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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月尾島)
2016.3.28 월미도에서.,중국인 관광객 6천명 치맥파티.
월미도
월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에 속했던 섬.
섬의 생김새가 반달 꼬리 모양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섬과 육지 사이가 메워졌고 가장 높은 곳은 월미산.
해발 108m이며 월미도 밑에는 그보다 작은 소월미도가 있다.
월미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1695년 숙종 비변사등록.
그당시 "어을미도"로 불렸으며 1656년 행궁을 지었는데
공사를 더 해야 하는데.,돈이 더 필요하다는.,이야기였다.
1708년 상소문에 강화도 피난길이 막혔을 때를 대비.
월미도까지 행궁을 만들고 피란로를 만들자고 하였다.
그리고, 월미도와 인천은 해상군사요충지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월미도는 조선시대.,군사 요충지.
그리고, 1708년부터 "월미도"로 지명이 바뀐듯 추정된다.
.
1970년대 초 서울에서 교외선 열차를 타고
가장 멀리 갈 수 있는.,데이트 명소였던.,인천.
지금도 월미도공원 일대는 연인들이 북적거린다.
반세기 전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인들이 즐겨 찾는.,데이트 명소.
'사랑의 섬' 월미도가 있는.,인천(仁川).
옛부터 전승되어오는 '인천 민요' 유희요(遊戱謠).
'달노래'·'달풀이노래' 등 주로 여성들의 음영민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천 달맞이 명소.,월미산공원.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달아
이태백이 죽은후에 누구로놀자 바라느냐.
산도좋고 물도 좋은데 초가삼칸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제물포 개항' 유적지.,월미도.
'인천상륙작전' 격적지.,월미도.
'대한민국 역사를 뒤바꾼.,월미도.
조선시대 개항기 전까지만 해도
면적 0.66㎢에 불과했던.,작은 섬.
월미도는 어떤 역사가 담긴 곳일까?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한 육계도.,월미도.
배를 타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게 된 섬이다.
월미도 바다 주변을 따라 조성된.,문화의 거리.
공연을 볼 수 있는 공연장도 있고
바다를 볼 수 있는 방파제도 있다.
유람선을 타면 인천대교를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으며
유람선에서 낙조도 볼 만 하다.
인천앞바다 갈매기는
새우깡 맛에 길들여져
"거지 갈매기"라 부른다.
물고기를 잡아먹을 생각은 없는듯
인천앞바다에서 유람선을 뒤쫓아다니며
여행객들이 손내미는 새우깡을 즐겨 먹는다.
'갈매기는
'새우깡'이
물고기보다
맛있는걸까?'
기록 상, 인천앞바다에는
유인도 40개, 무인도 113개.
현재, 육지화 된.,섬들도 많다.
그 중에 육속화 된 섬이.,월미도.
석축 제방공사로 육지화 된 섬이다.
서울 강남 잠실은 원래.,잠실도(蠶室島).
'뚝섬과 신천동' 사이 신천에 떠 있던.,섬.
1971년 '육속화' 물막이 공사 이후.,육지화.
19세기 구한 말, 제물포 개항기.
강대국 외세 각축장이던.,월미도.
.....................월미도(月尾島)..................
섬의 모양이 반달 꼬리처럼 휘어져 있어.,월미도.
1883년 인천 개항을 전후해 외세 각축장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장미섬(Rose Island)이라는 외국 명칭.
일제 강점기에는 군사기지로 사용되었고,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중요시되면서 미군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62년 석축제방 매립, 해안도로 건설 후 관광명소.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천항 방파제 주변시설물 정비.
시민의 휴식처와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너비 20m, 길이 0.8km
월미도의 해안도로를 따라
만남의 장, 교환의 장,
문화·예술의 장, 풍물의 장
등 4구간이 있고, 이 거리의
해안도로변에 각종 카페와 횟집.
.
또한, 바다 주변을 순회할 수 있는 유람선이 있고,
서해 낙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
각종 오락시설과 해수욕장·호텔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인천시민을 비롯한 수도권 시민의 관광지.
세관검역소· 측후소· 무선전화국 등이 있다.
면적 0.66㎢.,작은 섬.
최고지점.,월미산(94m)
................................
2001년 민간인에게 개방된 월미산.
월미공원에서 멋진 낙조를 즐길 수 있고
전망대에 올라 인천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인천은 2천년 역사를 간직한.,고대 도시.
비류(대륙)백제 및 온조백제의 산실이자
소서노가 창건했다는 '왜' 역사의 산실이다.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과부 소서노.
주몽과 결혼하여 고구려를 창건하고
그후, 남으로 백제를 창건하고 왜를 창건.
'고구려, 백제, 왜' 三國을 창건했다는 여걸.
