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야인시대가 인기가 있다. 그 주인공인 김두한과 같은 시대인 일제치하와 해방된 조국에 살다간 위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 백범 김구 선생이 아닐까 생각된다. 백범은 일제침략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후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호를 '백범'이라고 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동포 모두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 만큼이나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구 선생은 조선시대 말 나라가 한창 어지러울 때에 황해도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는 무척 개구쟁이라서 말썽을 많이 부려서 부모님께 꾸중을 많이 듣고 매를 맞기도 하면서 자랐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서 정식으로 공부를 한 적이 없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며 열심히 공부를 해서 아홉 살 때에는 한글을 모두 깨쳤고 한문도 천자문 정도는 읽을 줄 알게 되었다.
김구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철이 들면서 남달리 글공부를 좋아했으며 그리고 언제나 바른 마음을 가지려고 애썼으며 옳다고 믿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는 정신을 길렀다. 훗날 왜구에게 짓밟힌 조국을 구하려는 뜨거운 애국심은 바로 이 정신에서 나왔던 것이다.
독립 운동을 한 죄로 감옥살이를 할 때 감옥의 마당을 쓸면서, 또 유리창을 닦으면서 우리나라 정부의 청소를 하고 우리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기도하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염원하였다. 김구 선생은 26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의 나라 땅을 헤매며 망명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까지 잃는 큰 슬픔을 겪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온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낮12시 일본 천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하였다. 36년간을 일제에 시달렸던 우리 동포들은 기뻐서 날뛰었다. 40대 초반에 조국을 떠났던 김구 선생은 70을 바라보는 나이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으나, 외세를 등에 업은 이승만의 조급한 권력야욕으로 1948년에 남한 단독 정부가 게 되자, 백범은 정치에서 손을 떼버렸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님은 안두희라는 한 지각이 없는 젊은이가 쏜 총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 얼마나 애통한 순간이던가.
인물로서의 백범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성과 애국심이라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봉사한 것이 영구히 그를 역사에 기릴 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백범의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민회 사건(105인사건)으로 일제에서 모두 17년형을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나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철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그는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성했다고 한다.
"저놈(왜경찰...)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을 바늘 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일지]
이러한 지극하고 지순한 나라사랑, 겨레사랑이 어찌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범의 인물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포용성'이라고 생각된다. 백범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라도 협상과 연합을 통하여 서로 포용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다. 임시정부 말기에 좌파 독립운동 단체들과 인물들을 포용하여 일제 패망 후의 좌우분열을 사전 방지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것은, 그의 인품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백범은 임시정부 말기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한 후 좌파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를 포용하여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해서 광복군을 통일군대로 만들었으며, 의정원에도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대표들을 야당의원으로 영입하여 의정원을 통일의회로 개편하였고, 임시 정부에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주석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대표로서 백범이 취임했지만 부주석에는 좌파 단체들을 대표하여 민족혁명당 위원장 김규식을 선임하였다. 백범이 광복 후에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도 이러한 백범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간 2000년 6월 15일은 아마 머지 않아 국사 교과서에 실리는 중요한 날로 기록될 것이고, 사람들은 이 날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전에 38선을 건너 김일성을 만나러 갔던 백범 김구 선생의 1948년 4월20일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해방후에 통일정부가 세워졌더라면, 그래서 김구 선생이 신생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치는 않았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부끄럽지 않고 또 세계사에 기여하는 문화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돌이켜 보아 그저 경제발전만을 자긍심의 원천으로 삼는 우리들이나, 그런 갈망에 부응하기 위해 국제경쟁력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백범 선생의 소망은 여
전히 교훈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김구 선생은 자신을 위한 삶보다는, '우리'를 위한 삶을 살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라고 당신의 삶이 소중하지 않으셨으랴! 하지만, 당신은 잘 알고 계셨던 것이 다. 어떤 삶이 더욱 더 가치로운 삶인지를....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을 쉰다. 아니, 무의미하게 숨을 쉬고 있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 앞의 이익만을 바라보며, 내 앞의 공부만을 바라보며 이렇게 서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과제를 통해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어차피 길이가 정해져 있는 인간의 삶이기에,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를 두고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느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