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을 되찾더라도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들은 '민의 나라'를 꿈꾸었는데...
'주권자' 자각이 민주주의의 첫걸음
피눈물 흘리는 눈, 민(民)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직후인 1911년, 일본 헌병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인 독립운동가 105명을 체포, 고문, 투옥했다. 이 과정에서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라는 조직이 드러났다. 조직 이름은 ‘민(民)을 새롭게 하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본디 한자 민(民)은 ‘피눈물 흘리는 눈’을 형상화한 상형문자다. 외부에서 온 전사(戰士) 집단이 특정 지역을 정복하고 토착 농경인들에게 성을 쌓게 한 뒤 자기들은 그 안에 들어가 살면서 성 밖의 농경인들을 수탈하는 것은 고대 문명 형성사의 기본 서사(敍事)다.
한자(漢字)는 성 안에 살며 왕을 섬기는 사람을 인(人), 성 밖에 살며 성안 사람들에게 곡물과 옷감을 공급하는 사람을 민(民)으로 차별한다. 공자는 이에 대해 ‘큰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매사에 삼가며 신의를 근본으로 해야 하고, 물자를 절약하고 인(人)을 아껴야 하며, 민(民)을 부림에 때를 맞춰야 한다’고 썼다. ‘인’은 군주가 아끼는 사람, ‘민’은 군주가 부리는 사람이었다. 이 둘을 합한 개념이 ‘인민’이다.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의 주역인 신채호, 양기탁, 안창호 선생(왼쪽부터).
‘피눈물 흘리는 눈’을 그려 ‘민’이라는 글자를 만든 이유는, 소수인 정복자들이 다수인 토착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해 그들의 한쪽 눈을 멀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도시 거주 직업인들은 정치인, 군인, 상인, 문인, 언론인 등으로 불리지만 농어촌에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농민이나 어민으로 불린다. 민예, 민속, 민화, 민요 등 ‘민’ 자가 앞에 들어가는 단어에 세련되지 못함, 촌스러움, 투박함 등의 이미지가 부착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는 특이한 단어다.
'민의 나라'를 만들자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소개된 것은 1884년 한성순보를 통해서였다. 근대 중국인들은 영단어 Nationalism이나 Capitalism처럼 ‘~ism’으로 끝나는 단어를 ‘~주의(主義)’로 번역했다. 그런데 Democracy의 cracy는 주의가 아니라 ‘통치’를 의미한다. 번역의 관행대로라면 ‘민중지배’나 ‘민주정치’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았고, 그랬다면 지금처럼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착각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들은 굳이 ‘주의’로 번역했다. 민주(民主) 정치를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오랑캐의 정치’로 깔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사 이래 수천 년간, 인간에게 정치란 ‘신이나 그 대리인’이 하는 일이었다. 중국인들에게나 한국인들에게나 민주정치란 ‘천리(天理)와 천명(天命)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랑캐들이 하는 야만 행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1800년대 초반까지도 민주정체를 채택한 국가는 미국과 프랑스뿐이었다. 1880년대 미국, 프랑스와 수교한 뒤 ‘야만국’들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한국인 일부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1897년 윤치호는 대군주폐하 탄신 경축회에서 연설하면서 “완고 세계에는 백성 민(民)자가 종 민자가 되어 백성은 다만 관인의 의식 공급하는 종이 되었은즉 백성이 위가 되고 관인이 아래가 되어야 개화가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민(民)을 관(官)에 앞세우자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나라가 망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개혁적 지식인들은 국권을 되찾더라도 고종이나 순종같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의 나라’를 꿈꾸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민’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신민회’라는 조직을 만든 이유이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는 이 의식을 계승하여 ‘독립의 주체’이자 ‘건국의 주체’를 명시했다. 첫 문장 ‘오등(五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에서 오등(五等)과 아(我)는 ‘이천만 민중(民衆)의 성충을 합하여 차(此)를 포명(佈明)함’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민중’이었다. 인민, 민족, 동포가 아니라 민중이라고 한 데에서, ‘민의 나라’ 즉 ‘민국(民國)’을 향한 당대의 지향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되는 등 독립운동의 사상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민의 나라’가 공통 지향이었다. 하지만 한국인 모두가 이 지향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No라고 말할 줄 모르는 국민들
한반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하에 있었고, 학교에서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식 정치체제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가르쳤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왕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백성은 천황에게 충성을 다 바쳐야 한다는 중세적 신민의식은 여전히 강고했다. 일본 군국주의 지배 하에서 관직에 오른 사람의 덕목은 단 한가지였다.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 총독부 고위 관료나 판검사는 물론 말단 순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견지해야 할 직업적 의무는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뿐이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세상을 보는 사람 모두가 최고 권력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신민의 도리라고 믿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자기 권리를 깨달은 ‘민’과 일방적 복종만이 민의 도리인 줄 아는 ‘민’으로 나뉘었고, 후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일본이 패망한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민주주의가 세계 최고의 정치제도’라는 담론이 유포되었다. 하지만 한국인 절대다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이 이념인지 체제인지 따지려 하지 않았고 천황제 군국주의에 익숙해진 몸과 의식은 그대로였다. 게다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고위 관료, 판검사, 경찰 등이 제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충성의 대상이 일본 천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 바뀌었다는 점뿐이었다.
패전 직후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노(No)라고 하지 못하는 일본인이어서 원자폭탄을 맞았다”는 말이 유행했다.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신민의 의무라고 여겼기에, 천황의 잘못된 명령조차 거부하지 못했던 것이 일본 패망의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친일 관료 출신 한국인들은 ‘노라고 하지 못한 것’ 조차 반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거나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자기 행위를 변명했다. ‘성인들의 세상’은 계속 이들의 의식이 지배했다. 투표권도 없는 학생들이 4.19의 주역이 된 이유다.
4.19 혁명을 주도한 대학생들의 시위 모습. 독립운동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의 주권자
한국 현대 정치사는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했던 민주주의가 친일세력이 체득한 군국주의, 전체주의, 귀족주의에 맞서 싸운 과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서로 연결되고 친일과 독재가 하나로 묶인 이유이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독재체제를 ‘형식적’으로 타파한지 이제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군주제 하에서 살아온 인류역사 수천 년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바이든 날리면’ 사태로부터 최근의 ‘명품 가방 수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정부와 여당, 언론들은 대통령 윤석열과 그 부인 김건희의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를 ‘불충(不忠)’이자 반역 행위로 단죄하려 든다. 과거 연산군은 “군주의 잘못이 있어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말했다. 군주제 시대에도 이런 주장은 비난거리였다. 그런데 명색이 민주주의인데, 지금도 이런 주장이 ‘애국자의 도리’에 맞는 것인 양 묘사된다.
우리 조상들이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을 못했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군국주의 시대의 의식에 찌든 저열한 신민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