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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 효 석
의외에도 재도 자신의 휼계¹임을 알았을 때에 현보는 괘씸한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으나 문득 돌이켜 딴은 그럴 법도 하다고 돌연히 느껴는 졌다. 그제서야 동무의 심보를 똑바로 들여다본 것 같아서 몹시 불유쾌하였다. 그날 밤 술을 나누게 되었을 때에 현보는 기어코 들었던 술잔을 재도의 면상에 던지고야 말았다.
“사람의 자식이 그렇게도 비루하여졌더냐.”
“오, 오해 말게. 내가 무엇이기로 과장이 내 따위의 말에 따라 일을 처단하겠나. 말하기도 전에 자네의 옛일을 다 알고 있데. 항상 그렇게 조급한 것이 자네 병이야. 세상에 처해나가려면 침착하고 유유하여야 하네. 좀더 기다려보게나.”
“처세술까지 가르쳐줄 작정이야?”
이어 술병 마저 들어 안기려다가 현보의 손은 제물에²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문득 재도의 위대한 육체가 눈을 압박해오는 까닭이었다. 아무리 발악한대야 ‘유유한’ 그 육체에는 당할 재주가 없을 것 같았고 그 육체만으로 승산은 벌써 한풀 꺾인 것을 깨달았다. 서로 떨어져 있는 몇 해 동안에 불현듯이 늘어난 비대한 그 육체 속에는 음모와 권술과 속세의 악덕이 물같이 고여 있을 듯이 보였다. 그와 자기와의 사이에는 벌써 거의 종족의 차이가 있고 건너지 못할 해협 이 가로놓여 있음을 알았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하고 느껴지며 옛일이 꿈결같이 생각되었다.
“아예 오해 말게. 옛날의 정이라는 것도 있잖은가.”
“고얀 놈.”
유들유들한 볼따구니를 갈기고 싶었으나 벌써 좌석이 식어지고 마음이 글러져서 싸움조차가 어울리지 않음을 느꼈다. 거나한 김에 도리어 다시 술을 입에 품는 동안에 가늠을 보았던지 마침 재도 편에서 먼저 자리를 벌떡 일어나서 무엇인지 핑계의 말을 남기고 자리를 물러섰다.
“음칙한 것 ―.”
또 한 수 꺾인 현보는 발등을 밟히고 얼굴에 침을 뱉기운 것 같아서 속심지가 치밀며 그럴 줄 알았더면 당초에 놈의 볼따구니를 짜장 갈겨두었더면 하고 분한 생각이 한결같이 솟아올랐다.
그제 와서는 모든 것이 뉘우쳐졌다. 무엇을 즐겨 당초에 하필 그 있는 곳으로 자리를 구하려고 하였던가. 옛날에 동무가 아니라 동지이던 그 우의를 의지한 것이 잘못이었고 둘째로는 그 자리를 알선하여준 옛 스승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앞길이 막히고 형편이 곤란하다 하더라도 구구하게 하필 그런 자리가 차례에 왔던가. 하기는 결과는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니 당초에야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기는 하였으나 재도는 한방에서 일 보게 될 옛날의 동무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현보의 덮여진 전 일을 들추어내서 과장의 처음 의사를 손쉽게 뒤집어버린 것임을 현보는 늦게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현보에게는 수수께끼요 신비였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의 여위었던 육체가 몰라보리만큼 비대하여진 것같이 그의 마음의 바탕 그것을 믿을 수 없으리만큼 뒤집어놓은 것은 대체 무엇 이었던가―생각이 여기 이를 때에 현보는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저지른 사건도 있고 하여 학교를 나오자마자 현보는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동경을 헤매었다. 운동 속으로 풀쑥 뛰어들어가지는 못하였으나, 그 가장자리를 빙빙 돌아치면서 움직이는 모양과 열정들을 관찰하여 간신히 양심의 양식을 삼았다. 