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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2)
본문요지
당 창건 임무를 완수하고 당내 기회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 정치신문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무기였다. 따라서 당 창건 이후에도 당 기관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였으며,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실력’은 무엇보다도 당 기관지를 발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였다.
전체 목차
제1장 러시아혁명 시기의 정치신문
제2장 ‘이론과 실천의 통일’ 문제
제3장 볼셰비키당 조직의 특징과 정치신문의 발전법칙
제4장 여론과 노동자투쟁, 현대 정치신문
▲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의 지도자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레닌)이다.
제1장 러시아혁명 시기의 정치신문
여기선 주로 러시아 혁명기의 정치신문 및 그와 관련된 레닌의 신문사상을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볼셰비키주의 탄생 시기, 제1차 러시아 혁명 발발과 1910년 초의 시기, 1910년 노동운동의 새로운 고조기에서 1917년 10월 혁명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제1절 1898년 3월~1905년 1월 시기 정치신문
1898년 3월~1905년 1월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볼셰비즘이 출현한 시기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봉건적 제국주의국가이었다. 독점자본주의와 농노제의 잔재가 뒤섞임으로써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이 같은 압박과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이 수도 페테르부르크 등 주요 산업화된 도시에서 잇따라 발생하였다. 그 영향을 받아 농민운동 역시 전국의 광범위한 농촌지역을 휩쓸었으며, 대규모 노동과 농민운동은 다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도 수업을 중단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러시아 혁명의 분위기가 날로 성숙해지고 점점 다가오는 긴박한 정치 형세는,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전체 러시아혁명을 통일적이고 집중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임무를 중대한 과제로 제출하였다.
1.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립 시기 정치신문
이 시기는 1898년 3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 대회가 열렸던 때부터 1903년 8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까지를 말한다.
1898년 3월 13일 러시아의 서부 도시인 민스크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대회가 비밀리에 개최됐다. 참석자는 모두 9명이었는데, 그들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등지에서 온 '투쟁동맹'과 러시아 서부지역 노동자단체 소속이었다. 대회는 당의 성립을 선포하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전제제도의 질곡에서 벗어나 사회주의가 승리할 때까지 끈기와 의지를 갖고 자본주의와 자본가계급과 지속적으로 싸워 나갈 것을 천명하였다. 대회는 또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노동자신문]을 당의 기관지로 선정하였다.
비록 이 대회는 형식상으론 당의 성립을 선포하였으나 당 창건 작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엔 당 강령과 규약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도 대회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통일적인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놓고,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대립되는 두 가지 방안이 제출되었다. 하나는 제2차 당 대회를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여 당 중앙기구를 새로 선출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각 지방 조직들을 통일할 수 있고 당 창당을 완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견해에 완강히 반대하면서, 당 대회를 개최하기에 앞서 당의 목적과 임무를 먼저 명확히 할 것, 그리고 건설하고 싶은 당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많은 지방조직과 활동가들은 당내의 사상적, 조직적 혼란 상태가 가져오는 해악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그들은 지방의 협소한 실무에 빠져 중앙 집중적이고 통일적인 당 건설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유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의 당 창건 방안은 전국적인 정치신문 계획과 긴밀히 연관되었다. 그는 “전국적인 러시아 정치신문 창설이야말로 마땅히 행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원하는 조직을 만드는 첫 번째 실질적인 절차”1)라고 주장했다. 1900년 12월 24일 마침내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레닌과 플레하노프 등 일부 망명가들의 주도 하에 전국적인 러시아 맑스주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 창간호가 출간되었다.
