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영, <팔랑개비, 세상을 날다>, 문화문고, 2016, 25~29쪽에 실린 「쟁반으로 짬뽕 배달하다 엎어진 날」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터미널 옆에 자리하고 있던 짜장면집은 온데간데없고, 터미널도 오래 전, 이전해버렸네요!! 하지만 근남면사무소는 굳건하게~^^
쟁반으로 짬뽕 배달하다 엎어진 날
짜장면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으로 올라간다. 어머니가 이른바 짜장면집 요리사 출신인 계부(繼父)를 만나면서부터다. 어머니와 계부는 같은 동네에서 과부와 홀아비로 살다 이웃의 중매로 만났다. 어머니 쪽은 자식이 넷, 계부 쪽은 하나. 그래선지 재혼 초부터 갈등이 적지 않았다. 여동생과 계부의 자식이 동갑인 이유로 둘만 중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고, 우리 삼형제는 국민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사회로 진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하튼 어머니와 계부가 합치면서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이른바 종자돈과 계부의 요리기술이 만나면서 이른바 짜장면집을 차리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서 가게를 한다는 게 쑥스러웠던지 고개 넘어 이웃 동네로 이사하여 중국음식점을 오픈했다. 어머니 개가 이후, 한 3년 정도 지나자 난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다. 형님 둘은 이미 사회인이 되었고, 나 또한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해야만 했다. 개 눈엔 뭐만 보인다고 또 다른 고개 넘어 동네 짜장면집에 취업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회생활한 곳의 짜장면집은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손꼽히는 철원군 근남면 면사무소 근처였다. 우리 부모님 또래의 사장님 밑에서 일을 했는데 사장님 자식들도 우리 형제들과 비슷한 또래들이었다. 하지만 사장님 댁 자녀들은 나름 유복한 상태였고, 난 월급도 없는 그저 ‘먹고 자는 것’으로 교섭이 완료된 상태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일해야만 했다. 나의 업무분장은 홀에서 서빙하는 것과 주방에서 그릇 닦는 일, 외부로 배달하는 일 등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곳에서 한 겨울을 난 정도이니, 대략 6개월 정도를 일했던 듯하다. 큰 고개 하나 넘으면 우리 집이 있는 동네라 슬플 이유가 전혀 없는 거리인데, 너무도 어린 탓인지 왜 그리 집이 그립던지, 왜 그리도 집엘 가고 싶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뭐 집에 간다고 반겨줄 사람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집이 그립고 어머니 손길이 그리웠던 건 지금도 미스터리다. 참고로 어머니와 계부는 악연(惡緣)인지 하루도 쉼 없이 다투셨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숙직하던 아저씨가 짬뽕과 탕수육 등을 주문했다. 조금 늦은 주문이었지만 요리가 포함됐다는 이유로 사장님은 흔쾌히 배달해 주겠노라고 답하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난 배달 준비를 마치고 음식이 나오는 대로 일본말로 오봉으로 불리는 큰 쟁반에 담았다. 참고로 이른바 ‘철가방’은 당시 제법 큰 음식점에서만 사용했고, 우리처럼 영세(零細)한 음식점에서는 오봉이라는 큰 쟁반으로 배달을 했다.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은 금방 이해를 하겠지만 오봉이라는 게 철가방과 달리 배달할 때 좀 힘든 게 아니다. 철가방의 경우, 가다가 힘들면 팔을 바꿔가며 배달할 수 있지만, 오봉은 두 손으로 가슴 쪽으로 꽉 움켜잡고 균형을 맞춰 가야하기 때문에 힘이 곱절 이상이다. 게다가 그릇도 질그릇이었기 때문에 깨지기도 잘하고, 무게 또한 굉장했다. 그러다 보니 배달 도중에 힘들어도 중간에 쉬기도 만만치 않아 가급적 균형을 잡고 마구 달려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짬뽕과 탕수육 등을 오봉(쟁반)에 잔뜩 담아 면사무소 숙직실을 향해 가게 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아마도 초겨울 쯤 된 듯했다. 그곳의 짜장면집과 면사무소 숙직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거리를 그것도 오봉(쟁반)으로 그 음식들을 면사무소 숙직실까지 가기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평소 나이답지 않게 깡다구가 누구보다 쌔고, 뚝심이 대단하다는 가게 사람들의 말(?)만 믿고 플래시 없이 간 것이 화근이었다.
문제는 면사무소 정문 가까이에 이르러 벌어졌다. 애초에 어두웠을 땐, 멀리서 대략 감으로 천천히 걷다가 면사무소 근처에 다다르자 길이 살짝 보이기 시작하면서 발걸음도 빨라진 것이다. 거의 다왔다는 안도를 하기 무섭게 면사무소 정문 앞에 놓인 중간 돌(섬 돌만한 두 개의 돌)을 보지 못하고 그만 걸려 넘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어이쿠 난 이제 죽었다.”는 생각뿐이었다. 음식을 제대로 배달하지 못하면 온갖 욕설과 매(구타)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지금도 수수께끼다.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배는 돌 위에 걸려 있었고, 두 팔은 오봉(쟁반)을 오롯이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탕수육은 약간이긴 하지만 그릇 밖으로 흩어졌고, 짬뽕 국물은 반쯤 쏟아졌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완전히 뒤집어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수습했다. 어느 정도 정리하여 숙직실로 들어서면서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다시 음식을 만들어오라시면 어쩌나?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나의 몰골을 본 숙직실 아저씨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차렸다. “아이고 꼬마야 오다가 넘어졌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니?” 하면서 밤늦게 배달을 시켜 이렇게 된 거라고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로 나를 달랬다. 바짝 긴장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지? 속으론 기쁘면서도 ‘세상에 이런 아저씨가 다 있네.’를 연발하며 도무지 의아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다리와 팔이 까진 채로 면사무소 숙직실을 나서면서 왠지 뿌듯함을 느꼈다.
세상에는 참으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 계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남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여 ‘배려할 줄 아는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이후, 난 사람들의 말투와 행동거지를 보기 시작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인지, 자기만 위하는 이기주의자인지를. 그런 영향인가?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노동자로 보인다. 음식 늦게 나온다고 투정하지 않으며, 서비스 받는 데서도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