.........인천(仁川) 지명의 유래.......
인천의 최초 명칭은.,미추홀(彌鄒忽).
소서노의 아들 비류(沸流)가 남하하여
비류백제의 도읍한 곳이라고 전해온다.
미추홀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한 시기는
475년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장수왕 때로
이곳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두었을 때부터이다.
현재, 인천광역시 도로명 흔적
미추홀로, 매소홀로, 소성로 등.
통일신라시대 경덕왕(742~765년)은
중앙집권적 통치국가의 완성을 위하여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인천의 지명도 한자로 바뀌어 소성현(邵城縣).
고려 숙종(1095~1105년) 때
숙종 어머니의 내향(內鄕)이라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후, 승격.
그뒤 인종(1122~1146년) 때에 인주(仁州)로 승격.
경원이씨(훗날 인주이씨)가 외척으로 번성한 때문.
1392년 조선 개국과 함께 인천은 다시 인주로 강등.
.
1413년 태종 13년에 지방제도의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의 수에 따라 부윤, 대도호부사,
목사 외에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하여 고을의 등급을 정했다.
이때 인주는 현재의 인천(仁川)으로 변경되었고
1413. 10. 15 이날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
.....................................................................
인천항은 서울의 관문이며
서해안 제일의 무역항이다.
제물포(濟物浦)는 물자가 건네지는 포구.
'제물포구락부'는 구한 말, 개항기 사교장.
월미도 제물포는 인천 개항기의 상징인 섬.
그리하여, 제물포는 인천을 대표하는 곳.
오늘날까지 인천은 "제물포"로도 불리운다.
월미도 제물포가 인천의 지명으로 불리운 것.
1883년(고종 20) 1월 일제강점기 때.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하여
조선에서 세번째로 강제 개항된.,무역항.
당시, 개항장은 제물량 일대의.,성창포.
성창포는 개항되기 이전부터.,항구로 이용.
조선 초, '제물포'로 호칭되면서 우리나라 유일
군항(軍港)으로 황해의 수비를 맡았던 군사요충지.
1884년 9월에서부터 제물포는
조선 제1항구로 개발되기 시작.
인천 유관기관들의 협력을 얻어
인천 상인단체의 출자를 통해 개발.
1895년1월., 제물포 사진 및 지도(호주 발행).
'인천의 관문' 월미도는 '외항선 선박지' 제물포.
제물포가 근대 무역항으로 면모를 갖춘 시기는
1906년 항만시설 개선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이며,
그뒤로 6년 동안에 걸쳐 계획된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1911∼1918'년 사이에는
동양에서 보기 드문 갑문식(閘門式) .
'제1선거' 건설 이후에 4,500톤급 선박들이 접안.
제물포는 연간 하역능력이 130만톤에 달하게 되었다.
그뒤 일본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8,000톤급 선박을 대상으로 하는 제2선거 건설을
1935년에 착공하였으나 1943년까지 물막이 공사와
안벽 기초공사 일부 등 30% 공정만이 진척되었을 뿐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내항 & 외항.
당시 인천항은 외항과 내항으로 구분.
외항인 월미도 서측 해면에는 항로를 겸한
'외항 묘박지(錨泊地) 29기'가 있어 대형 선박은
대부분 이곳 묘박지에서 해상 이중하역을 하고 있었다.
내항은 제1잔교 전면 정박지로
가용 면적은 0.5㎢ 에 불과하였고,
수심(水深)도 소형선이 정박할 정도.
6.25 전쟁 종전 후 인천항은
1974년 갑문 선거가 완공되면서
그해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인
‘내항 4부두’ 개장 등 항세가 급속히 성장했다.
2009년 전용 부두화 계획에 따라
제1.2.3.부두는 잡화·원목·철강·양곡부두,
제4부두는 컨테이너·양곡·자동차, 제5부두 자동차,
제6부두 잡화·기타, 제7부두 양곡, 제8부두 고철·산물(散物),
인천 남항 부두에는
바다낚시배들이 있다.
그뒤에는 화물하역 부두.
남항은
시멘트 조선를
전용 부두화하고,
양곡부두도 따로 있다.
북항 및 인천신항을 개발하여
부두별로 이용 효율화를 강화하고,
중소규모 화물에 대한 유통단지를 조성,
화물터미널 확보, 운송 수단의 대형화 및 전용화,
화물 정보시스템으로 항만과 내륙 화물유통체제 개선.
현재,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인근
영종도 외항선 선박지 건설 전까지는
'제물포 외항' 월미도는 대형 외항선 선박지.
현재, 월미도는 인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있다.
그 남쪽에 있는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
월미도는 '어을미도(얼미도~월미도)'에서 유래.
인천앞바다 '물이 휘감아 도는 형상'을 나타낸 것.
