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가장 성공한 시리즈는 <해리 포터>
흥행수익 44억7천만달러 기록해 007 시리즈 제치고 프랜차이즈 흥행 1위에 올라
프랜차이즈의 넘버 원이 바뀌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는 9월7일 <해리 포터> 시리즈가 흥행 수익 44억7천만달러를 기록해 프랜차이즈 흥행 선두에 올랐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1위였던 작품은 007 시리즈. 1962년 첫편을 선보여 2006년 개봉한 <007 카지노 로얄>까지 총 22편이 44억4천만달러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이 수치는 비공식적인 ‘본드 시리즈’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까지 포함한다. 그동안 2위의 흥행 기록을 갖고 있었던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시리즈(42억3천만달러)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등장으로 3위로 밀렸다. 워너브러더스의 배급 담당자 베로니카 콴 루비넥은 “<해리 포터>에는 경계가 없다. 다섯편 모두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정을 읽어냈다”며 이번 결과에 대해 평했다. 올 여름 개봉한 다섯 번째 속편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현재까지 총 9억2300만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아직 독일과 일본, 영국에서 상영 중이다. 워너브러더스의 또 다른 관계자 댄 펠먼은 “<해리 포터>는 아직 두편이 더 남아 있다. 이 프랜차이즈가 얼마나 높은 수익을 낼지 지켜보는 건 스릴 넘치는 일”이라며 자축의 멘트를 남겼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 수치들이 의미없는 싸움이라는 견해도 있다. 미국 내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스타 워즈> 시리즈가 21억8천만달러로 14억1천만달러의 <해리 포터> 시리즈를 앞서며, 1962년에 시작된 007 시리즈와 2001년 1편이 개봉한 <해리 포터> 시리즈를 비교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한 웹사이트에서는 물가 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007 시리즈의 흥행 수익은 총 100억9천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워너의 앨런 혼은 “다른 프랜차이즈와 경쟁하자는 건 아니다. 이건 그냥 재미로 보는 숫자”라고 말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6편인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가 2008년에, 완결편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도들>이 2010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2004년] 비제이 싱, 세계 1위 타이거 우즈(264주) 제치고 골프황제에 등극 ← 싱이 ‘도이체방크챔피언십 골프대회 ’최종 4라운드를 마치고 우승을 차지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 왼쪽>타이거 우즈가 18번홀 티잉그라운드에서 초조한 듯 땅을 쳐다보며 티샷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흑진주’ 비제이 싱(41·피지)이 무려 5년간 세계 ‘넘버원’ 자리를 지키던 타이거 우즈(29·미국)의 독주체제를 마침내 무너뜨렸다.
PGA 홈페이지에 따르면 싱은 7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턴 보스턴TPC(파71)에서 열린 PGA투어 도이체방크챔피언십(총상금 500만달러)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5, 보기 3개로 2타를 줄여 합계 16언더파 268타를 기록, 공동 2위인 우즈(271타)를 3타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지난주까지 세계랭킹 평균 포인트에서 우즈를 0.18점차로 추격하던 싱은 이로써 랭킹 포인트 48점을 더해 최근 2년간 57개 대회에서 총 724.77점(평균 12.72점)을 기록, 41개 대회에서 503.01점(평균 12.27점)을 획득한 우즈를 0.45점차로 제치고 프로 데뷔 22년만에 처음 세계랭킹 1위에 올라서는 영광을 안았다.
이날 우승으로 자신의 한 시즌 최다인 6승과 함께 상금 90만달러를 더해 올시즌 PGA투어 상금랭킹 선두(788만9566달러)를 달리고 있는 싱은 주간 세계 랭킹에서 역대 최다인 334주인 동시에 264주(5년1개월) 연속 1위 자리를 지키던 우즈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다.
우즈는 올시즌 3월 열린 액센츄어 매치플레이 선수권에서만 우승했을 뿐이며, 상금은 462만 8327달러(4위). 세계 골프 랭킹은 최근 2년간 출전한 대회 성적을 대회 규모 등을 감안해 점수를 부여하고 분기마다 가산율을 곱한 점수를 대회수로 나눈다.
또 지난해 우즈의 상금왕 5연패를 저지하고도 ‘올해의 선수상’을 우즈에게 내준 싱은 1999년 8월 데이비드 듀발(미국) 이후 미국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세계 1위 자리에 오르게 됐다.
3라운드에서 3타차 단독선두를 달린 싱은 이날 우즈와의 동반플레이에서 12번홀까지 버디와 보기 2개씩을 주고받는 사이 우즈가 2타를 줄여 1타차로 쫓겨 위기를 맞았다. 13번홀(파4)에서 보기를 범해 공동선두를 허용한 싱은 파를 기록한 14번홀(파4)에서 우즈가 보기로 무너져 1타차 선두에 나선 뒤 15번홀(파4)에서 1타를 줄이며 2타차로 달아났다.
