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2:11~22
<본문 요약>
에베소는 신전과 주술 문화로 대표되는
우상숭배의 중심지였고,
이방인들은 언약 밖에 있어
소망도 하나님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담을 허물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으셨으며,
이제 교회는 모든 민족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세워져 가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
<묵상>
1. 누가 이방인인가? (11–12절)
사람들,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혈통과
율법의 경계로 이방인과 자기들을 구분했다.
그 기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외형적 할례였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본질적인 이방인은 단순히 혈통이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언약에서 멀리 떨어져 소망도
하나님도 없이 사는 것이
진짜 이방인의 모습이다.
이것을 지금 나에게 적용해 본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속해 있고,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까?
외형적이고 물리적인 신분이
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로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내 안에 겉모습만 남고,
관계가 메말라 있지는 않은가?
겸손히 무릎 꿇고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2. 둘을 하나로 만드심 (14–16절)
본문에는 “둘”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그 “둘”은 무엇인가?
가장 직접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언약 안에 있던 자들과
언약 밖에 있던 자들,
현실에서는 특권자와 소외된 자들 등
양 편으로 갈라진 두 부류,
일체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그런데 죄의 본성은 이러한 구분을
언제나 더욱 갈라놓는다.
경계 짓고 구분하는 데서
우월감과 배타성을 드러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능력주의와 치열한 경쟁체계가
심화된 현실 속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해야 내 생존과
욕망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구분은 더 치열해지고,
벽은 더 두꺼워진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시 그렇다.
오히려 가장 심각하게 작동하는 곳일 수 있다.
교회의 경향성에 맞추지 못하는 이들을
쉽게 악마화하고,
다름을 혐오와 배척으로 돌려세운다.
하나님 안에서 결코 손상되지 않는 “존재”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저지르는
“행위”를 구분하지 못한 채,
사람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존재’를 부정당한다.
이것은 단순히 미성숙이나 불안 때문만이 아니다.
그 깊은 뿌리에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숨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름을 없애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다름을 존중하신다.
십자가로 원수 된 담을 허물어, 다름을 품은 채
하나 되게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의 존중은 죄악을
옳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철저히 십자가에서 심판되었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과 같은 창조된 차이는
결코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오히려 더 풍성하게
하나 됨을 드러내는 통로다.
나는 이 진리를 교회 안팎의 모든 관계 속에서
다시 새기며, 미움과 배척이 아니라
존중과 화해를 선택하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3. Reconcile, 화해의 깊은 뜻 (16–22절)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둘을 한 몸 안에서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화해”란 단순히 적대 관계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죄의 뿌리를 제거하고,
관계를 새롭게 이어주시는 것이다.
나의 삶 속에서 이 화해의 원리를
깊이 되새기고 싶다.
나는 자주 나 자신을
내 시각으로만 바라본다.
부족과 실패에 매여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반대로 헛된 자랑으로 자신을 높일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는 순간,
내 자신을 향한 시선이 바뀐다.
내가 나를 보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관점으로 나를 헤아릴 때,
나는 가장 존귀해진다. 그렇게 하나님과 내가
모든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벗어버리고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이 화해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하나님이 나를 존귀히 여기신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타자 역시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미움과 질투,
과소평가와 과대평가가 차례로 무너지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화해는 민족과 국가 등의 거대 공동체,
심지어는 종교와 사상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이주민과 난민 문제가
뜨겁게 논의되는 것도,
사실은 이 화해의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화해는 사람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 모든 피조 세계에도 확장된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사랑하시는 세계를,
나도 그 시선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고양이와 강아지를 아끼는 마음,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를 돌보는 노력도
단순한 실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 안에서 창조의 상태와 원리를
회복하는(=화해시키는) 것으로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이루신
*화해(reconciliation)*의 원리가 아닐까?
“하나님 지난밤 편안하고 깊은 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 관리도 잘해서 건강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귀한 하루를
하나님 안에서 잘 활동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존재와 행위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주시고
세상의 싸움과 모순, 투쟁의 험난한 환경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작은 일에도 그 원리를 적용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이제 새 학기가 다가오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다해 귀한 청년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강의로, 상담으로, 친절로, 베풂으로, 희생으로,
헌신으로... 가용한 모든 수단으로
전하게 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