이 명칭은 숙종 34년(1708년)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
19세기 후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월미도 지명과 '월미 행궁' 위치를 표기.
월미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을 겪은 뒤.
청(淸)에 대한 북벌정책을 추진하던 효종7년(1656년),
월미도에 '국왕의 임시 거처' 행궁(行宮)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한양 도성을 비우고
피난간 '한양~김포~갑곶진~강화도 도피로'가
적에게 노출됨에 따라 강화도에 입도하지 못한 전철.
효종이 그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유사시 인천에서 '월미도~영종도' 경유하여
'초지진'을 거쳐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한 거처.
행궁(行宮)이기는 하지만
임시 거처나 다름 없는 행궁.
.........월미도 행궁..........
중구(中區) 북성동(北城洞)
월미산 동쪽 지봉(支峰)에서
남서쪽 해발 30m지점에 위치.
행궁 터는 인천상륙작전 집중포화로
황폐화된 뒤 지금까지 군부대 주둔지.
1680년 숙종 재위 초 월미도 행궁은
인천부사가 왕명을 받고 은밀히 건립.
행궁 내, 총 7동(28간) 건물이 있었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고종 때 철거.
..........................................................
조선시대 제물포에서 바라본.,월미도.
19세기 후반, 월미도는 중대한 국제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룬다.
첫번째가 1866년 병인양요로 프랑스 함대사령관이던 로즈 제독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즈'도(Rose Island)로 명명하고 해도에 기록.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군 함대는 'Rose land'를
목표로 침입했을 것으로 추정.
고종이 어려 흥선대원군이 섭정할 당시
조선 수군은 미군 함대에 강력하게 대응해
미군 함대 해병대가 겁먹고 도망칠 정도였다.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막강했던.,미 해병대.
흥선대원군이 섭정할 당시의 조선 수군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이 넘쳤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월미도에 숨었다가 간신히
영국선박 플라잉피시호를 타고 일본으로 도피.
1883년 개항지로서 인천의 제물포가
선택된 데에는 월미도가 있었기 때문.
월미도 정박지가 영종, 대부 등
여러 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풍랑 때 큰 파도가 칠 걱정 없던 곳.
또한, 대형 선박이
항상, 정박이 가능.
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는 썰물 때도
하나의 수로가 형성되어 있어 선박이 접안.
화물 등을 실어 나르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제물포 & 월미도는
곧, 순치(馴致)의 관계.
20세기에 접어들자 청일전쟁을 승리로 끝낸 일본은
한국을 장악하고 러시아을 제압하려 전쟁준비로 분주.
1891년 월미도에 이미 해군용 석탄 저장창고를 설치한 일본
러일전쟁 중 1904년 월미도를 군용지로 삼아 민가 등을 강제철거.
인천역과 월미도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여
소월미도에 양륙한 군용화물을 수송하였다.
이리하여 월미도는 병참기지가 되었고
러시아 함대를 기습 격침한 제물포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완전히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무렵, 월미도는
유명한.,관광 명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관광지로서,
'근대 100년사' 현장으로 월미도는 인천의 상징.
월미도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바닷물을 데워 목욕물로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有一)의 조탕(潮湯)을 개발한 곳이기기 때문.
특히,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월미도는
다른 공간과 변별되는 각별한 곳이었다.
월미도 및 인천에 대한 그들이 남긴 기록.
1892년 인천사정(仁川事情)
1931년 인천항(仁川港).
“살구나무가 많아 4월 꽃이 필 무렵
인천항에서 보면 일대가 붉은 노을 같다”
“봄에는 앵두꽃, 철쭉꽃이 아름답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신록에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저녁 풍경.
가을에는 단풍이 비단처럼 아름다운 사계의 풍광은
그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 1931 인천항 -
월미도에 위락시설이 등장한 계기는
인천 내항 갑문설치(1918)에서 찾을 수 있다.
한강에서 흘러오는 급한 물살을 막기 위해 북성지구
'(현 대한제분 앞)~월미도' 쪽으로 1km 2차선 둑길을 축조.
월미도가 유명세를 띤 것은 이 둑길을 완성 직후.
1923년 7월 10일 남만철도주식회사에서 '소형 해수풀'.
즉, '공동목욕탕'인 조탕(潮湯)을 개장하면서부터였다.
조탕(潮湯)의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지하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이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하는 목욕탕으로 해수탕(海水湯)을 말한다.
해수탕에 사용하는 암반수에는
각종 미네랄과 염화나트륨 등이 포함
건강 상으로 몸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러한 해수탕의 원조에 해당하는 것.
1920년대 월미도에 만들어진 조탕이다.
조탕 이외 위락시설은
월미도유원주식회사에서
직접 설비하고 관리하였다.