우즈가 3m거리의 버디 기회를 놓친 17번홀(파4)에서 싱은 7m거리에서 회심의 버디 퍼트를 떨궈 우즈의 추격에 찬물을 끼얹으며 3타차로 달아나 사실상 ‘황제’ 등극을 알린 뒤 18번홀(파5)에서 우즈와 버디를 주고 받았다.
싱은 “지난해에도 내 목표는 세계 1위였고 올해도 역시 세계 1위다. 정말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싱은 또 “41살의 나이에 이렇게 골프를 잘 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겠지만 나는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내년에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항공기 정비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골프를 배운 싱은 골프장 부근에서 공을 주워 관광객에게 팔며 골프와 더 가까워졌다.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 70만 국민들의 영웅이 된 싱은 매일 3시간씩 별도의 체력훈련을 하고 드라이빙 레인지에 퍼팅 교정기를 들고 다닐 정도의 연습벌레이기도 하다. 20대에 연상의 유부녀 아데나 세스를 만나 결혼한 후 아시안 투어에 출전했다가 성적이 신통치 않자 말레이시아 정글로 들어가 연습에만 전념한 일화가 유명하다.
[1999년] 골프선수 김미현, 미국 LPGA 스테이트팜레일클래식에서 우승. 미국 진출후 첫 승 ← 김미현
김미현 선수가 1999년 9월 7일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첫 승을 땄다. 김미현은 이날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레일 GC(파72)에서 끝난 스테이트팜레일클래식 최종 3라운드에서 2언더파를 쳐 합계 12언더파 204타로 우승, 상금 11만 6250달러(약 1억 4천만원)를 받았다. 이로써 김미현은 99년 시즌 신인왕도 확정됐다.
미국으로 떠난 후 7개월만의 쾌거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슈퍼 땅콩’김미현은 153cm 키의 단신이었다. 1996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로 뛰어들자마자 그해 3승을 거둬 프로동기생인 박세리(4승)와 단숨에 국내 그린을 양분해 버렸다.
1997년 미국으로 떠난 박세리에게서 들려오는 소식(LPGA 투어 4승-신인왕)은 김미현의 미국행을 자극해 1998년 10월 미 LPGA 최종 퀼리파잉스쿨에서 풀시드를 땄고 1999년 1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조선
[1999년] 재일교포 무기수 권희로씨, 복역 31년 7개월 만에 가석방-귀국 ← 서울 한남동 소재 한 한정식 집에서 '한국 음식의맛'을 본 후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모츠치키씨(후지미야 여관주인)의 손자 도시키군, 여동생 마키노씨, 박삼중 스님,장경도 사장, 모츠치키씨, 권희로씨.
권희로는 1928년 일본에서 아버지 권명술씨와 어머니 박득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혼자 족발 장사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렸다. 193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로 불렸다. 극빈층 조선인으로 살았는데 소학교(초등학교) 때부터 민족 차별을 겪으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의붓아버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열세 살에 가출해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 먹었고, 일본 사회의 천대 속에서 수 차례 감옥을 들락거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당시는 조센징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살아나갈 기반이 없었으니까. 차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지. 그렇지만 조센징은 아무리 죽어도 신문 귀퉁이 한 곳에 나는 법이 없어. 그야말로 개죽음이지. 강력 사건이 일어나면 가짜 증거를 만들어 그 근방에 살고 있는 조선인에게 누명을 씌웠어.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게 하기도 했어.”
그는 마흔의 나이에도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사채를 얻어 쓴 것이 화근이 되어 1968년, 빚 독촉을 하던 야쿠자 2명을 사살했다. 조선인을 모욕하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고 격분해 저지른 일이었다.
“그때 ‘가만히 당하고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일본이 조선인에게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했어. 관동 대지진 사건 알지?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무차별로 죽였잖아.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 눈뜨고 당한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었으니까.”
그는 일본 정부와 경찰에게 재일 한국인 차별을 항의하기 위해 인질극을 계획했다. 시즈오카의 후지미야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계획적으로 준비된 인질극이었다.
