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부터 국내에는 ‘뉴에이지’라는 이름 아래, 일본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수많은 피아노 연주곡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한결 같은 정서의 사운드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반들이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이런 음악들이 한국인들의 정서에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이루마(24) 역시 그런 음악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시간 속에 묻혀가는 외로움, 행복했던 어느 가을의 기억, 맑은 하늘 아래로 내리는 비, 말하지 못한 사랑… 그의 음악을 들으면 이런 문장들이 떠오른다.
11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퍼셀 스쿨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클래식, 작곡을 공부, 영국 유수의 음악 페스티벌과 콘서트에 솔리스트로 참여하며 그 활동 반경을 넓혀온 이루마는 2001년 5월, 첫 번째 앨범 <Love Scene>을 발표하며 클래식 뮤지션이 아닌 대중 음악으로서의 프로 뮤지션의 길에 들어섰는데, 올 겨울 그가 두 번째 앨범 <First Love>를 발표했다. 전작에 비해 더욱 간결하고 세련된 선율을 자랑하는 본 앨범을 들으며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감성적인 피아노 연주자이기 때문에 말도 잘 안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며 활짝 웃는 이루마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생기 있는 청년이었다.]]
** 피아니스트로서 나는 너무 어리다.
@ 이름이 참 특이한 것 같아요.
네, 제 본명이예요. 저희 큰 누나가 ‘이루다’, 저희 작은 누나가 ‘이루지’예요. 작은 누나 이름은 그냥 들으면 예쁜데, 책에서 보면 꼭 안 좋은 말을 할 때 쓰여요. “이루지 못했다.” (웃음)
@ 2집 앨범 재킷에 사진이 정말 미소년처럼 나왔어요.
어휴, 창피해요. 병원에서 방금 나온 사람처럼 너무 창백하게 나왔어요. 그리고 저는 어려 보이는 게 싫어요. 빨리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어요. 흰 머리도 좀 나고… 그러면 사람들이 절 보면서 ‘아, 저 사람은 뭔가 좀 있어 보인다’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물론 나이가 들면 그만큼 음악에도 더욱 깊이가 있어지겠죠. 아무튼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아직 너무 어리고, 어리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약간의 선입견도 가지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하는 음악은 삶에 대한 어떤 이해가 필요한데, 아직 제 나이도 그렇고, 아는 척 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게다가 삶 자체도 크게 아팠다거나 괴로운 경험이 있었던 삶이 아니고… 그래서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녀요. 여행에서 많은 걸 느끼곤 하죠.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 주로 가는데, 그 곳에 가면 한국처럼 높은 산은 아니지만 언덕들이 꽤 많이 있고, 풍성한 나무들과 로마 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던 작은 돌길 같은 것도 있어요. 마치 옛난 시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요. 그 곳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음악적 영감을 얻기도 해요.
@ 사귀는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제 첫 번째 앨범이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에 만든 거였어요.
@ 여자 친구 앞에서 피아노를 치면 여자 친구가 이루마 씨한테 반할 것 같아요.
네, 그런데 입만 열면 가요. (웃음)
@ 실제로 피아노로 여자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아 본 적이 있나요?
몇 년 전에 한국에 잠시 왔을 때, 여자 친구가 피아노를 쳐달라고 하는데 칠 데가 마땅히 없었어요. 그래서 백화점의 악기 파는 곳에 갔죠. 거기서 몇 시간 전에 같이 봤던 영화의 주제가를 피아노로 쳐줬어요. 저는 연주할 때 피아노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다 치고 난 후에 여자 친구를 봤더니 “야… 사람들이 다 모였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정말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절 쳐다보고 있었어요. 가게 주인은 좀 더 쳐달라고 했지만 더 이상을 정말 창피해서 못하겠더라구요. 여자 친구랑 단둘이 있었으면 훨씬 더 많은 곡을 쳐줬을 텐데…
@ 어쩌다가 피아노를 시작했나요?
아주 어린 꼬마 때부터 피아노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의자와 피아노 사이에 텐트처럼 담요를 씌운 후에 그 안에서 ‘내 집’이라면서 놀기도 하고, 피아노 뚜껑 위에 쪼그리고 누워서 잔 적도 많아요. 그야말로 피아노가 제 장난감이었죠. 그 당시에 둘째 누나가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런 누나를 보면서 자연히 함께 피아노를 치게 됐어요.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건 다섯 살 때였어요.
