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3724
1월3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VeZGmP31N-k
[서울대교구 온승현 바오로 신부 집전(잠실 본당 보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그분을 위해 기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시자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위 문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세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코스모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의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의 그릇된 질서입니다. 위의 세상이 아니라 아래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 세상은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결국 극복되어야 할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며 자만심입니다. 세상의 죄는 인간 각자의 개인적인 죄를 넘어서는 죄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을 적대시하는 세상의 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인류, 상처 입은 인간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린양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데, ‘없애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치워 버리다.’라는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더욱 깊은 뜻은 ‘짊어지다.’입니다.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 인간 각자의 죄, 세상의 죄,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이라 외치며, 머지않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짊어진 후, 묵묵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암시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 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돌아보니 저도 젊은 시절 보따리를 쌀 때 마다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내가 떠나면 나만 바라보던 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데, 내가 가버리면 이 시설이 과연 제대로 운영이나 될 수 있을까? 저 많은 후원자들 다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몇년 뒤에 슬쩍 그 소임지를 가봤더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 없는데도 다들 환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부질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bwyuIsQwoQ
++++++++++++++++++
<내가 어쩔 수 없을 때 착한 사람을 가려내는 방식>
린제이 로한(Lindsay Lohan)은 나중에 인생의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경력 궤적이 크게 영향을 받은 아역 스타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사랑 받는 아역 배우에서 법적, 개인적 문제에 직면하기까지의 그녀의 여정은 언론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한은 아동 모델이자 청순한 아역 배우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었습니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상당한 팬층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인으로 전환하면서 로한은 연기 이외의 이유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명성, 압박감, 성인 역할로의 전환 등 아역 스타와 관련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음주 운전(DUI), 마약 소지, 절도 혐의로 체포되는 등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종종 법원 출두, 재활 기간 및 보호관찰 기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임신 상태로 음주와 흡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착한 이미지를 가졌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본에 그렇게 쓰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본래 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착해지는 방법은 착한 누군가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 힘만으로는 전혀 착하지 않고 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해도 어려움이 닥치면 그 연극을 멈추고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이 혼자서 착해질 수 없는 이유는 언제는 ‘생존’ 문제 때문입니다. 자존심에 기대고 살며 그것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착해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등 뒤에 나를 사랑하는, 죽음까지 이기는 엄청난 능력이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나의 생존을 책임져주지 않는 한 사실 착한 연극도 힘듭니다. 평화가 없으면 착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착함도 결국 아버지의 착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냄으로써 본인도 착하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써 착해졌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이 어떻게 부모와 자기가 믿는 신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얼마나 착하게 보이는지 tvN ‘프리한 19’에 나온 두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른 13살 소년, 매티. 소년은 엄마에게 재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충분히 잘해온 거죠?” 13년이라는 짧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노래하며 하늘나라로 간 소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드리겠습니다. 세 살 때부터 시와 짧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며 천재 시인으로 불린 매티는 안타깝게도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형과 누나는 모든 신체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는 선천성 희귀병인 근육성 이영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어머니와 매티 자신도 똑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티가 쓰는 글은 결코 암울하거나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살아있습니다. 나는 숨을 쉽니다. 진짜 살아있는 아이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삶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자신을 시로 써내어 지난 2000년 아이들에게 희망 메시지와 함께 발간한 첫 시집 하트송은 미국 내에서만 100만 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매티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매티가 출연하는 토크쇼 방송에서 이런 인터뷰를 합니다. “때때로 저는 물어요. 왜 나인가? 왜 난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했나? 그리고 그때 다시 생각합니다. 왜 내가 아니어야 할까?” 진짜 천사가 아니고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매티는 처음부터 죽음 앞에서도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부모와 신의 선함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착한 것입니다.
또 9살 민규의 이야기.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살고 있는 알콩달콩 화목한 여섯 가족입니다. 생글생글 맑은 얼굴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9살 민규는 네 남매 중 둘째로, 유난히 정이 많고 의젓해서 “엄마 힘들지?” 하며 늘 엄마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2014년 1월 어느 평범하던 겨울 민규에게 갑자기 펄펄 끓는 고열 증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검사를 마치고 민규의 어머니 허현아 씨는 의사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뇌염 바이러스 감염입니다.”
너무나 건강했던 아이였기에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민규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희망을 걸 것입니다. 그러나 민규도 그것을 바랄 것이라 여겨 부모는 아이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9살 민규는 난치병 환자 네 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게 되었습니다.