조탕
개장 당일 동아일보 1923년 11월 6일자 기사를 보면,
개장 첫날부터 500여 명이 찾아 성황을 이루는 등
1923년 조탕은 113일 동안 9천598명이 입장해
3만880원 매출, 1만원 순익을 내는데에 성공.
당시 전국에 널리 알려진 휴양지인 원산의 송도원,
부산의 해운대를 제치고 월미도와 조탕은 최고의 명소.
봄에는 월미도 순환도로에서 벚꽃놀이.
여름에는 해수욕장에 인파가 들끓었다.
1918년 풍치지구 지정된 데서 힘입은 것.
해수욕장에는 여관, 대여 별장, 간이식당, 매점,
해수욕장, 보트 대여 등이 있어 서울에서도 찾았다.
이른바, 오늘날에 비하면 콘도시설을 갖춘 형태였다.
특히, 벚꽃이 피는 4월이면
철도국에서는 행락객을 위한
경인 화열차花列車)를 특별 운행.
1925년 8월 30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심지어 조탕에 사람이 운집하다보니
유실물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과 언론이
나서기도 했다는 내용이 기사화 할 정도.
조탕과 월미도는
1924년 월미도유원주식회사
인수 이후 본격적으로 영리 목적의
시설물 확충되어 대규모 유원지로 변모.
1927년에는 60평 규모의 홀을 확충했고,
이어 해변에 대형 풀(pool) 등 각종 시설.
물놀이에 지친 아이들의 놀이터에는
미끄럼틀, 철봉, 그네, 씨름장이 있었다.
게다가 원숭이, 사슴, 노루 등
진기한 동물들을 구경하는 공간.
1935년 6월 3층 목조건물 빈(濱)호텔을 건립.
1936년 밀물 때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용궁각(龍宮閣) 일본식 요정도 세웠다.
이에 따라 개장 초 9만5천여 명이었던 관광객이
1935년 12만5천 명으로 증가, 일본 패망 때까지
월미도와 조탕은 근 2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으나
광복 후, 일본 자본이 철수하면서 영업이 중단된다.
1949년 월미도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재개장한 월미도 조탕은 주말에 2천여 명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지만 이듬해 전쟁으로 폐허.
그후
월미도는
미군기지로,
해군기지였다가
월미공원으로 개방.
용궁각과 조탕 부지는
흔적 없이 매축이 된다.
신문자료와 일문(日文)자료의 일부분에서
월미도의 조탕과 관련된 기록을 엮어보았다.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건데 월미도는
일제 때 인천 인근에서도 각광을 받던 공간.
해수탕, 해수욕장, 호텔, 여관, 대여 별장,
간이식당, 매점, 대여 보트, 아이들 놀이터,
원숭이, 사슴, 노루 등은 당시 색다른 공간.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출처: 기호일보 2008년3월11일자
기사 및 굿모닝인천 2010년 2월호.
월미도는 면적 0.7㎦로
월미산 정상이 해발 105m.
옛날에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섬 모양이 남북으로 긴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월미도(月尾島)'.
월미도는 개항 이전까지는 한가한 어촌에 불과했다.
월미도는 조선시대 한양 경비의 요충지가 되었고,
개항기 외국인들이 조선에 머무는 첫 기착지가 인천.
1880년 제물포(현재, 인천)에서 바라본.,월미도(月尾島)
...........................제물포........................
조선시대 인천 중구 해안에 있었던 포구(浦口).
본래 고구려 미추홀현(彌趨忽縣, 또는 彌鄒忽縣),
백제가 점령한 뒤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다.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까지
100년간 중국 동진. 송, 북위와 내왕하는 근거지.
고려시대 서.남해지역과 개성을 잇는 해상교통 요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문학산성 & 계양산성(桂陽山城) 수축.
조선시대 제물진(濟物鎭)이 설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다.
효종 재위 때 강화도로 제물진을 이전.
효종이 북벌계획을 수립할 때
'제물포~강화도' 간 수로를 개척하여
월미도에 유사시 왕이 머물 행궁을 지었으며,
제물량(濟物梁)에 수륙 양군을 배치하고 배2척을 대기
제물량은 한양과 잇는 중림도(重林道)의 종착역
제물포는 영종도를 연결하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
이곳은 특히, 삼남지방에서
조운선이 한강 진입 전.,정박지.
이곳 제물포에는 원(院)이 있었다.
제물포의 지명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는 ‘거친 들판(맷골)’,
‘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뜻말을 갖고 있다.
제물포는 1876년(고종 13)의 강화도조약과
1882년 제물포조약 체결 뒤 개항장으로 변모.
1883년 일본조계(日本租界)가 설치된 뒤
이듬해에는 청국조계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15만평 지역에 설치되었다.