물론 그를 그렇게 떠나보낸 것은 젊은 마음을 움켜잡은 시대의 양심뿐만이 아니라 더 가까운 그의 가정적 사정이었으니 일개의 아전으로 형편이 넉넉지 못한 데다가 그의 부친은 집 밖에 첩을 둔 까닭에 가정은 차고 귀찮아서 그 싸늘한 공기가 마침 현보를 쫓아 고향을 떠나게 하였던 것이다. 하기는 늘 그를 운동의 열정으로 북돋우게 한 것도 직접 동력은 그것이었던지 모른다. 그가 동경 에서 상식을 벗어난 기괴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고향과는 인연이 전혀 멀었다. 그 아득한 소식 속에서 재도는 학교 시대에 현보와 등분으로 가지고 있던 똑같은 사회적 열정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오로지 일신의 앞길을 쌓아 올리고 안전한 ‘출세’ 의 길을 열기에 급급하였다. 물론 시세의 급격한 변화가 의외에도 갑작스럽게 밀려온 까닭은 있다면 있었다. 철학과를 마친 재도는 철학을 출세의 장기로는 부적당하다고 여겨 다시 법과에 편입하여 삼 년 동안이나 행정의 학문을 알뜰히 공부하였다. 갑절의 햇수를 허비하고 쓸모 적은 학위를 둘씩이나 얻어서 ‘출세' 의 무장을 든든히 했던 것이다. 고등문관 시험이 절대의 목표였으나 해마다 실패여서 아직껏 과장급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이미 수석의 자리를 잡아 이제는 벌써 합격의 날을 기다릴 뿐으로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뼈를 가는 노력을 한 것이니 그 노력을 하는 동안에 인간의 바탕이 붉은 것에서 대뜸 검은 것으로 변하였다. 너무도 큰 변화이나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조금도 꺼릴 것이 없게 되고 세상 또한 그것을 천연스럽게 용납하게 되었다. 다만 오랫동안 갈라져 있게 된 현보에게만ㅡ피차의 학교 시대만을 알고 그사이에 시간의 긴 동안이 떨어졌던 현보에게만 그것은 놀라운 변화로 보였을 뿐이다. 중학교 시대부터 대학까지를 같이한 그사이의 가지가지의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옳은고 하고 현보는 마음속이 갈피갈피 어지러워졌다.
어린 때의 민첩한 마음을 뉘 것 할 것 없이 한 번씩은 다 끌어보는 것은 문학의매력이다. 자라서 자기의 참된 천분의 길을 발견하고 하나씩 둘씩 떨어져 달아날 때까지는 그 부질없는 열정을 누구나 좀체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현보와 재도 들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숙성한 셈이어서 중학교 이년급 때에 벌써 동인 잡지의 흉내를 내었다. 월사금을 발려가지고 모여들 들어 반지를 사고 묵사지를 사서는 제 식의 원고를 몇 벌씩 복사하여 책을 매어 한 벌씩 나누어 보는 정도의 것이었으나 그 얄팍한 책을 가지게 되는 날들은 장한 일이나 한 듯이 자랑스러운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고들 하였다. 자연히 동인끼리는 친한 한패가 되어서 학교에서도 은연중에 뽐을 내고 다른 동무들의 놀림을 받고 그들과 동떨어지게 되는 것을 도리어 기삐하였다. 잡지의 내용인즉은 대개 변변치 못한 잡지 쪽에서 훔쳐온 글줄이거나 간혹 독창적 인 것이 있다면 유치하기 짝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그렇게 모여든 기분만은 상 줄만한 것이 있어 그것이 한 아름다운 단결의 실례를 보이는 때도 있었다. 잡지 첫 호 첫 장에 삭진들은 실릴 수 없고 하여 각기의 필적으로 이름들을 적었으니 육칠 명 어지럽게 모여든 이름들 속에서 현보와 재도의 이름이 가장 큼직하게 눈에 띄었다. 자라서 의사도 되고 공학사로도 나가고 혹은 자취조차 감추어버리고들 한 가운데에서 현보와 재도만이 끝까지 인연을 가지게 된 것도 생각하면 기묘한 일이다.