@ 피아노가 지겨웠던 적은 없나요?
주입식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게 싫어서 여덟 살 때 몇 달 동안 학원에 안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 혼자서 피아노를 치면서 오히려 피아노가 더 많이 늘었어요. 아주 흔한 멜로디에 반주를 붙이다가 코드법 같은 것도 혼자 알아냈구요. 그 이후론 보통 하루에 열 시간 넘게 피아노를 치곤 했지만 피아노가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장난감을 사와도 피아노 위에 얹어놓고, 그 장난감을 바라보면서 피아노를 치곤 했죠.
** 피아노는 하나의 오케스트라…
@ 얼마 전에 조지 윈스턴과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은 뉴에이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뉴에이지란 명상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더 나아가 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신’의 부분에서 종교적인 문제가 생겨났죠. 그 때문에 ‘뉴에이지는 사탄의 음악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 역시 기독교인이지만, 어차피 신이 자연을 만든 것이고, 인간이 그 자연에 빠져서 음악을 하는 건데, 그걸 가지고 비판한다는 게 이해가 안돼요. 그리고 저 역시 뉴에이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뉴에이지라는 것 자체도 설명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많고, 뉴에이지 음악이라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이지 리스닝 계열의 쉽고 편안한 피아노 연주 음악을 하는 사람일 뿐이예요. 우리 나라에서는 ‘뉴에이지’라는 말에 대한 인실이 뭔가 잘못되어 잇는 것 같아요. 어느 날부터인가 클래식이 아닌 피아노 연주 음악을 통틀어서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부르게 되어버린 거죠.
@ 요즘 가장 관심이 가는 스타일의 음악이 있다면?
미국의 티펫(Tippet)이라는 작곡가는 ‘Prepared Piano(준비된 피아노)’라는 걸 만들었는데, 피아노 스트링 사이에다가 볼트도 끼워놓고, 지우개 같은 잡동사니들도 넣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거예요. 거의 타악기 소리가 나는데, 처음엔 음악만 듣고 이게 피아노 연주였다는 사실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존 케이지(John Cage)의 경우에는 <4분 33초>라는, 그야말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적막의 음악을 만들었어요. 피아노 앞에 않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객석에 않은 사람들의 헛기침 소리, 의자 삐걱이는 소리 같은 게 다 들려요. 그런 모든 소리가 음이 될 수 있다는 것 보여주는 아주 현대적인 음악이죠. 저도 어느 정도 음악적 연륜이 쌓이면 그렇게 색다르고 진보적인 음악을 하고 싶어요.
@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록음악 같은 건 안 듣나요?
물론 록도 좋아해요. 저는 영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브릿팝 계열의 음악을 많이 들었죠. 블러, 펄프, 특히 트래비스를 좋아해요.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과 그런 곡을 써서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었는데, 전 키보드였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구요. 빠밤빠밤~ 하고 치다가 가만히 앉아서 쉬고, 또 빠밤빠밤~. 연주라기보다는 하나의 효과음 같아서 싫었어요. 그리고 같이 연주해서 뭔가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도 좋지만, 저는 혼자서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 같아요.
@ 연주하면서 자신의 한계 같은 걸 느껴본 적은 없나요?
모든 연주자들에겐 자기의 한계가 분명히 있어요. 제 경우엔 손가락이 짧다는 핸디캡이 있어서, 연주할 때에 분명한 한계가 있죠. 저는 딱 한 옥타브에서 1도 정도를 더 칠 수 있는데, 영국 친구들은 제 손을 보고 제가 한 옥타브를 친다는 것 자체도 잘 안 믿어요. 그런 게 사실 심리적인 부분과 많은 관계가 있어요. 제 선생님께서 ‘자신이 이걸 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네 몸이 모두 릴랙스가 되고, 그렇게 해서 은연중에 치게 되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아무리 치기 힘든 것도 ‘에이, 이 정도는 잡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건반을 딱 잡으면 잡혀요. 아무튼 손이 작아서 클래식에 대곡을 치기 힘들다는 슬픔이 있긴 하지만, 대신 더욱 섬세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어요.