이로 인하여 북성포(北城浦) 일대의
포대(砲臺)와 토둔(土屯), 응봉산(應峰山)의
토둔과 망루(望樓) 및 민가(民家) 40여 채가 철거.
1913년 조계제도가 철폐된 뒤 1914년인천부로 승격하였다.
이로써 조선 말 인천도호부가 인천과 부천군으로 나눠진 것.
1968년제물포 지역이 중구로 변경,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인천광역시 관할에 남게 되었다.
.....................................................
월미도는 외국의 근대 문물이 들어 오는 관문으로서
한가한 섬에서 깨어나 근대화 영향을 받는 섬이 된다.
즉,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처럼 국제항으로 발돋음 시작.
.
월미도(제물포)가 인천과 육지로 연결된.,1906년.
처음에는 목교(木橋)였다가 1918년 제방둑길로 축조
해방 전 월미도를 경인지역 최대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해양경비대' 기지가 되어
한국인의 출입이 통제되더니, 6.25 한국전쟁 시에는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이 되어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월미도의 제방둑길에 있는 큰배 접안시설에
상륙지점을 만들기 위해서., 월미도 사전폭격.
인천상륙작전 이전엔 관광 위락단지.,월미도.
그후로 월미도는 다시 군부대의 주둔지가 되어
그후부터 민간인 출입이 50여년간 통제되었던 섬.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D-day에 앞서
'원산폭격'을 가하며, '동해안 상륙작전 계획'
정보를 흘려 북한군의 병력을 동해안으로 분산.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총공세.
남한의 운명은 '풍전등화'
그무렵, D-day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전개.
북한은 9월 14일 뒤늦게 그 사실을 간파했지만
분산된 병력을 인천으로 집결시키기에는 늦었다.
인천상륙작전 미군 함대에 탑선한
미해병대원들은 최첨단 무기를 보유.
일본 전지훈련 후, 인천앞바다로 진격.
속전속결 작전계획과
최첨단 군사장비를 보유.
북한군 전선 허리를 끊고
북한군 측의 허(虛)를 찌르는
인천상륙으로 대반격 작전을 전개.
D- day - 1950년 9월 15일,
인천앞바다 밀물이 만조일때
밀물처럼 인천상륙작전을 전개.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상륙 지점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폭격기들의 사전 맹폭격.
월미도 제방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미 해병대원들이 상륙작전을 전개.
미 해병대가 먼저 월미도를 장악 후,
미군 함정들이 월미도 선착장에 진입.
군함에 싣고 온
무기와 보급물자를
하역하는 동안 한편으로
군수물자 수송로를 닦으면서
전략 상으로, 속전속결을 위한
전초작업을 겸한.,속도전(速度戰).
일본에서 이미 사전에 전지훈련을 했기에
인천상륙장전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북한군이 분산된 병력을 집결 시킬
단, 하루의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치밀한 사전계획 아래 속도전을 편 것.
월미도 인천상륙작전은
단.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
전광석화 같았던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1950년 6.25 남침한 북한의 적화야욕의 꿈은
한풀 꺾였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은 수복된다.
.
인천상륙작전 한미연합군 총사령관이자
한국전쟁 중 연합군 사령관인.,맥아더 장군.
대한민국 역사 상에서, 길이 기억해야 할 위인.
.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남침 후
인천지역에 대한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해 6.25전쟁을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1950년 6월 29일 서울 함락.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맥아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 시찰, 복귀 직후
1950년 7월 첫주에 참모장 알몬드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된다.
이 계획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의 ‘블루하츠(Blue Hearts)’ 작전.
이에 따라 그는 미 지상군 참전이 결정된 나흘 뒤에
이미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으로 7월 하순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할 수 있도록.,상륙훈련을 지시.
7월 4일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상륙작전 공식회의가 처음 소집.
'블루하츠' 계획은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를 기도.
작전일자를 7월 22일로 했으나 북한군 남진을 저지할
유엔군의 병력 부족으로 7월 10일 경에 무산되었다.
이후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된다.
'블루하츠'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
결국,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 초안이
7월 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100-B, 작전 100-C,
작전 100-D의 세 가지 안(案)을 제출하였다.
작전 100-B는 인천상륙.
작전 100-C는 군산상륙,
작전 100-D는 주문진상륙.
.
결국, 작전 100-B가 채택되었고,
잠정적 D-Day는 9월 15일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 상 상륙하기 늦은 시기라 9월 15일로 결정.
맥아더는 상륙작전 확정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한다.
8월 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제1해병사단 & 제7보병사단.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 장교들 및 기간요원 차출.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청년 8,천명 선발.
그들을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카투사(KATUSA)의 시초였다.
한편, 국군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계획은
9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된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해 관련 정보 확보.