착함 안에 착하신 분을 드러내기 위한 십자가가 없다면 그것은 연극입니다. 민규처럼 부모의 착함에 자신을 맡겨 부모의 선함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진짜 착함입니다. 본성 상 인간은 스스로 착할 수 없습니다. 나의 본성을 죽이고 내 등 뒤의 나보다 더 크신 분의 착함을 드러낼 때만 착할 수 있습니다. 착함이 부활이라면 십자가는 기본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저도 조금이나마 착해지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을 굳이 판단해야 할 때도 그렇게 판단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4년은 ‘용의 해’입니다. 옛날 중국에 장승요(張僧繇)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이 화가는 안락사(安樂寺)라는 절에 용 두 마리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 용 두 마리에는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묻자 장승요는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장승요가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리자 잠시 후에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이 벽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화룡점정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비단 용뿐만 아니라 대부분 생물을 그리는 그림에는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였는지 눈동자를 마지막에 그렸다고 합니다. 2024년에는 나의 말과 행동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 화룡점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더욱 발전하고, 공동체에 활력이 생기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용흥사라는 절에 진존숙이라는 명승이 있었습니다. 진존숙은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나면 지푸라기로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는 짚신을 한 켤레씩 짝을 맞춰 산길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스님, 왜 짚신을 만들어 매달아 두시는지요?” 스님이 답했습니다. “먼 길을 가다 보면 짚신이 낡아 발이 불편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지요.” 어느 날 용흥사에 낯선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진존숙은 그와 선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첫마디를 건네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진존숙은 속으로 ‘도가 깊은 스님이신가?’ 하고 다시 말을 건네니, 또다시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진존숙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용의 머리를 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뱀의 꼬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는 시작은 거창하지만 끝이 보잘것없고 초라함을 일컫습니다.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뜻을 세웠다면 시작하고, 시작했다면 마무리를 져야 합니다. 성공만이 마무리는 아닙니다. 일에 매듭을 짓는 것, 그게 바로 마무리입니다. 2024년에는 나의 말과 행동이 용두사미가 아닌 용두용미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서에 보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축복해 주시면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쓸모없는 아버지’(아브람의 뜻) 대신에 ‘훌륭한 아버지’, ‘선택된 아버지’(아브라함의 뜻)로 불립니다. 그는 하느님을 몰랐기 때문에 쓸모없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게 되자 선택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입니다. 시몬이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시몬은 ‘갈대’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받고, 위로하는 공동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즈카리야라고 이름을 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 ‘요한’으로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런 뜻에서 요한은 화룡점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나,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엘리야는 이미 와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이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요한은 분명 화룡점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기꺼이 용두사미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용두사미가 되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용두사미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으로 증언한다.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1요한 3,5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더는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해방해 주시고(5절), 죄 없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5절), 그분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6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며,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다. 없애다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이다. 요한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이 증언으로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면서 29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을 확대하고 있다.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 예수께 대한 증언을 결론짓고 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희생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주신 분이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항상 일치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 안에 머물면서 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려고 결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여 주신 희생양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적인 예배에서 죄를 용서받거나 정화되고자 어린양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애 주시려고 당신께 가장 소중한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이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제1독서는 이 사랑을 깊이 있게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장 소중한 예수님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실 정도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무엇일까요? 살인? 간음? 도둑질? 우상 숭배? 십계명에 열거되는 죄들은 모두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용서를 자기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려고 마음먹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 주시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가장 절망적일 때, 오늘 말씀이 고백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믿음을 두며, 용기를 내어 고해소로 향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ㄴ-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ㄴ-34)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진 상징입니다. 즉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죽은 것과, 이사야서 53장의 어린양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것을 합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들을(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구원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는 일차적으로 ‘나의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라는 말과 ‘세상’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으면서, “남들은 다 죄인이어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이 없어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의 생각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입니다. 무슨 연구나 공부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또 어떤 수련이나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엘리사벳 집안과 성모님 집안은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 주시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오직 ‘믿음’으로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또 그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있고,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언도 있고, 그분들의 증언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계시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증언들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는, 성경은 재미없는 옛날 이야기책이 될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고, 또 어떤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하는 생활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 공부와 성경 읽기를 시작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성경 공부’라고 표현하든지 ‘성경 읽기’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지식을 쌓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살기 위해서, 또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또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라는 증언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뒤의 3장에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4-36)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
[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예전과 달리 현대 교회에서는 청소년 사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겠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학교교육과 입시경쟁, 사회생활과 취업난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 신앙을 키우고 친교(Koinonia)를 체험하는 기회가 더욱더 적다.
그러나 청소년들과 직접 만나보면 이들 안에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고, 또 이를 그 바쁜 생활 가운데 실현하려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톨릭 대학교 성심교정 교목실의 증언에 따르면 매일 천여 명 이상 되는 학생들이 고된 수업 사이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학교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정원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고 한다.
