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평전 1부2부
수학자 파스칼
천재는 정도가 없는 것 같다. 파스칼이라는 사람은 알수록 이질감이 느껴진다 무언가 같은 인종이 아닌 느낌이랄까? 천재는 독보적이다. 문학을 가르쳐도 수학 논문을 쓰고, 어릴 때 주변 환경이 변해도 사상최초로 계산기를 만들어낸다. 어릴 때부터 독보적으로 성장한 것은 분명 아버지의 교육과 유전자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파스칼 가족에서 블레즈 파스칼이 독보적인 이유를 유전과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학문 중 가장 이성적이라 불릴 만한 수학에 처음 큰 관심을 가진 파스칼은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이성을 부인하며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블레즈 파스칼만이 독보적이었을까? 어떻게 16살에 학계를 흔든 논문을 쓰고 19살에 계산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요즘 사회는 공평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하다하다 동물도 인간과 공평해지길 바라고 있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파스칼 같은 천재의 탄생은 이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공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확률에 삶을 맡기고 불확실성과 불공평성 시스템에 자신의 모든 희망은 건다. 불공평하기에 오히려 더 이끌리는 것이다. 모두가 돈을 벌기보다 다수가 돈을 잃고 소수가 돈을 얻는 시스템을 훨씬 좋아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성격의 문제다. 공평과 불공평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관심사는 자신의 이득이다. 자신에게 득이 될 확률이 낮는 높든 가능성만 있다면 일단 돈을 걸고 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하는 활동, 건 판돈과 주식과 뽑은 복권이 이득이 되기를 바란다. 책에서는 허황된 꿈이라 소개한다.
수학은 탐구하는 머리를 기르게 한다. 생각하는 법과 이 세상을 체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좋은 사람은 수학에서 천재적일 수밖에 없다. 이세상을 수로 정리하는 것이 수학이니 말이다. 이런 수학의 천재적인 파스칼은 나에게는 하늘 위에 구름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스칼이 팡세에서 소개하듯 성인들의 머리는 높을 지 몰라도 결국 그 발은 나와 같이 바닥에 붙어 있다.
질문
1. 파스칼이라는 사람의 바닥은 무엇일까?
2. 복권과 보험이 무모함과 지혜로 나뉘는 이유는 허황된 마음과 만약의 상태를 대비하는 마음의 차이라고 책에서는 소개한다. 신에게서 벗어나 불확실한 것을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기준으로 이행하는 것은 분명히 잘된 되었다 할 만하다. 헌데 어쩌면 만약의 상태를 대비하는 마음도 신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후에 잘못되어 지금까지 이룬 것을 날리지 않게 대비하는 마음은 아닐까? 마치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남유다가 앗수르의 압박에 못 이겨 애굽과 손잡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애굽과 손잡은 것처럼.
과학자 파스칼
우리 삶의 현상을 설명할 뿐인 학문 과학. 언제부터 과학이 성경에 대항마가 되었는지. 만약 진실로 과학이 성경의 대항마라면 그 사실 만으로 성경은 틀렸다는 증거이다. 과학은 그저 현실을 말하는 것일 뿐으로. 물론 현대에 와서도 과학은 한계와 추론이 상당히 많긴 하지만 말이다.
진공이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부인하였을까? 불통. 한 단어로 설명이 된다. 이해하려고, 대화하려고 한번의 시도조차 없다. 현대의 기독교가 그렇고 세속적 학자들이 그러하다. 종교로 평가받는 여러 교리들도 서로 대화하려 들지 않는다. 모두 자신이 혹 틀린 것일까? 하는 두려움이 넘쳐나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임을 확신할 때는 열린 마음과 온유한 태도를 갖출 수 있음으로.
근데 또한 놀라운 것은 예수회가 진공을 반대한 이유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 또 다른 과학 이론에서 나왔다(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론). 현대에 와서도 여러 학파들이 과학 이론을 아예 받아드리지 않거나, 모든 과학 이론을 받아드리거나 하는 것에서 문제를 겪는다. 예수회는 둘 다 해당된다. 남극과 북극은 필요하다. 이런 학파들의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극과 남극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은 되지 못한다.
과학이 성경을 먹으려 한다. 피조물의 이론이 창조주의 말씀을 능가하려 하는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 한 것을 같이 나아가려 하니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닌데 왜 자꾸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만드려는 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시에 성경은 소설이 아니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물이 아니다. 현실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헌데 왜 현실과 이질감을 느끼게 하려고 애쓰는지 모르겠다. 만나를 내리신 하나님이 지금 계시고, 양치기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이 지금 계신다.
어떠한 과학적 사실이 발견된다 하여도 기독교의 신앙은 흔들리기만 할 뿐 꺾이지는 않는다. 과학은 이성의 영역이고 신앙은 이성과 영혼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
1. 과학과 신학(신앙)은 어떻게 동행할 수 있는가?
