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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 놓지 않으리라
로마서 8:31-37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님의 부활을 맞아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인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두 달 새 우리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코로나19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왕관 모양의 바이러스인데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다행히 코로나19가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방역으로 바뀌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날도 멀지 않을 것 같다. 곧 안전하고 평화롭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고 싶다. 모두 기도와 준비를 바란다.
평소 우리가 안도할 때에도 위기와 위험은 일상화 되어 있었다. 6년 전 세월호 사건이 대표적이다. 며칠 전에 4.16합창단으로부터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이란 책과 CD를 보내왔다. 지난해에 미국 공연을 추진한다기에 미국에서 온 관계자와 함께 지휘자와 학부모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색동교회 이름으로 작은 후원을 했더니 잊지 않고 이번 부활절에 ‘고마운 분께’라며 엽서를 써서 보내온 것이다. 나도 답례하는 마음으로 4월 16일 오전에 목사님 한 분과 동행하여 안산 단원고에 다녀왔다. 마침 11시에 교직원과 재학생의 추모행사가 열려 동참하였다. 예정에 없는 일이었는데, 노란 리본 다는 일에도 함께 하면서 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세월, 희생자 가족에게 위로와 공감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일로 마음의 큰 빚이 남아있다. 우리 사회와 삶의 공동체는 생각이 다양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긍휼은 마음의 진정성이고, 우리 공동체를 따듯하게 한다.
내 자녀와, 부부 간에, 그리고 격리된 채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와 이웃에게 그런 따듯한 위로와 격려로 서로 보듬는 부활절기가 되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한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마음으로 위로해 주셨다. 피 묻은 두 손으로 제자들의 슬픔을 만져 주셨다. 마침내 주님은 절망과 두려움을 이길 평화의 소식을 전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선한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 주신다. 세 번이나 반복해 ‘평화의 인사’를 하심으로써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 삶의 평강, 공동체의 평화를 약속하신다. 그래서 부활의 증인된 그리스도인은 모두 평화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
또한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위로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내 믿음이 연약하고, 내 삶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공동체가 위기와 위험에 처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라고 하신다. 내가 선한 목자로서 너희의 손을 붙잡아 주시겠다는 것이다. 손을 놓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다. 죽음에서 승리를 선언하는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인간의 삶은 늘 재난 상황과 같다. 요즘 코로나19로 세계인이 겪는 위기는 대한민국이 맞은 위기 이후 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이런 하소연과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이를 비유하길 마치 도살당한 양과 같은 신세라는 것이다. 양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다. 그러나 나쁜 목자는 양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못 본 체한다. 그 양들의 두려움은 얼마나 클까? 삯꾼 목자의 관심은 양이 아니라 이익이다. 그래서 제 이기심에 따라 언제든지 양을 버리고 달아날 수 있다.
구약 예언서는 그런 악한 목자, 악한 임금을 이렇게 비유한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3-4).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과연 목자 중에서 누가 양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는 말인가? 과연 임금 중에서 누가 백성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친다는 말인가?
선한 목자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이해이고, 최상의 표현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2)
초대 교회의 피난지인 카타콤은 로마의 지하 무덤이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무덤 굴로 들어와 거주 하였다. 지하세계에 층층이 미로를 뚫고 스스로 닫힌 세상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과연 어떤 희망으로 살았을까?
지하 벽에 새겨진 심볼을 보면 그들의 희망을 엿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선한 목자’그림이다. 수염이 없는 젊은 목동이 털이 많은 양 한 마리를 등에 지고 있다. 그들은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 속, 길 잃은 양 한 마리조차 찾으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선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으신다. 우리 안에 든 양뿐 아니라, 우리 밖으로 나간 양을 찾으신다. 예수님은 이 양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악한 목자는 손을 뿌리치지만, 선한 목자는 붙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신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목자 아래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구원과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능해 진 것이다. 선한 목자의 목숨을 건 희생의 결과요, 그 열매였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99마리의 양을 잘 먹이기 위해서는 한 마리의 양을 쉽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을 고려해 손을 뿌리칠 때는 과감히 뿌리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방식도 아니고, 교회의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바로 길 잃은 내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발견된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 주셨다. 신앙은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주님의 눈동자가 나를 살펴주셨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 비유를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러나 사람들은 이 비유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요 10:6). 그래서 이 선한 목자 비유를 수수께끼 말씀이라고 부른다.
양들은 길을 잘 잃는 경향이 있다. 양이 고의적으로 잘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앞에 보이는 풀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로 가는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쉽게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 누구나 쉽게 길을 잃고, 주님의 은혜와 멀어지고, 어느새 죄와 사망의 낭떠러지에 설 수 있다. 순간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으시는 것은 그 양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기 위함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내미신다.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걸었듯이, 우리 공동체는 삶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따듯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내가 손 놓지 않으리라’는 목자의 선한 의지와 사랑으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상처를 보듬기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한다.
3)
내게 책과 CD를 보내준 4.16 합창단은 자신들이 슬픔 중에도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세월호에 탄 아이들이 노래를 좋아했다고 하였다. 그 또래는 얼마나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할 나이인가? 부모들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큼은 내 자녀가 함께 있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다.
최근에 집에서 ‘the 33’이란 영화를 보았다. 어느새 10년을 맞은 칠레 광부 33명의 구조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영화였다. 그 영화의 감동은 영웅주의 때문이 아니다. 광부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고 구조하려는 손 놓지 않으려는 인간애 때문이다. 광산 경영주나, 정부의 노력 이전에, 한 인간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인간애의 문제였다.
2010년 칠레 산호세 광산의 내부 붕괴로 광부 33명이 고립되었다. 광부 33명이 지하 700여 밑에서 아직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 17일 만에 시추봉 끝에 붙어 나온 메모로 전달되었다. 구출 작업은 세계적 관심사였다. 그리고 69일째 되는 날, 한 사람씩 끌어 올려 33인 모두를 살려냈다.
그들의 생환 소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큰 감동을 주었다. 칠레는 자기 국민에 대한 생명의 존귀함, 생명의 소중함을 온 세계에 과시하였다.
그 폐쇄된 공간, 희망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33명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죽음의 막장에 갇힌 광부들은 공동체를 유지하였고, 리더의 말을 따랐고, 질서 있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리고 시간을 정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는 인격적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을 알고”(요 10:14) 계신다고 하였다. 흔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내 목소리로 그 분을 부른다면, 선한 목자는 언제든 우리를 돌이키시고, 찾으시며, 구원하신다.
심지어 예수님은 목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스스로 양이 되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은 우리의 삶의 위기를 다 아신다. 그러므로 평생 선한 목자 안에 머물라.
성경에서 가장 많은 고백은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로마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죄인조차 의롭다고 여기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자녀가 된 우리에게 더 이상 사망과 생명, 영적이나 육적인 권세, 현재와 장래 그 어느 것도 위협적이지 않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으신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권세도 우리를 하나님 사랑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넉넉히 이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한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지켜주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가장 분명한 근거를 대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내가 손 놓지 않으리라.’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곤경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극한 상황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니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의 돌보심을 구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생명, 소중한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끝에서, 나를 위해 먼저 목숨을 버릴 위대한 선한 목자이시다. 목자는 어린 양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신다.
위험한 세상이지만 위기 앞에서도 선한 목자의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길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첫댓글 죽음의 막장에 갇힌 광부들은 공동체를 유지하였고, 리더의 말을 따랐고, 질서 있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리고 시간을 정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 2010년 칠레의 산호세 광산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어서 오늘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