달의 차례가 돌아와 현보의 집에서 모이게 된 날 밤늦도록 일을 하다가 마침내 심상치 않은 장난이라고 노려본 현보의 아버지에게서 톡톡히 꾸중을 당하게 되었다. 한마디 거역하는 수 없이 그대로 못마땅한 얼굴로 헤어질 수밖에는 없었으나 책임을 느낀 현보는 그날 밤에 미안한 김에 술집에 들러서 동무들을 위로하게 되었다. 이것이 술을 입에 대게 된 시초였다. 얼근한 판에 현보는 부친의 무지를 비난하고 술버릇으로 소리를 높여 울었다. 심사풀이로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은 드러누운 채 학교를 쉬었다. 사흘 되는 날 재도에게서 그림엽서의 편지가 왔다. 고리키의 사진 뒤편에는 위안의 말과 함께 이 당대의 문호의 소식이 몇 자 적혀 있었다. 그 짧은 글과 사진은 현보에게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 살뜰한 감격이 깨뜨려질까를 두려워하여 그 한 장
의 엽서를 한 권의 책보다도 귀히 여겼다. 현대의 문호 고리키의 사적을 재도가 자기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한 큰 놀람이었고 귀한 그림을 아끼지 아니하고 보내주는 동무의 마음씨가 고마웠고 셋째로는 폐병으로 신음 중에 있다는 그 문호의 애달픈 소식이 웬일인지 문학으로 향한 열정을 한층 더 불 지르고 북돋았다. 다음 날부터는 곱절의 용기를 가지고 학교에 나갔다. 재도에게는 일종의 야릇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문학의 열정은 더욱 높아져서 그 후 동인 잡지가 부서지고 동무들이 다시 심상한 사이로 돌아가게 되어버린 후까지도 재도와 현보의 뜻은 한결같았고 사이는 더욱 친밀하여졌다. 동인 잡지가 없어지고 학년이 높아감에 따라 신문과 잡지에 투고하는 풍속이 시작되었다. 외단으로 실려진 시나 산문을 가지고 와서는 서로 읽고 비평하기가 큰 기쁨이었다. 투고 중에서 가장 보람 있고 듬직한 것은 신년 문예의 그것이었으니 재도들이 처음으로 그것을 시험한 것은 마지막 학년의 겨울이었다. 재도와 현보는 전에 동인 잡지에 한몫 끼었던 또 한 사람의 동무를 꼬여 세 사람이 그 장한 시험을 헛일 삼아 해보기로 작정하고 입학 시험 준비의 공부도 잠깐 밀어놓고 학교를 쉬면서 각각 응모할 소설들을 썼다. 추운 재도의 방에 모여 화롯불에다 손을 녹이면서 각각 자기의 소설들을 낭독한 후 격려하고 예측하고 한 그날 밤의 아름다운 기억을 배반하고 비웃는 듯이 소설들은 참혹하게도 낙선이고 다만 한 사람의 동무의 것이 선회가작으로 뽑혔을 뿐이었다. 재도와 현보의 실망은 컸다. 더구나 재도는 조그만 그 한 일로 자기의 천분까지를 의심하게 되었고 문학에의 열정에 큰 타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에는 벌써 두 사람 사이에는 숨어서 술을 즐기는 버릇이 늘어서 화가 나는 때는 항상 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낙선의 소식을 신문에서 본 날 밤 현보는 단골인 뒷골목 집에서 잔을 거듭하면서 울분을 토하고 기염을 올리면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까짓 신문쯤이 명색이 무어야. 신문에 안 실리면 소설 낼 곳이 없나.”
거나한 김에 재도는 눈을 굴리며 식탁을 쳤다.
“현보 낙망 말게. 지금 있는 신문쯤에 연연한다면 졸장부. 참으로 위대한 문학과 지금의 신문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야. 현재 조선에 눈에 걸리는 소설가라고 한 사람이나 있나. 그까짓 신문쯤으로 위대한 작가를 발견할 수는 없단 말야.”