@ 피아노 연주자로서 피아노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피아노는 단 하나의 악기로 거의 모든 걸 소화해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피아노를 칠 때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는 느낌을 가져요.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피아노예요. 제 피아노에는 페달에 발톱 자국도 많이 나 있어요. 어릴 때부터 맨발로 피아노를 치곤 했거든요. 어릴 때는 페달까지 발이 안 닿으니까 자꾸 맨발로 페달을 문질렀는데, 한 번은 페달의 황동 때문에 발바닥이 시퍼렇게 된 적도 있었어요. 지금 영국에 있는 제 피아노는 저희 집 정원에 있어요. 정원에 큰 유리문이 달린 피아노 방을 만들었죠. 그 안에서 나무들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연주하다보면 많은 영감들이 떠올라요.
** 20년 후에는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오후 2시 쯤의 시간을 가장 좋아해요. 조용히 책을 읽는다든지 피아노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죠. 그 시간이 가장 조용한 것 같아요. 한국말을 잘 해야 한다고 해서 요즘은 한국 책을 많이 읽는데, ‘20대에 해야 할 50가지’, ‘소크라테스의 인생론’처럼 삶에 필요한 얘기를 담은 책들을 주로 읽어요. 이번 앨범에 실은 <Love Me>라는 곡도,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어떤 책의 글귀에 공감해서 만든 곡이예요.
@ 정말로 사랑이란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일까요?
제가 사랑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꼭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을 준다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주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사랑 받지 못하면 상처를 주고, 주는 사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준 사랑을 닮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 쉴 때도 피아노를 친다면, 그럴 때는 주로 어떤 곡들을 치나요?
제 곡을 치기도 하고, 좋아하는 곡들을 편곡하기도 해요. 이번 앨범에서 <Dream a Little Dream of Me>를 리메이크 했는데, 이 곡의 경우에도 ‘내가 가장 쉽게 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꿔보자’라고 생각하고 편곡한 곡이예요. 그 외에 가요도 많이 쳐요. 이은미, 이소라, 토이 같은 분들의 곡을 많이 쳤어요.
@ 한국 음악은 많이 들어봤나요?
영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 음악은 자주 접해왔어요. 우리 나라 뮤지션들 중에도 피아노를 잘 치는 분이 많이 계시는데, 특히 작곡가 김형석 씨가 피아노를 참 잘 치시는 것 같아요. 김광민 씨도 잘 치시고, 김건모 씨도 느낌이 바로 바로 전달되는 피아노를 치시죠. 김동률 씨의 피아노 연주도 좋아해요. 저도 나중에 가요 쪽의 일을 해보고 싶은데, 제 곡을 객원 가수들이 부르는 형식의 작업을 하고 싶어요.
@ 클래식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보통 대중 음악을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요?
저는 학창 시절 때에도 대중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부러웠어요. 아무리 클래식이 중요하다고 해도, 음악이 대중성을 띠지 못해서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겠죠. 그렇다고 클래식을 소홀히 하자는 얘기는 아니예요. 단지, 클래식만을 목적으로 공부를 하고 연주 활동을 한다면, 이 세상의 많은 클래식 전공자들은 모두 예전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쇼팽의 곡들만을 치고 있지 않을까요? 전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대중 음악을 선택했고, 그 중에서도 팝 뮤지션들이 조금을 꺼리는 연주 음악을 하게 된 거예요. 누군가가 하지 않으려는 것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에겐 참 행복한 일이거든요.
@ 2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세상에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데도 정말 여건이 안 돼서 음악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에게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20년 정도 후에 저는 시골에 들어가서, 아주 작은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싶어요.
@ 피아노 외에 자신을 대표할 만한 단어가 있다면?
‘백지’라고나 할까요? 흰 종이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앞으로 그 백지 위에 여러 가지를 써나가야겠죠. 그리고 ‘yellow’라고도 말하고 싶어요. 제 방이 노란색 줄무늬 벽지에 노란색 커튼으로 꾸며져 있거든요. 그 방 안에 아침 햇살이 들어오면 정말 따뜻하게 느껴지는데, 저도 그 빛처럼 다른 이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