이 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험준한 고개 중의 하나였다.
또한 그 이름 때문에 조선시대 선비 사회에서는 금기시되는 고개 중 하나였다.
관원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 파직되고
선비들은 과거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넘지 않았다.
대신 직지사 앞에서 영동군 황간으로 넘어가는
눌의산 남쪽에 있는 괘방령(掛榜嶺)으로 돌아갔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괘방’이란 말 그대로 ‘방을 써서 붙인다’ 또는 ‘방을 써서 걸었다’는 뜻이므로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을 게시한다는 뜻도 되고,
관원들에게는 윗자리로 승진한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서쪽의 황악산에서 흐르는 직지사천과
김천시 대덕면 대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감천이
김천시에서 합류하며 동쪽으로 낙동강에 흘러든다.
감천에 인접한 고을이 지례, 금산, 개령인데 선산과 함께
감천 물을 관개하는 이로움을 누렸다.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고
조선시대에 현이었던 지례(知禮)는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지역에 있었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개령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현종 때 경산부에 소속되었고 공양왕 때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때 다시 고쳐서 현감을 두었다.
1895년에 지례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김천군에 병합되면서 지례면이 되었고,
다시 김천이 시로 승격되면서 김천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내륙 산간 지역으로
성주, 금산, 무주, 상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하였고,
작내역(作乃驛) 등이 있어서 교통상 중요한 곳이었다.
이첨은 지례현의 객관에 대하여 “동구가 처음에는 좁더니 점점 넓고 평평해지는데,
난을 피한 산꼭대기에는 옛 성이 있다.
도장에 전자는 새로 정한 호를 새겼으나 현관은 아직도 옛 이름을 지녔네.
어량에 물이 가득 푸짐한 가을도 흥겨운데,
나그네 길에 하늘도 맑으니 들 정취가 흐뭇하구나.
다행히도 사군과 약간의 안면이 있어 동헌에 술을 놓고 나를 위로하네”라고 말하였고,
장지도는 그의 시에서 “천년반곡(千年盤谷)은 온 구역이 평평한데
앞 봉우리의 끊어진 벼랑을 차지하여 돌 성을 세웠다.
예부터 내려온 토성 몇 집인고, 지금까지 열 집이 벼슬 이름을 얻었다.
처마 끝에 늘어선 감과 밤은 산중의 맛이요,
추녀 끝에 서린 구름과 연기는 세상 밖의 정취로다.
성시에 일찍이 버림받음을 한탄하지 마라.
한가한 나그네 되어 한가로이 가는 것도 좋지 않으냐”라고 노래하였다.
1686년 가을 청암사(靑岩寺)에 왔던 우담(愚潭) 정시한은
이 절에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저녁을 들고 나서 혜원, 승헌 노스님 그리고 효선스님과 함께 쌍계사로 걸어 내려오노라니 양쪽 골짜기 사이로 계곡을 따라 붉게 물든 나뭇잎과 푸른 소나무가 길을 에워싸고 물은 쟁쟁거리며 음악을 들려준다. 고승 두어 분과 소매를 나란히 해 천천히 걸으며 걸음마다 (경치를) 즐기니 사뭇 흥취가 깊다.
정시한의 일기에 나오는 쌍계사는 당시 청암사를 거느렸던 본사였으나 지금은 증산 면사무소 뒤편에 주춧돌 몇 개와 연꽃 두어 송이를 조각한 비례석만 남은 폐사지로 남았을 뿐이다. 수도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한적한 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천왕문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 회당비각과 대운당비각 및 청암사 사적비가 서 있다.
화엄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회암 정혜스님의 비각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조현명이 지었으며, 대운당비각은 청암사의 역사를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청암사는 평촌리 88번지 불영산 기슭에 있는 절로,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신라 헌안왕 2년(858)에 창건하였다.
이 절에 혜철스님이 머무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암사는 그 뒤 조선 중기에 의룡율사가 중창하였고,
1647년에 화재로 불타버리자 벽암스님이 중건하였다.
하지만 1782년(정조 6)에 다시 불타고 말았다.
지금의 절은 1912년에 당시의 주지 김대운이 세운 것이다.
보물 제296호인 석불좌상과 제307호인 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청암사청암사는 평촌리 88번지 불영산 기슭에 있는 절로,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신라 헌안왕 2년(858)에 창건하였다.
남아 있는 절 건물로는 대웅전, 육화전, 진영각, 전법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개울 건너에 극락암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이 있다.