“그 당시 일본 경찰보다 더 좋은 총과 폭탄을 마련했어. 어디서 구했냐는 건 지금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 뒤에서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어. 그 사람들에 대한 예의로 경찰이 추궁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 내 한 목숨 희생해서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그는 무려 4일간 경찰과 대치하다 검거됐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그는 경찰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는 체포된 후 8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구마모토와 그 외 형무소에서 32년 7개월간 복역했다. 그의 어머니는 쓰러져 눕기 전까지 시즈오카에서 1천km 떨어진 형무소를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왔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형무소 직원들까지도 감탄해 어머니 역시 특별대우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1980년 후반부터 재일동포 사업가와 스님 등이 주축이 돼 ‘권희로 후원회’를 만들어 그의 가석방을 도왔다. 결국 1999년에 석방됐고 외국인 장기수는 국외로 추방하도록 한 일본 법규에 따라 그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어머니의 유골을 가져와 고향 부산에 안치시켰다. 이렇게 권희로의 제2의 인생이 어머니의 고향, 부산에서 시작됐다.
[1997년] 모부투(Mobutu Sese Seko) 자이르 대통령 사망 ← Mobutu Sese Seko
모부투 세세 세코 [Mobutu Sese Seko, 1930.10.14~1997.9.7]
지금은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불리는 옛 자이르를 32년 동안 철권통치한 모부투. 1997년 오늘 망명지인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의 한 병원에서 전립선암으로 숨을 거둔다.
표범가죽 모자가 트레이드마크였던 모부투는 아프리카 최대 부국 가운데 하나였던 자이르를 빈곤하고 부패한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는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집권 기간에 외국 원조를 착복하고 4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켰다.
미국 등 서방국가는 아프리카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해 모부투 정권을 지원했지만 냉전 종식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는 결국 1997년 5월 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봉기한 로랑 카빌라의 반군에 쫓겨 모로코에 망명해 있다 넉 달 만에 숨을 거두게 됐다. /YTN
[1994년] 007시리즈의 테렌스 영(Young, Terence) 감독 사망 ← 영
1915. 6. 20 ~ 1994. 9. 7
영국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에서 동양학을 공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아른험 전투에 탱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1940년 영화 《On the Night of the Fire》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1940년대와 1050년대에는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1948년 《당신과의 하룻밤》이란 영화를 처음으로 감독했고 1962년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주연배우로 기용하여 찍은 007 시리즈의 첫 작품 《007 살인 번호》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63년 《007 위기일발》, 1965년 《007 썬더볼》을 연달아 연출했다. 이후 몇 편의 액션영화들을 만들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1981년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대작 《오, 인천》을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대표작으로 007시리즈 3편 외에 《블랙 타이츠》(1960) 《어두워질 때까지》(1967) 《배신자》(1970) 《살인 영장》(1972) 《비극의 마라톤》(1988) 등이 있다. 1994년 프랑스의 휴양지인 코트다쥐르의 칸에서 79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naver
[1990년] 금세기 최고의 마술사 데이비드 커퍼필드 한국 방문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비행중인 제트기 등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고, 중국의 만리장성 벽을 뚫고 지나가는 등의 마술로 '금세기 최고의 마술사'라 불리는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1990년 한국을 방문, 9월 7일부터 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마술의 세계를 펼쳤다. 만리장성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유리벽을 통과하고, 여자 조수를 9등분한 후 다시 결합시켰으며, 대형 카메라와 여자 조수를 삽시간에 증발시키기도 했다.
그는 87년부터 대형톱날에 의해 절단된 자신의 몸 상체와 하체가 따로따로무대 위를 돌아다니게 하는 '죽음의 톱날'이라 불리는 마술을 시도하고 있는데, 부상당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생명을 건 마술.
어릴 적 자폐증 환자였다는 그는 장애자 문제에 관심을 쏟아, 장애자의 재활 프로그램으로 마술을 활용한 〈프로젝트 매직〉을 개발, 전세계 장애아들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주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세계 30여개국 1천여 병원에서 실시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장애자들에게 손놀림이나 인식능력을 높이는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오늘-생각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성립(서독)
서독정부의 수립은 1948년 봄 런던에서 소집된 6개국회의(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에 의해 추진되었다.
1948년 9월 각주(州)의 대표에 의한 헌법 제정회의가 본에서 열렸으며, 1949년 5월 8일 헌법초안이 채택되었다. 이 헌법 초안은 통일독일의 헌법제정회의가 보다 영구적인 헌법을 제정·시행하게 될 경우 효력이 상실된다는 이유로 헌법(Verfassung)이라 하지 않고 기본법(Grundgesetz)이라고 하였다. 그 기본법에 의해 8월에 연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9월 7일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 정권은 1949년 11월 3국 고등판무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협정을 체결하여 국제기관에의 참가, 외국과의 영사관계 개설, 중요공업의 해체면제(解體免除) 등을 승인받았고 다시 1950년 9월 외국과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 및 전독일을 대표하는 권리를 승인받았다. /naver
[1945년] 미국 극동사령부 남한에 군정 포고 ← 미군정 실시로 한국에 진주한 미군들이 서울거리를 행군하고 있다.