현혹한 기염으로 방 안의 공기를 휘저어놓더니 현보의 무릎을 치며,
“홧김에라도 내 잡지 하나 기어이 해보겠네. 내 몫으로 차례진 백 석지기만 팔면 그까짓 조선을 한번 온통 휘저어놓지. 옹졸봉졸한 소설가쯤이야 다 끌어다가 신문과 대거리해볼 테야. 신문의 권위쯤이 무엇이겠나. 자네 소설 얼마든지 실어줌세. 그때는 내 잡지에 실려야만 훌륭한 소설의 지표를 받게 될 것이니까. 가까운 데 것만 노려보고 대장부가 문학 문학 하고 외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야. 낙담 말고 야심을 크게 가지세.”
찬란한 계획에 현보는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자라면 잡지를 크게 경영하여보겠다는 것이 그의 전부터의 원이기는 하였다. 앞으로 올 백 석지기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사용함이 온전히 그의 자유라는 것도 전부터 들어는 왔었다. 그러나 맹렬한 그 잡지의 열정도 결국은 자기의 문학의 욕심의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일 것이니 그의 그날 밤의 불붙는 희망은 문학에 대한 미련一따라서 낙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현보는 간파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무엇에 홀리었던 취중의 그날 밤이 지나고 맑은 정신의 새날이 왔을 때에 현보는 자기의 간파가 더욱 적중하였음을 깨달았다. 낙망하지 말라고 동무를 격려한 재도 자신의 문학에 대한 낙망은 컸던 것이다. 거의 근본적으로 절망의 빛을 보였다. 야심을 크게 가지라고 동무에게 권한 그 자신의 야심은 날이 지날수록에 간곳없이 사라졌다. 하기는 문학에 대한 야심이 차차 다른 것에 대한 그것으로 형상을 변하여 모르는 결에 그의 마음 속에서 점 점 굵게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사상과 혈족 관계가 가까운 듯하며 문학의 길은 사상의 길로 통하기 쉬운 것 같다.
재도와 현보가 중학을 마치고 예과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게 되있을 때 다 같이 철학적 사색을 즐겨 하게 되었으며 시대의 사상에 민첩하였고 과외의 경제의 연구에까지 뜻을 두게 된 것도 전부터의 같은 혈연 관계가 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약속이나 한 듯이 경제 연구회의 임원으로 함께 가입하여 그것이 마침 해산을 당하게 될 때까지 회원임을 지속한 것은 반드시 일종의 허영심으로 시대의 진보적 유행을 좇은 것만은 아니었다. 현보는 드디어 조그만 행동까지를 가지게 되었으니 당초에 문학을 뜻한 그로서 그것은 결코 당치 않은 헛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구회의 와해는 시대의 변천의 큰 뜻을 가지어서 그 시기를 한 전기로 젊은 열정들은 부르게도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재도의 오늘의 씨를 품게 한 것도 참으로 이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때의 재도와 오늘의 재도를 아울러 생각함은 마치 붉은 해를 쳐다보다가 그 눈으로 별안간 검은 개천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아서 머리가 혼란하여지는 것이다. 그때의 재도는 그때의 재도로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다.
대학 예과에서는 일 년에 두어 차례씩의 친목의 모임이 있었다. 가제 들어간 첫해 봄의 친목회는 다과를 먹을 뿐만의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발행할 조그만 잡지의 계획을 의논하여야 하는 것으로 일종 특별한 사명을 띤 것이었다. 의논이 분분하고 의견이 백출하여 자연 좌석이 어지럽고 결정이 늦었다. 여러 시간의 지루한 토론에 해는 지고 모두들 지쳐서 이제는 벌써 결정은 아무렇게 되든 속히 회합이 끝나기만 기다리는 지경 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모여서 한번 입을 열게만 되면 이론은 간단하면서도 말이 수다스러워짐은 어느 사회나 일반이어서 조그만 지혜가 솟으면 그것을 헤쳐 보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불필요한 말을 덧붙여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지고 쓸데없는 고집으로 정당한 말을 일부러 뒤집어보려고 하는 것이 거의 누구나의 천성이어서 잠자코만 있으면 밑진다는 듯이 반드시 그 어느 기회에 입을 한 번씩은 열어보고야 만다. 그 어리석고 저급한 공기에 삭막한 환멸을 느끼며, 무료한 하품들을 연발할 지경 이었으나 별안간의 벽력같은 소리에 좌석은 문득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수다스러운 의논에 싫증이 난 한 사람이 홧김에 찻잔을 던져 깨뜨린 것이다. 뭇사람의 눈총을 받은 그 당돌한 학생은 엄연히 서서 누구엔지도 없이 고래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하였다.