내가 동반하는 가톨릭 노동청년회(TOC) 한 팀에서 팀 이름을 정할 때 한 여학생이 ‘아뉴스 데이(Agnus Dei)’로 하자고 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뜻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나는 25년간 이 모임을 동반하지만 이런 종교적 표현을 팀 이름으로 정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몹시 놀랐다. 그런데 다른 팀 이름을 보니 ‘예사모’(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임)· ‘마닮모’(성모 마리아를 닮아가는 모임)· ‘포도나무’·‘사람 낚는 어부’ 등이었다.
현재 동반하고 있는 ‘포도나무’팀은 간호 대학생들의 모임이다. 한 번은 이들에게 ‘어째서 백의의 천사들은 이렇게 아름다운가?’를 넌지시 물었더니, 그들은 정색을 하며 “아마도 우리가 고통 받는 환자들에 대한 동정심, 연민의 정이 없으면 이 직업을 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렇다! 본래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특별히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게 되어 있다.
이 ‘자기 증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기 위한 관건인 것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자기만의 이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심인 죄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죄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
[마리아회 김태오 티모테오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해당하는 호칭으로, 아니,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인 십자가의 희생을 예언하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날 계약을 맺을 때 먼저 서로의 동의가 확인된 다음 계약서에 서명 또는 도장을 찍는다. 이 서명 또는 도장은 서로 약속한 것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만의 특유의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서로 동의하고 동의한 것을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고자 하면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상대방과 같이 특별한 예식을 행하였다.
동물을 죽여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 놓고 그 사이로 둘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계약서 서명과 같았다.
피가 흐르는 제물 사이로 둘이 지나가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 피가 서로간의 동의를 표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고 믿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천주의 어린양을 되새겨 본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아멘.”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요한 사도의 고백은 놀랍습니다. 율법과 계약에 묶인 유다인들의 종교관을 넘어 의로우신 하느님을 깨닫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확신은 그리스도인이 지닌 특권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품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는 본디 현재에 얽매여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헛된 희망의 굴레에 갇혀 불만과 불평, 이기심과 탐욕에 빠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희망하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이나 슬픔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현실의 축복이나 영광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희생하고 나눌 줄 알며, 소유와 경쟁을 위하여 타인을 이기적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기다렸던 메시아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시는 순결하신 분이시며,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온전히 바치실 어린양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밝혀진 하느님의 사랑에 있음을 세례자 요한은 깨닫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한순간도 우리의 욕망을 잠들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보속의 삶, 자비와 사랑의 삶에 맛들일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29)
저는 수도자로 살아오면서 세례자 요한의 ‘크심, 위대함’을 더 깊이 느껴가며 그를 통해 인생을 배워갑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고 세례자 요한의 ‘인물됨’을 인정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그의 삶의 모습들이 오늘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적이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참으로 시대가 필요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존재임을 다시금 느낍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데도 생각하지 않은 것, 말해야만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 행해야만 하는데도 행하지 않은 것,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생각한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말한 것,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행한 것’을 알고 있기에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제 약함과 어둠을 보면서 부끄럽습니다. 이에 반해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모든 속박을 끊고 괴로움과 욕망이 없는 사람 미움과 잡념과 번뇌를 벗어던지고 맑게 살아가는 사람 거짓도 없고 자만심도 없고 어떤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도 않는 사람 이미 강을 건너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떤 세상에서도 삶과 죽음에 걸림이 없는 사람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다니며 모든 의심을 넘어선 사람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는 사람』 (인도 경전 ‘숫타니파타’ 중에서)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직감적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29)고 외칩니다. 한눈에 ‘척 보고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라는 것은 요한이 정말 대단한 영적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1,10)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그분과 그분의 신비(=존재 이유)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요한이 언급한 ‘하느님의 어린양’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칭호이며, 무엇보다 먼저 탈출기(12,12 이하)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이 밀어닥친 재앙 속에서도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출되는 파스카 사건’을 상기하는 어린양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네주는 과월절의 희생제물입니다. 아울러 이사야서, ‘야훼의 종’의 노래(52,13-53,12) 속에도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 등장하며, 백성들은 이 ‘어린양과 같은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 오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렇듯 ‘어린 양’에 대한 표상들이 집약되어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어린양”(1,29)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어린양’은, 일단 우리를 대신 제물로 바쳐지는 흠 없는 어린양만이 아니라, 양 떼를 이끄는 젊고 강한 숫양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목자이신 하느님을 알고, 목자이신 하느님도 그분을 아시며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하여 양 떼를 생명의 샘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실’ 것인데, 여기서 ‘없애다.’는 뜻은 글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 버리다.’는 의미 보다, 더 깊은 뜻은 ‘짊어지다.’