2. 불통하지 않으려면 여러 소통의 장이 필요하다. 과학을 뛰어 넘어 다른 타 종교들과의 소통 또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
3. 진리를 확신할 때 열린 마음과 온유한 태도를 갖는다고 책에서 설명한다. 진리를 확신하려면 분명한 부분을 깊이 확신하고 그 부분이 굳건히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시선으로 보면 확신하는 부분이 틀렸다고 밝혀지면 진리의 확신은 곧 완벽한 진리의 불확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진리를 확신하는 부분/이 부분이 틀리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
신학자 파스칼
모든 신학적 답은 성경에 있다. 그럼에도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오여곡절이 있는 이유는 성경을 성경대로 받아드리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은혜밖에는 구원을 향한 길이 없다. 지금은 두말하면 입아픈 당연한 교리일지 몰라도 당시 예수회는 이단으로 규정했다. 신앙적으로 살면서 세속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정당화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기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임들도 같은 현상을 보인다. 세상과 성경의 중립지역에 서길 바란다. 진리가 앞에 있다 하여도 자신이 이미 몸을 담구고 있는 쾌락에서 몸을 일으키기란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는 찾아온다. 문을 닫아도 조금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불의밤. 누가 예고하였나? 논리적인가? 개인의 사정이나 생각이 영향을 끼쳤나? 누구는 예수회를 따르고 누구는 얀센주의를 따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불의밤, 성령의 압도이다. 논리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신 경험에 압도 당하여 그 충만으로 성경을 들여단 본 사람만이 성경을 본래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문학자 파스칼
파스칼의 생각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그 표현력이다. 중3수학도 이해못하는 나에게 그 놀라운 생각을 이해시키는 것은 그의 문학적 표현력에서의 놀라운 지혜때문일 것이다.
생각하는 갈대. 인간의 생각(상상력) 얼마나 놀라운가? 우주의 광대함을 볼 때 인간은 한없이 작아져 압도 당한다. 얼마나 작고 부질없는 존재인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또 놀라운 존재인가?
바닥에 떨어질 수 있는 이유는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있는 것이 비참하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본래 더 높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수 있는 이유는 아직 본래의 자격을 모두 박탈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비참하면서도 위대하다.
왕이 거지가 되었다면 어떻게 그 비참함을 극복하리랴? 아무리 내가 거지인 것을 알고 이 위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왕이었던 과거의 지혜 때문이라 할지라도 결국 현재 내 위치는 거지이다. 과거의 영광이 없는 마음의 공백을 어찌 채울 수 있으리랴? 공백을 채우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약에도 손을 대보고 바닥에 깔린 불륜업소 전단지에 연락도 돌려본다. 하지만 채울수 없다. 왕이었던 영광은 거지의 행동으로 채울 수 없다. 오직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본래의 왕좌와 왕관 뿐이다.
파스칼의 내기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안되는 부분도 있다. 결론은 마음에 든다. 감상평이다.
육체, 이성, 정념, 영혼의 차이와 정의가 궁금하다. 앞으로 평생의 질문일 것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 은혜이다. 파스칼의 논리보다 날 더욱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은 파스칼의 순수한 믿음이다.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든 표현하려 하는 그 행동이다.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팡세를 계속 읽게하는 원동력은 그의 논리가 아니다. 어린 아이가 자신이 막 배운 수학을 부모에게 설명하는 듯한 글에서 보이는 쓴이의 즐거움이다.
파스칼의 내기도 나에게는 똑같이 이해된다. 이해가 되는 부분과 안 되는 부분, ‘놀랍도다!’하며 감탄하는 되는 부분과 ‘뭔소리야…’하며 감탄하는 부분 모두 파스칼의 기도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인간은 육체도 필요하고 이성이 필요하다. 이것을 탐구하기에 열심이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대학을 가기 위해 원서를 적는 일이다. 믿기 위한 걸림돌을 치우는 일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점수와 의지가 있어야한다. 뛰기 위해서는 뛸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오로지 영혼으로 이어지는 감동과 깨달음이다. 유가 무한을 알기 위해서 유가 할 일은 존재하는 것과 유와 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것뿐이다. 자신의 한계 넘어에 있는 지식은 본인의 힘으로 결코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한계가 있고 그 너머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최선이다. 아이가 선생에게 가르칠 것은 없다. 그런데 아이가 선생의 특성과 생활과 지혜와 속사정을 선생에게 기르치려한다. 모순 아니겠는가? 아이는 가르치는 것이 아닌 선생에게 배우는 것이며 아이는 선생에 대해 알 수 없고 오직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아이의 낮은 지식안에서 선생을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는 어떤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부터 그의 한량없는 은혜 아니겠는가? 우주에 비해 무에 다른 없는 이 인간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부터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신은 더욱 선하셔서 의지를 주시고 권리를 주신다. 이것으로 인간은 마음껏 틀어지고 망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나아가니 모든 것이 그의 은혜 아래에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이해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으나 벗어날 수도 없다.
하고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은 많으나 할 말은 하나다 오직 은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