“대체 이것이 무슨 꼴들인가? 요만한 일에 해가 지도록 의논이 분분해서 아직껏 해결이 없으니 그따위의 염량³들을 가지고 일을 하면 무슨 일을 옳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냉큼 폐회하기를 동의한다.”
돌연한 호담스러운 거동에 진행 중의 의논도 잠깐 중지되고 모두들 담을 떼우고 할 바를 몰라 잠시 그 무례한 발성자를 우두커니들 바라볼 뿐이었다. 지친 판에 통쾌한 한 대였고 동시에 주제 넘은 한마디였다. 그 자신 홧김에 충동적으로 나왔을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또한 심중에 그 거동의 자랑스러운 의식이 없었을까. 사실 그는 그 간단한 거동으로서 제각각 ‘영웅’ 이 되어보려는 총중에서 가장 시기를 잘 낚아 효과적으로 손쉽게 ‘영웅’ 이 된 것이다. 확실히 행동 자체가 흐려진 분위기에 한 대의 주사의 효과는 있었으나 그 동기의 관찰이 좌중에 꼴사나운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초년급인 그는 하급생의 지위로서 상급생까지를 휘몰아 호통의 주먹을 먹인 셈이 되었다. 이윽고 상급생의 한 사람이 긴장된 장내를 헤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더니 분개한 꾸지람으로 아니꼬운 ‘영웅’ 을 여지없이 조겨놓았다.
“주제넘은 친구가 누구냐. 버릇없는 야만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거리에 나가 대로상에서나 할 일이지 어떻게 알고 이런 자리에서 그런 무지한 버르쟁이를 피우느냐. 누구를 꾸지람하자는 어리석은 수작이야. 일이 늦어지는 것은 아무의 탓도 아닌 것이다. 여럿이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적당한 계제를 밟은 후에 결론에 이르는 것 이니 쓸데없이 조급하게 구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어린애의 버릇에 지나지 못한다. 다시는 그런 버릇 없기를 동무로서 충고한다.”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장내는 고요하고 긴장되어서 그 무슨 더 큰 것이 터질 듯 터질 듯한 무시무시한 침묵이 흘렀다. 좌중은 두번째의 통쾌한 자극에 침체되었던 무료를 깨우치고 시원한 흥분 속에서 목을 적신 셈이었다. 상급생의 의젓한 꾸지람도 물론 시원스러운 것이었으나 당초의 하급생의 통쾌한 거동의 자극이 너무도 컸던 것이다. 시비와 곡직은 둘째요 사람들은 솔직하게 두 가지의 자극 속을 헤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때의 승패는 이치의 시비에보다도 완전히 행동의 자극에 달린 것이다. 승리는 뒤보다도 앞으로 기운 모양이었다. 더구나 꾸지람에 대하여 반 마디의 대꾸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침착하게 주저앉은 것이 약한 것이 아니라 기실은 더 굳세다는 인상을 주어서 그 효과는 거의 만점이었다. 현보는 한편 자리에 앉아서 유들유들하고 뻔질뻔질한 그 동무의 뱃심을 놀라움과 신선한 감정 없이는 바라볼 수 없었다. 찻잔을 깨뜨린 그 무례한 ‘영웅’ 은 별사람 아니라 재도였다.