가 더 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생명의 샘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짊어지신 세상의 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를 포함해서 제가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구체적인 표증은 바로 우리 모두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거짓된 자아가 지배하는 세상이며, 이로 말미암아 ‘나와 너’가 서로 충돌하는 세상이기에 여기서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화와 부패와 불의, 차별과 폭력이 파생되어 이 세상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치 양 떼의 강력한 으뜸인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이 이기심을 들어 올려 짊어지시고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2,5~6)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더 이상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는’ 이타심이 지배하는 조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예전에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이 열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체험하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1,31 참조), 그리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1,34 참조)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덕분에 죄 사함을 받았고 죄가 없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1요3,1 참조)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신 것처럼 우리 역시도 세상의 죄 곧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늘 성체를 모시기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노래할 때마다 그런 존재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매일 매주 미사 참석할 때 특별히 성체를 모시기 전에 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를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마다 그리고 사제가 성체를 쪼개면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할 때 좀 의식하고 깨어나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집중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사랑을 고백합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1,34)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0대 초반부터 강의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저였지만 많은 곳에서 저를 초대해 주셨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 강의를 들으신 분은 “목소리가 좋다.”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십니다. 또 3시간 넘게 강의하는 동안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강의하는 것을 보고서는 강철 성대를 타고났다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40대에 교수법 수업을 들으면서 말하는 것은 계속 연습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대도 근육이라서 늙는다는 것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의 근육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성대도 사용하지 않으면 성대 근육이 빠져서 강의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워낙 발음이 안 좋아서 입에 나무젓가락을 물고서 매일 연습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연습이 모여 튼튼한 성대 근육을 만든 것인데, 타고난 것처럼 착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타고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타고난 것도 사라집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머무는 것도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주 만나야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저절로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머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냥 우연히 보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른 채 생활했으며, 메뚜기와 들 꿀만을 먹으면서 하느님을 향했기에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진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절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들보다도 더 열심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우리의 노력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오시네>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그분 오시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어둠은
결코 스스로
걷지 않으니
어둠을 사르러
빛이 오시네
멈춤은
결코 스스로
나아가지 않으니
멈춤을 멈추러
길이 오시네
거짓은
결코 스스로
밝히지 않으니
거짓을 드러내러
참이 오시네
아픔은
결코 스스로
씻지 않으니
아픔을 씻기러
위로가 오시네
굴레는
결코 스스로
벗지 않으니
굴레를 벗기러
자유가 오시네
폭력은
결코 스스로
멈추지 않으니
폭력을 끝내러
평화가 오시네
무관심은
결코 스스로
돌아서지 않으니
무관심을 돌리러
사랑이 오시네
사람은
결코 스스로
살지 않으니
사람을 살리러
참사람이 오시네
악은
결코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니
악을 무너뜨리러
선이 오시네
세상의 죄는
결코 스스로
없어지지 않으니
세상의 죄를 없애러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시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알아본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실망과 좌절, 실패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만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약점 중 하나는 한번 만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더욱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면 그제야 어디서 만난 분일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나를 알아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겉모양도 모르니 그 속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상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지혜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언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만이 그분을 알아 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도구로 선택하셨고, 요한이 그분의 말씀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사랑하면 할수록 더 알게 되고 또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은 더 맑고 밝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연장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는 그분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은 신앙의 큰 사건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어린양의 피를 집의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서 그 표가 된 집은 죽음의 천사들이 지나쳐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파스카’라고 하는데 ‘건너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서 건져지고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백성인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성체성사를 통한 음식으로 밥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의 주님을 알아보아야 하고 그 어린 양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처럼 세상의 어린양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원하십니다.
사제가 미사 때에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외칠 때마다 이제 내가 높이 달리어, 또 하나의 어린양이 되고 그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을 알아 뵙고 만나는 은총이 모두에게 함께하시기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따름과 닮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 18,29)
마음속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입니다. 어제는 우정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면서 나눴고 우선적 본보기로 복음을 근거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영적우정에 대해 나눴습니다. 이미 두분간의 영적우정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시 두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새삼 예닮의 여정에 빛나는 모범이 세례자 요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깊은 우정 관계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그 많은 사람중 예수님의 신원을 알아 본 사람은 세례자 요한뿐이었습니다. 사람이라 하여 다 똑같은 눈이 아닙니다. 영의 눈이 활짝 열린 세례자 요한의 외침입니다. 유난히 ‘본다’라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말한 분이시다.”