당시,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소속 4백명과
제918해안포연대는 방어를 수행 명령.
.
당시,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임무를 담당.
미 제10군단은 북한군 인천 병력을 천명으로 추산.
인천상륙작전 개시에 앞서 상륙부대는 양동작전 전개.
즉, 9월 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
'상륙작전 가능 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9월 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시작.
한편, 9월 12일부터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하기 위한 폭격이 시작.
한편,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명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02:00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고,
제2단계는 인천해안 교두보 확보.
제1단계 작전은 미 해군이 함포사격
그동안에 미 해병연대가 상륙하였다.
제2단계는 후속 부대들이
서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시가지 작전을 전개한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손쉽게
영흥도 등 교두보를 확보.
9월 16일 미 해병사단이 전진교두보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진격작전의 토대를 마련할 때까지
총 손실은 매우 미미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 계기를 조성.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인천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하게된 것.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향상.
북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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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88년 11월 9일 응봉산을 공원으로 조성 후
'각국공원', '서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리웠다.
만국공원이라 한 것은 서양사람들이 살던
조계지(稠界地)인 만국지계(萬國之界)안에
만든 것이라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부른 것.
6.25가 발발하자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서
대승한 UN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이라 개칭.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우뚝서서
인천상륙작전을 하던 서해 바다를 응시.
그 뒤에 참모들과 함께 바다를 걸어
인천으로 오는 모습의 동판도 있다.
이 자리는 원래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세창양행'(독일 무역회사)의 사택이 있던 곳.
맥아더 랜드마크 마도로스 담배파이프
그 부근에 대형 조각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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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육계도.,월미도.
월미도가 육속화하기 전., 섬의 둘레는 1㎞,
육지와 1㎞ 남짓 떨어져있던 아담한 섬이었다.
남쪽에는 소월미도가 있었다.
소월미도와 더불어 인천 내항의
북서쪽 방파제 역할을 한.,월미도
6. 25 이전에 인천은 북한군과 싸워
노획한 따발총 같은 무기를 전시하면서
국군 위용을 자랑하는 전시회가 자주 열렸다.
" 이 대통령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우리 국군은 북진하여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 물을 떠서
밥을 해서 먹으며 백산에 태국기를 꽂겠습니다."
그러다가, 북괴가 남침해 오자
아침은 수원에서,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대구에서 먹는.,격이 되었다.
그만큼 당시 위정자들은
북한을 너무나 몰랐던 것.
...........월미도 지명의 유래............
어을미도(漁乙未島), 어을미도(於乙味島),
어미도(於味島), 얼미도(突尾島), 얼도(突島),
월성(月星), 제물도(濟物島) 등으로도 불리운다.
만조 때 바다로 둘러싸인 공간을 섬이라 하지만,
월미도는 1920년대 돌축대를 통해.,연육이 되었다.
월미도 역사, 지명이 인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얼은 ‘얼다’ 곧 ‘사랑하다’, ‘어르다’의 의미이고,
‘미’는 물이 어르고 휘감아 돌며 섞인다.'는 의미.
한말에 ‘Rose Island’로 외국에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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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월미도는 인천도호부 관할
1653년(효종 4) 용종진에 편입된다.
조선 후기에 행궁이 설치되었고,
행궁은 존속기간 내내 영종진 관할.
월미도 행궁은 18세기 전반까지 유지
총독정치 시작되면서 풍치지구.
월미도 중턱에 순환도로를 축조.
철도국에서 목욕탕을 개설
일본 요정인 용궁각(龍宮閣),
호텔, 동물원, 하계야영 캠프촌 등
인천 임해유원지로서 명소가 되었다.
1922년 석축제도를 축조하여 월미도는 육속화.
1920년대 후반부터 15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월미도.
태평양전쟁 &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이 초토화된다.
월미도는 인천개항 전후에 외세의 각축장이 된다.
일제 한때(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군사기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전초기지, 그뒤 미군용지.
2001년 6월 26일 문화관광부가
월미관광특구 지정의 일환으로
월미도 문화의 거리내 친수공간
확장과 월미산을 개방하기로 했다.
1980년 이후 관광지가 조성되어
각종 위락시설과 해수욕장· 호텔 등.
1989년부터 꾸며진 문화의 거리에는
월미축제로 시민의 문화의식 고취와
지방예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근의 놀이공원과 함께 각광을 받는 곳.
2001년 6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고,
거리의 길이는 770m, 폭은 20m이다.
이 거리 끝지점에 바다로 난 길이 있다.
문화의 거리.,오른쪽으로는 바닷가,
왼쪽으로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다.
매년 ‘월미관광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월미관광문화축제 중에 풍어제,
인천근해 갯가 노래, 뱃노래, 은율탈춤,
국악제 등 전통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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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 후, 1902년 인천에 있던 17개 요릿집.
