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 쪽으로 바람이 불면 친구와 버스를 탄다
안철수
온통 유리벽이 반짝거리는 새 빌딩 사이로 버스가 들어간다
나는 어떻게 하면 계단을 팔 수 있을까 생각하고 친구는 어떻게 하면 계단을 살 수 있을지 궁리한다
바람이 불어오면 친구와 나는 버스를 타고 링 위에 오른다
멀티플렉스,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친구가 주인공을 걷어차면서 시작하는 영화 속 주인공은 화가 나서 계단을 부쉈다 나는 영화 속 친구를 부쉈고 관객이 나를 부숴버렸다 빌딩 위에서 영화가 폭탄처럼 터지며 엔딩 자막이 오른다
더는 팔 수 없었다 소음이 쌓인 계단을 잊으려 헤드폰이 귀를 없애고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버스 창에 기댄다
창은 유리 천장과 닮아서 손을 뻗어서는 닿을 수 없는 구름 위 펜트하우스다
친구는 펜트하우스가 있는 주인공을 쫓아 총알택시를 탔고 나는 가끔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방향 반대쪽에서 애인의 손을 잡고 멀티플렉스를 찾아가는 것을 택했다
바람은 불어야 좋은 건지 멀어지는 계단과 각자 따로 놀면 쉽게 지치는 불빛들
계단을 없애자 링 줄이 끊어졌다
바람은 새 버스를 기다렸다 나는 바람을 기다리고 친구는 나를 기다린다
버스는 떠나고 유리빌딩은 사라졌다
ㅡ 《문예바다》(2024,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