맥아더 미 극동사령부가 1945년 9월 7일 일본 동경에서 남한의 모든 통치권을 미 군정하에 두는 미군정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포고문1호'를 발표했다. 이에 앞선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육군 제24군단(군단장 하지중장)은 이튿날인 9월 9일 일본군 대표와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를 접수받았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전문과 6개조로 구성된 '포고문 1호'는 1.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은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부가 행사한다. 2.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위나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는 엄벌에 처한다. 3.공용어는 영어로 한다.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어 9월11일 하지중장은 남한 군정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아놀드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했다. 9월18일에는 모든 집회-시위에 대해 허가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발족할 때까지 3년간 계속됐다. /조선
[1940년] 독일군, 런던 공습
1940년 오늘 나치스 독일 공군이 영국의 수도 런던을 집중 폭격한다.
수천 톤의 포탄이 시가지로 쏟아져 내리면서 런던은 불바다가 되고 유서 깊은 건물들도 불길에 휩싸인다. 히틀러는 독일 지상군으로는 영국 침공이 어렵게 되자 전 공군력을 동원해 대공습을 펼쳤다.
독일 폭격기가 런던을 비롯한 영국 전역에 집중공습을 퍼부은 9월 7일에서 9월 30일 사이 매일 5백여 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YTN
[1929년] 안익태(安益泰) 첼로독주회를 경성공회당에서 가짐 ← 팔마 드 마요르까 극장인 테아뜨로 프린시팔에서 콘서트 중인 안익태 선생.
평양(平壤) 출생.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퇴학당한 뒤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구니타치[國立]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
1932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그 무렵 스토코프스키와 교분을 맺었으며 필라델피아의 카네기리사이틀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1934년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 작곡을 배우며 민족주의정신과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주로 지휘법을 사사하고 1936년에는 몇년 전 미국에서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19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독자적 지휘활동을 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스파냐 여인과 결혼, 에스파냐 국적을 얻고 마드리드 마욜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이탈리아·미국 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1957년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환상곡》 등을 지휘하고 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963년까지 3회에 걸쳐 주관하였다.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자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했다.
1965년 에스파냐에서 병사. 1957년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에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1928년]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김교만(金敎滿) 출생
김교만 [金敎滿, 1928.9.7~1998.6.21]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192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마틴스 미술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였다. 한국 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 국전 초대작가, 서울올림픽 환경디자인 심사위원, 서울 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장 등을 역임하고, 1965∼199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1996년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 1백인' 중 1위로 선정되었다.
시각디자인 중에서도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을 가져 일러스트레이션을 현대의 산업회화라고 설명하였고, 포스터·우표·엽서·공예품 등 다방면에 일러스트레이션을 활용하였다. 1976년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풍물과 탈춤, 장승, 선녀 등 한국 고유의 소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서울시문화상, 한국 산업디자인전 대회장상, 동탑산업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86 아시안게임 문화포스터〉, 〈88 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 〈94 한국방문의 해 공식휘장〉 등과 김포국제공항 사인보드, 한일은행·주택은행·중소기업은행·한국과학기술원 로고 등의 작품이 있다. 1998년 7월 미국 뉴욕의 갤러리아트 54에서 〈김교만 유작전〉이 열렸다. /naver
[1921년] 제1회 미스아메리카 선발대회 개최 ← 1921년 9월 7일 애틀랜틱 시티에서 제1회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장면(AP연합).
여름휴가 열기가 한풀 꺾인 1921년 9월 7일, 미국 동부 애틀랜틱 시티에서는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질 행사가 하나 열렸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바닷가 관광도시인 애틀랜틱 시티의 한 지방신문사 간부는 피서객들을 좀 더 오랫동안 붙잡아 둘 심산으로 `수영복 미인대회`를 생각해냈다. 신문사와 상공회가 해변가에서 공동 주최한 제1회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는 주변 시에서 선발돼온 젊은 여성 8명이 출전했다. 영예의 1위를 차지한 마거릿 고먼은 키 155cm에 몸무게 49kg, 가슴둘레76cm 허리둘레 63cm 히프81cm의 자그마한 체구였다.
젊은 여성들이 자극적인 수영복 차림으로 퍼레이드를 한다는 데 비난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듬해에는 57개 도시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미녀들을 뽑아 보냈다. 당시 막 일기 시작한 영화-사진 붐과 맞물려 1920, 1930년대 미국 전역에서는 수천개 미인대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미인대회 입상은 성공을 약속하는 마술 열쇠였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어 영화나 연극에 출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수영복 심사와 출전자들의 교양 미달은 끊임없는 논란거리로 남았다.