바로 우리가 미사시 영성체전 ‘하느님의 어린양’ 세번 되풀이하는 고백과 사제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권고도 오늘 복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미사전례가 얼마나 정교하게 성서를 반영하고 있는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이어지는 백부장의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고백과 더불어 성체를 모심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일치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마다 미사전례 은총이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상기시키는 “하느님의 어린양”에는 두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는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어린양처럼 희생하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의 표상과, 둘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하는, 파스카 때에 잡는 어린양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미사중 모시는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문득 11월 위령성월,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저녁성무일도 때 마리아의 후렴도 생각납니다. 11월 위령성월 중 내내 노래했던 내용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여기서도 예수님을 어린양이라 부릅니다. 이어 영의 눈이 열린 세례자 요한의 힘찬 고백이 뒤따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 이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마음의 눈만 밝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밝아 주님께 늘 깨어 열려 있었던 참 탁월한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에 있던 ‘성령의 사람’ 세례자 요한임은 다음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따르고 닮아가는 분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갈망하고 소원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런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감으로 실현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깊이 마음에 새길 것을 촉구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고 닮아 그분처럼 되는 것,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 상태에 있는 미완의 존재임을, 또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이렇게 예닮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궁극적 일치에 희망을 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하며 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룩 분투의 노력을 다합니다. 제가 피정지도 시 자주 드는 예가 생각납니다.
“나중에 천국문을 통과할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하실 것이다. 주님을 닮았나 안닮았나. 사랑할 때 닮는다. 주님을 따라 섬기고 사랑하면서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참나의 얼굴이 된다. 주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로 주님은 심판하실 것이니 사랑의 심판이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예닮의 여정에 올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며, 날마다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힘껏 도와주십니다. 다시 한번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없애주신 죄를 다시 만들어내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제 새해맞이 공동 휴식을 한 뒤 형제들과 긴 대화를 나누다가 죄에 관한 얘기까지 대화가 풍성해졌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 교회가 너무 죄 얘기를 많이 한다고, 이 죄 저 죄, 죄가 너무 많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얘기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 많은 율법 조항으로 죄가 많게 만든 유대교를 비판하시고, 계명을 사랑의 계명으로 단순하셨고 오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듯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신데 우리 교회는 다시 죄를 많이 만들고는, 주님을 그 많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요 자비하신 분으로 만들었다고, 어떻게 보면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만들려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일부 신학자들은 교회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요.
사실 죄가 너무 많습니다. 사는 것이 죄다 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분이시고, 사랑하지 않는 것만이 죄라며 죄를 단순화하시고, 그럼으로써 죄를 적게 만드셨습니다.
요한의 서간도 같은 맥락으로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이것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한 것이 1차적인 죄이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숨은 두 번째 죄가 더 큰 죄였습니다.
명을 한 번 어긴 것보다 관계가 끊긴 것이 더 큰 죄이지요. 아무리 엄한 명령일지라도 그 명령을 한 번 어긴 것보다 그로 인해 부모와 단절한 것이 더 큰 죄인 것과 같습니다.
한번 상상해봅니다. 죄를 짓고도 하느님을 피해 숨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피해 그늘로 숨은 것 자체가 어둠이고 지옥이며 하느님께서 추방하신 것이 아니라 셀프 낙원 추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으니 제일 큰 죄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는 것,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 것 등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고, 하느님 사랑의 은총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계속 우리 죄를 없애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자꾸 자기 죄 안에 머무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내가 자주 하고 자꾸 하는 짓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증언의 삶!>
오늘 복음(요한 1,29-34)은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어린양'은 속죄 제물로 바쳐졌던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우리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본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증언의 삶!'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우리의 죄를 없애시려고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 증언의 첫 단계는 '나의 믿음'이고, 이 믿음으로 '내가 먼저 구원받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인 가정에서, 삶의 자리에서 '내가 먼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하느님 체험, 나의 복음화가 전제가 되지 않으면 증언의 삶을 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큰 사랑은 매일 성체성사(미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감사♥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잘 먹고, 이 사랑을 너와 세상에 전하는 증언자가 됩시다!
'증언의 삶'은 내가 먼저 기뻐하고(나의 하느님 체험인 구원과 부활), 이 기쁨을 너와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0w57PUfJvnQ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며
가장 좋은 것만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용감하게
앞으로 나오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먼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길 원하십니다.
더 깊은 관계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관계입니다.
기쁨의 관계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내어 맡기는
관계입니다.
내어 맡기는 것이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기쁨과 사랑을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이끌어가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오늘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어린양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충실하신
하느님의 어린양이
더욱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과
함께 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내어드리는
믿음과 사랑을
다시 배웁니다.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