이 조그만 재도의 행사를 생각할 때 현보는 한 줄의 결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담스러운 호통을 하고는 결국 꾸지람을 당한 것이 마치 중학 때에 자신 있는 소설을 투고하였다가 결국은 낙선을 하여버린 그 경우와도 흡사하였다. 두 번 다 나올 때는 유들유들하게 배짱을 부리고 나왔다가 결국은 그 무엇에게 보기 좋게 교만을 꺾이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당초의 뱃심만은 소락소락 꺾이지 않고 끝까지 지긋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성격인 것같이 현보에게는 생각되었다. 그 배짱 속에 항상 야심이 숨어 있고 그 야심의 자란 방향이 오늘의 그의 길이 아니었던가.
호담스럽게 나왔다가 교만을 꺾인 예라면 또 한 가지 현보의 기억 속에 있었다.
대학 안에서의 연구회가 한창 성할 무렵이었다.
하루 저녁 예회 아닌 임시회를 마치고 늦은 밤 거리에 나왔을 때 재도는 현보와 함께 또 몇 잔을 거듭하게 되었다. 술이 웬만큼 돌았을 때 재도는 불만의 어조였다.
“오늘 S의 설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자랑과 아첨과 교만에 찬 비루한 길바닥 연설 이상의 것이 아니야. 학문의 타락을 본 것 같아서 불쾌하기 짝 없었네. 대체 S라는 인간 자체가 웬일인지 비위에 맞지 않어. 혼자만 양심이 있는 척하고 안하무인이나 기실은 거만의 옷자락으로 앞을 가리웠을 뿐이 아닌가. 회 자체까지도 나는 의심 하게 되네. 모이는 위인들에게서 자존심과 허영심을 제하면 무엇이 남겠나.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무엇이 있겠나. 마치 회원 아닌 사람과는 종족이 다른 척하는 눈꼴들이 너무도 사납단 말야. 사실 그 축에 섞여 회원 되기가 부끄러워. 자네는 어떤가. 그 유에서 빠질 수 있겠나.”
쓸데없는 불쾌한 소리에 현보는 짜증을 발칵 내며 빈속에 들어간 술의 힘도 도와서 그의 손은 모르는 결에 재도의 볼을 갈기고 있었다. 갈기고 나서 문득 경솔함을 뉘우치게 되는 그런 거의 무의식 중의 일이었다.
“자네 생각이 그르다는 것은 아니나 하필 그런 것을 생각하는 대도가 틀렸단 말이네. 그야 인간성을 말하랴면 그 누구 뛰어난 사람이 있겠나.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하필 그런 것이어야 하겠나. 그런 것만 꼬집어내다가는 까딱하면 옳은 길을 잃고 빗나가기 쉬우니까 말이네.”
의아한 것은 재도는 그 이상 더 대거리하려고도 하지 않고 현보의 말에 반박도 하지 않고 잠시 잠자코 있었음이다.
“그럴까. 내 생각이 글렀을까. 그러나 그런 것이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지. 이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일는지도 모르니까.”
“또 궤변이야. 내용이 좀 비지 않었나. 그런 소리만 할 젠.”
“주제넘은 실례의 말은 삼가게ㅡ회원이든 회원이 아니든 행동이 없는 이상 오십보백보가 아닌가. 회원이라고 굳이 뽐내고 필요 이상의 교만을 피울 것은 없단 말이야. 그 위인들 속에 장차 한 사람이라도 행동으로 나갈 사람이 있겠나. 내 장담을 두고 보게.”
“고집 두 어지간히는 피운다.”
“자네 생각과 내 생각은 아마도 근본적으로 틀리는 모양이네. 마치 체질이 서로 틀리듯이.”
현보가 그만 침묵하여버린 까닭에 말은 거기에서 끊어져버렸다. 재도의 괴망한 생각이 현보에게는 한결같이 위험하게만 생각되었다. 동무에게 볼을 맞으면서도 대거리는 하지 않으나 마음속에는 그의 독특한 배짱이 변함없이 서리어 있을 것 이 현보에게는 분명히 들여다보였다.
그 후로 두 사람의 거리와 생활이 갈라지게 되었으므로 다정한 모임으로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으나 생각하면 재도의 마지막 한마디가 두 사람의 근본적 작별을 암시한 무의식중의 한 선언이었던 듯이도 현보에 게는 생각되었다.
-끝-
2016년 6월1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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