때문에 1927년 중단됐던 원조 애틀랜틱 시티의 미인대회는 1935년 부활하면서 출전자들의 갖가지 재능을 겨루는 탤런트 분야를 추가했다. 1940년대 들어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자 장학 기금까지 내놓았다. 첫 수혜자는 최초의 대학 졸업생이었던 베스 미에르슨(1945년)으로 5000달러를 장학금으로 받았다. 현재 미스 아메리카 조직위원회는 여성만을 위한 세계 최대 장학재단으로 연간 5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1954년 이래 TV 최고 인기 연례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미스 아메리카는 1960년대 후반 여권운동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조선
[1860년] 가리발디 원정군, 나폴리 입성
1860년 9월 7일 이탈리아의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원정군이 나폴리에 입성했다. 당시 탁월한 군사 지도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피에몬테-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1860년 4월 4일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가리발디는 북부 청년 1,000여 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나폴리 왕국을 향해 진격했다. 그는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병력을 구식무기로 무장시킨 채 프란체스코 2세의 나폴리군 2만 여 병력과 맞서 싸웠다. 5월 15일 칼라타피미에서 나폴리군을 물리치자 많은 시칠리아인들이 그를 도왔다. 가리발디는 승승장구했으며 곧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다. 마침내 9월 7일 나폴리 입성에 성공한 가리발디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교황령 로마로 진격해 이탈리아 통일을 완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살아남은 나폴리군의 반격과 정치적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가리발디 원정군의 승리는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이로써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가 통일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브리태니커
[1822년] 브라질,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선언
1769년의 ‘티라덴테스’ 운동에 나타난 상인·민족적 지주(地主) 등의 독립의 꿈은 나폴레옹의 포르투갈 점령과 더불어 19세기 초에 빗나간 형태로 실현되었다. 즉, 1808년 나폴레옹에 쫓겨 일족(一族)과 함께 피해 온 포르투갈 왕실의 황태자 돔 페드루는 1822년 9월, 국왕 주앙 6세가 귀국한 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페드루 1세라 칭했다. 1831년 페드루 1세가 전제(專制)를 이유로 물러나게 된 후, 페드루 2세 치하의 브라질은 인근의 여러 나라로 진출하였고, 커피 재배의 보급과 유럽 이민의 대량유입에 의해 자본주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naver
[1533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출생 ← 엘리자베스 1세, Gower가 그린 초상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1533년 9월 7일 영국 그리니치에서 튜더왕조의 헨리8세와 두번째 왕비 앤 블린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궁정내 세력다툼으로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가 하면 반란가담의 혐의로 런던탑에 유폐되는 등 파란만장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메리1세가 사망한 1558년 25세로 즉위해 1603년 사망으로 폐위할 때까지 영국을 통치하며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메리1세 때부터 있어 왔던 종교갈등을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고 전국민에게 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해결했다.
여왕의 치세중 영국은 섬나라에서 대해상제국으로 성장했으며 문화적인 면에서도 영국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해 셰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문인과 학자가 배출돼 여왕은 모든 영광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조선
그밖에
2009년 경북 군위에서 세계 최대 익룡 발자국 발견
2005년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청와대서 영수회담
2005년 증시 11년만에 사상 최고치 경신
2002년 남북통일축구경기 서울월드컵경기장서 개최. 12년만의 남북대결 0대0 무승부
1995년 러시아, 북한에 조소동맹조약 폐기 통보
1993년 공직자 재산공개
1992년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 제2회 서울평화상 수상
1991년 넵투늄(초우라늄원소)을 발견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맥밀런 사망
1987년 호네커 동독공산당 서기장, 분단후 첫 서독 방문
1984년 교황청, 해방신학의 기수 보프신부 사문
1980년 연세대, 충북 단양서 6~10만년전의 인류 유골 발견
1975년 레바논 내전상태로 돌입
1969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 당 해산을 결의하고 동시에 신당 발기위원회 구성
1962년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 사망
1961년 흐루시초프-네루 회담
1959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 10개국 군축위 설치에 합의
1956년 노예제도 폐지 국제조약, 제네바에서 31개국 조인
1950년 필리핀, 미곡 만톤 의료약품 등 송한(送韓)
1949년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사망
1940년 독일기, 영국 본토 폭격. 독일공군, 영국 런던 대공습
1924년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사망
1901년 청, 의화단사건 후 열강 11개국과 최종의정서 12조에 조인(신축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