본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다가 조선시대에 현으로 강등되었던 개령은 지금은 김천시에 딸린 면이다. 서거정은 개령을 일컬어 “네 개 고을의 중심지에 있다”라고 하였고, 윤자영은 “긴 강이 한줄기 유리처럼 미끄러운데 늘어선 멧부리는 층을 지어 수목 같이 진하구나”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하나의 면으로 남아 옛날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계림사(鷄林寺)는 감문산에 있고, 갈항사1)는
금오산 서쪽에 있던 절로 신라의 고승 승전이 돌해골(석촉루)로
이 절을 창건하고 관속을 위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그 돌이 80여 개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갈항사는 경북 김천시 남면 오봉리 금오산 서쪽에 있었던 절로,
692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화엄법사 승전이 창건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돌해골을 청중으로 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돌해골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글자 그대로 해골이 굳어서 돌이 된 것이라고도 보고,
그냥 돌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돌들은 그 뒤에도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758년에는 남매 사이였던
영묘사(靈妙寺)의 언적과 문황태후 경신태왕이 3층석탑 2기를 건립하였는데,
이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이 절이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화엄종에 속했던 이 절의 그 뒤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절터에 남아 있던 3층석탑은 1916년에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옮겨졌다.
서울로 옮겨진 갈항사 터의 석탑 2기 중 동탑은 높이가 4.3미터이고,
서탑은 높이 4미터로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이 조성된 때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던 시기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되던 시기와 같다.
동탑의 상층 기단부의 면석에는
유려한 필치와 높은 기품의 행서체로 된 명기(銘記)가 음각되어 있어서
이 탑의 유래와 함께 탑을 조성한 시기가 758년임을 알 수 있어 주목되는데,
이렇게 탑 자체에 명문을 적어놓은 예는 신라시대 석탑으로는 유일하다.
명문은 모두 네 줄인데, 그 내용을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다.
두 개의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년에 세웠으며,
오빠와 두 자매 세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오빠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시고, 손위 누이는 소문 황태후시며,
손아래 누이는 경신대왕의 이모시다.
이 탑을 세우기 위해 시주한 사람들이
왕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석공들이 이 탑을 세우는 데 쏟았을 정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이 탑에 새겨진 글로 이두문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탑을 두고 “석가탑 이후 가장 풍치 있고 아담한 탑”이라고 한 사람이
우현 고유섭이다.
그는 이 탑을 두고 “단려(端麗)하고도 아순(雅淳), 가장 문아(文雅)한 탑의 하나”라고 하였다.
바로 그 갈항사 터에 보물 제245호로 지정된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작은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고, 밖에는 석가여래 좌상이 있다. 원래의 머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무리 보아도 어색한 새 머리를 목 위에 얹어놓은 석가여래좌상을 바라보면 언짢은 내색 하나 없이 앉아 있는 석가모니가 한없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와 그 위에 올려놓은 양손이 상당 부분 깨져서 안쓰럽기도 하지만 다른 부분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이 불상도 갈항사 탑을 조성할 때 같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항사갈항사 터에 보물 제245호로 지정된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작은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유산 북쪽 동월 곁에는 감문국 때의 궁궐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개령현 북쪽 20리에는 금효왕릉이라는 큰 무덤이 있는데
감문국 금효왕의 묘라고 전해진다.
이곳 개령에서 개령현감 김후근의 탐욕과 폭정에 못 이겨 개령민란이 일어난 것은 1862년 4월이었다. 김후근은 현감으로 부임하여 3년 동안 전세(田稅)를 정액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반민(班民)인 김규진이 읍폐(邑幣)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통문을 몰래 돌렸는데, 그 내용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그 마을도 파괴할 것이며
또한 이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부호로부터 징수하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문을 몰래 돌리다가 발각된 김규진이 옥에 갇히자
4월 7일 외촌에 살던 백성 수천여 명이 관내의 이천장(梨川場)에 모여 소요를 일으킨 뒤 읍내로 향하였다. 그들은 옥문을 부수고 김규진을 비롯한 여러 죄수들을 풀어준 뒤 관아로 난입하여 전 이방 우학능, 전 수교(首校) 우해룡, 하리(下吏) 문진기 등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웠다.
또한 군부, 전부, 환부 등을 모두 불태웠을 뿐 아니라 읍내의 민가 42채를 불태웠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보다 앞서 일어난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파견한
박규수에게 진주민란을 진압하는 대로 개령으로 향하라고 하였다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안동부사 윤태경을 대신 파견하여 난을 신속히 수습하라고 명하였다. 난이 수습된 뒤 주동자인 김규진, 안인택, 이복대와
난에 가담한 이방 문기표, 공문서를 소각한 정지평 다섯 명을 효수하였다.
그리고 좌수 권기일, 수교 조인국, 박경한은 책임을 물어 3차에 걸쳐 엄한 형벌을 가한 뒤 노비로 삼아 먼 섬으로 쫓아버렸다. 그 밖에도 십수 명을 먼 섬 등으로 귀양을 보내거나 중형을 내렸으며,
김후근에게도 책임을 물어 파직한 뒤 전라도 영광군에 있는 임자도로 귀양을 보냈다.
김천시는 금천역의 이름을 따서 김천면이 되었다가 1949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조위가 지은 『동헌중수기』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청주를 경유하는 일본 사신과 우리나라 사신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을 정도로 실로 왕래의 요충지다”라고 하였고,
이첨은 “땅이 기름져서 가을에 풍년 들었고 나무는 해마다 꽃도 안피네”라고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