일본인들이 800엔씩 출자해 중구 신흥시장 입구에
‘부도루(敷島樓)’ 유곽 개업이 옐로우 하우스의 기원.
인천 개항기.,유곽 부도정(敷島町).
8.15 광복 후 선화동으로 지명이 바뀐다.
1961년 5·16 군사정부는 유곽을 이전 조치.
유곽 업주들은 당시 바다와 접해있던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일대로 이주.
1961년 9월부터 건물을 짓도록 하였고
1962년 3월 이주 완료된.,옐로우 하우스
업소마다 '1호~ 33'호까지 번호를 붙여 구분
단, 4호, 14호, 24호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옐로우 하우스는 종사자들이 단칸방을 무료 임차.
업주와 ‘영업 수입’의 50%를 나눠 갖는 방식으로 운영.
옐로우 하우스 내에는 종사자들을 위한 상담소도 설치.
'2012년 2월 ~2016년 2월 현재'.,옐로우 하우스 철거 중.
옐로우 하우스는 인천 개항 후인 1902년,
신흥시장 일대 부도 유곽(敷島遊廓)이 전신.
인천국제항 외항선 선원들이 객고를 푸는 곳.
인천 자유무역항 내에
무(無) 비자 구역을 설정.
이전 조치 후, 철거가 바람직.
인천 개항기 월미도.
‘부도루(敷島樓)’ 유곽,
그 '롤 모델'.,암스텔담 항.
네델란드 국제무역항 암스텔담.
'유리의 집' 홍등가와 유사한 형태.
전세계 국제무역항 어디나 이와 유사.
원래, 암스텔담 항은
'외항선' 마도로스들이
오랜 항해에 시달린 후에
객고(客苦)를 푸는.,유리의집.
12세기 경, 암스텔강에 둑을 쌓아
도시가 건설되며 번창하게 된.,거리.
약 700년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
매춘이 합법화 되어 있는.,거리.
'유리의 집'에서는 세금계산서 발행.
'유리 창문 하나마다 1인 사업장.,거리.
특히, 유럽에서도 자전거를 타는 인구가 많고
마약 합법화와 홍등가를 관광화 시킨.,암스텔담.
월미도 '제물포 개화기' 당시 '롤 모델'. 항구 도시.
약 700년 네델란드 수도
'암스텔담'의 해양정책을
집약적으로 볼 수 있는 도시.
.....암스텔담.......
낭만적인 운하 165.
그 위에 놓여있는 다리 1281.
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자전거 80만,
'유리의집' 색다른 밤거리 & 꽃시장들.
홍수에 대비해 암스텔 강에 둑을 쌓고,
1270년 둑 사이에 암스텔 댐을 지었다.
17세기 중반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되고
네덜란드 도매· 공업 중심지로 성장한 것.
암스텔담 중세 지역은 암스텔강 양쪽 댐 안.
옛 건축물로는 13세기 성당 15세기 신교회,
로얄 궁전, 민트 탑, 웨스트 사원 등이 있다.
옛 유대인 구역에는 포르투갈 유대인 교회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렘브란트 저택이 있다.
도심 남서쪽 17km에., '스히폴 국제공항'이 있다.
도심은 90개 섬과
400개 다리로.,구성.
운하의 물길에는 유람선과 배들이 다니고
자전거는 암스텔담 시민들의 대중교통 수단.
전차, 자동차, 말탄 기마 경찰들이 도심을 왕래.
박물관 50, 거의 매일마다 열리는 음악회.
연극 등 무엇을 선택할지 모를만큼 문화행사.
암스텔담에서는 많은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가게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관람.
역사적인 건물이나 유적지가 많아
지루하다고 느껴질 시간은 전혀 없다.
담 스퀘어 광장에는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놀고
전세계 히피족, 짚시들의 음악의 향연이 벌어진다.
도심을 Y자로 흐르는 암스텔 강을 막으려 댐을 건설.
그 주위에는 고풍스런 왕궁과 성당,
두 마리 사자가 지키는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위령탑이 우람하게 우뚝 솟아 있다.
암스테르담에는 이 위령탑
외 두개의 유명한 탑이 있다.
하나는 28개 종으로 만든 음악이 흐르는 ‘문트 탑’(첨탑),
또 하나는 바다로 나간 남편들을 울며 배웅했던 ‘눈물의 탑’
문트 탑은 꽃시장 부근이고, 눈물의 탑은 중앙역 인근에 있다.
담 스퀘어 광장을 지나
화려한 건물들을 지나치면
어느새 중앙역 광장에 이른다.
부채 꼴 운하가 역사 앞으로 펼쳐지고
운하 건너편에는 ‘눈물의 탑’ 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바다에 잠겨
'눈물의 탑'이라고 명명되었을까?
‘눈물의 탑 ’
'안네 프랑크의 집’
'고흐미술관'이 있는 거리.
인간 고흐! 그림이 배우고 싶어
유명한 화가 쥘 브르통을 찾아서
100여km를 허기진 배를 움켜지며
걸어갔다는 청년시절 빈센트 반 고흐.
그때 그가 신었던 혓바닥이 널름거리도록
헤진 구두를 그린 그림이., ‘한 켤레의 구두.’
구두를 살 돈이 없어 맨발로 걸었던 청년 고흐.
그를 생각하며 관광객들이 찾는 고흐 미술관.
담 스퀘어 광장과 중앙역 사이.,운하의 거리들.
'눈물의 바다' 해안에는 7개 정도 풍차가 남아있다.
한때 700 풍차가 돌던 마을.
암스텔담 항 '눈물의 바다'에는
수평선 너머 삼겹 방파제가 있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한겹.
그리고, 그 넘어로 또.,한겹.
그리고 또 그 넘어로 또.,한겹.
세 겹이 있다고 하지만
워낙 먼 바다 밖에 있기에
해안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해수면보다 저지대가 절반이었던.,암스텔담.
풍차로 바다물을 삼겹 방파제 밖으로 퍼낸 것.
기계화에 밀려 지금은 7개 풍차만 관광 상품용도.
이곳 풍차마을에서는
치즈 공장도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알크마르행 기차를 타고
kooZzzndijid 역에서 내려
Zaanse Schans 표지판 따라
20분 남짓 걸어가면.,'눈물의 바다.'
"신에게 저주 받아
버림 받았던 저지대를
인간의 힘으로 건져 냈다."
암스텔담에 가면
'네델란드 현지인'인
운하 유람선 가이드가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다.
저지대 흙을 퍼내 운하를 만들고
퍼낸 흙으로 간척공사로 도시를 확장.
운하를 물길로 제방 좌우에 거리를 조성.
현재, 네델란드 암스테르담.,관광 명소들.
네델란드를 찾는 외국의 관광객들은 누구나
한번쯤 들러 이 거리를 걷는 명소들이기도 하다.
'1883년 구한 말, 인천 개항지.,제물포.
그 곁에 월미도가 있어 개항지가 되었다.
그당시, 롤 모델은 네델란드 수도 '암스텔담'.
덧 말.
'월미도 개항지'로 출발한.,제물포.
그로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송도 국제경제 자유구역으로 확장.
현재, 송도국제도시 혹은 송도경제자유구역.
인천국제공항 인프라를 배후로 한.,경제자유구역.
약 40조원 민간자본이 투자한.,세계 최대의 도시개발.
1990년대부터 본격 개발이 시작된
상하이, 싱가폴, 두바이 등 도시들의
국제도시 개발 토대가.,'롤 모델.,플랜.'
'2003~2020'년까지 인천 연수구와 남동구
해안에 여의도 12배 55km²를 매립해 도시 개발.
현재도 간척은 진행 중인 송도국제업무지구 개발.
게일 인터내셔널(Gale International) & 포스코가 진행.
도시 마스터 플랜은
콘 페더슨 폭스(KPF)
뉴욕 사무소에서.,설계.
송도는 전국의 8대 경제자유구역 중
10년동안 단연 외투 실적 1위를 유지.
8대 경제자유구역 외자 유치금 중에서 95%.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이 홀로 일궈낸 투자.
전국의 경제자유구역 중 가장 월등한 투자 성과.
'송도 센트럴파크' 롤 모델은.,미국의 시카고.
미국 '오대호~미시시피강' 육로 수송지.,시카고.
뉴욕, 로스앤젤레스에 이어.,미국의 3대 도시이다.
시카고는 현재, 인구 250만명.
'시카고 랜드' 950만 중심 도시.
미국 '시카고'를.,롤 모델로
건설 된.,'송도 센트럴 파크'.
인천앞바다 도서지역을
국제적인 해양관광단지로
동아시아 물류 운송 수송지로
개발하려는 사전 포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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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같은 호수 5.'.,오대호.
오대호 면적은.,24만 4,940㎢
우리나라 남북한 면적보다 넓다.
남한 면적(99.720㎢)
북한 면적(123.138㎢)
우리나라(22만2.858㎢)
서해 면적(40만4,000㎢),
서해 남북 길이 1,000㎞,
서해 동서 길이 700㎞.
......................
......................
2016년 현재, 미국 NBC 유니버셜 본사에서는
미국 LA '디즈니 랜드' 유사한.,'테마 파크' 및
'송도 유니버셜 스튜디오.' 건설 플랜을 추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