[이스크라]의 당 창건에 대한 공로는 이하의 ‘사상’과 ‘조직’ 양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이스크라]의 당시 주요 논쟁 대상은 ‘경제주의파’였는데, 레닌은 ‘경제주의파’와 사상적 경계선을 명확히 긋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을 새로운 혁명정당 건설의 첫 번째 조건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이스크라]는 1호부터 경제주의자들이 운영하는 [라보차야 미즐], [라보체예 델로] 등의 잡지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레닌은 경제주의파의 기회주의적 본질을 철저히 파헤치는 동시에, 대중의 ‘자발성’과 혁명조직의 ‘의식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규명하였다. 또 경제투쟁뿐만 아니라 전제정치와 자본주의제도 전반에 대해서도 투쟁해야 한다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혁명노선을 제시하였다. [이스크라] 편집부는 이와 함께 레닌의 제안에 따라 당 강령 초안도 마련함으로써, 이후 당 창건을 위한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
다음 ‘조직 건설’ 측면을 보자면, [이스크라]는 이하 4가지 점에서 기여를 하였다.
첫째, ‘민주집중제’ 사상을 널리 알리고 그것이 당의 조직노선으로 확립되는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스크라]는 창간호부터 ‘당내 생활’이란 칼럼난을 두고, 여기에 전문적으로 당 조직 건설과 관련된 100여 편의 글을 실었다. 이들 글에서 [이스크라]는 ‘어떤 당을 만들지’에 관한 적극적 주장을 펼치면서 ‘민주집중제’ 조직원칙을 적극 옹호하였다.
둘째, ‘배포자그룹’의 결성을 통해 당의 골간을 육성하고, 지방조직 간의 실질적인 연계를 확보하였다. 이들 배포자그룹은 레닌이 직접 만들고 관리하였다.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지방 사업은 일정한 대중적 토대가 있긴 하였지만, 각 지방조직들은 분산된 채 수공업적 방식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이러한 편협한 분산성을 극복하고 전국적 단결을 이루는 것은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절실한 과제였다. 그를 위한 적절한 형식이 요구되었는데, ‘배포자그룹’ 담당자들은 신문 배달을 통해 각 지방 조직을 연계하였으며, 조직이 없는 곳에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선전과 선동 및 조직사업을 수행하였으며, 신문에 기고할 통신 등을 수집하였다. 재정지원을 위한 모금활동도 벌였으며, 지방조직의 문서 공급, 신문 수송, 전송 및 복제, 지하 인쇄소 건설과 같은 임무들을 수행함으로써 조직역량의 전국적인 통일적 배치를 실현함과 함께 지방 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셋째, 지방조직의 지지에 바탕을 둔 전국적 ‘사상(思想)중앙’을 수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스크라]는 노동자계급 해방의 조건으로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건설, 그를 위한 노동자-농민의 계급동맹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수립 등 당의 궁극적 임무와 조건을 명확히 밝혔다. 또 사회주의적 과제와 민주주의적 과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간의 올바른 관계 설정, 전국적으로 통일된 당 건설을 위한 과정과 방법 제시, 국내외 정세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전술 방침의 제시와 같은 러시아 국내 활동가들이 실천과정에서 부딪히는 민감하고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지방조직들과 광범위한 선진노동자층으로부터 그 사상적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배포자그룹을 매개로 각 지방위원회와의 연계를 구축함으로써 실질적인 당의 사상적 지도중심을 세우는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였다.
넷째, 제2차 당 대회 개최를 위한 실질적인 조직 작업을 책임졌다. 배포자 수가 늘어나고 배포자그룹이 확대됨에 따라, 1902년 1월 말경 [이스크라]는 당 대회에 앞선 배포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배포자그룹으로 구성된 ‘[이스크라] 전 러시아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그것은 레닌의 창당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이었으며 그의 직접적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바로 이 조직에 의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기틀이 세워졌으며, 1903년 7월 제2차 당 대회 개최를 위한 직접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처럼 [이스크라]의 이론, 전략전술, 조직 문제에서 수행한 혁명노선과 배포자그룹에 의한 실제 조직 사업의 덕택으로, 처음 경제주의에 기울어졌던 지방조직들의 태도가 하나둘씩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대부분 [이스크라] 진영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3년 가까운 경제주의파와의 결연한 투쟁을 통해 그동안 각자 소규모로 분산되었던 사회주의 조직들은 하나로 묶여졌으며, 마침내 새로운 맑스주의 정당 건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는 이처럼 사상적, 조직적으로 당을 단결시키는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이스크라]를 당의 정식 중앙기관지로 선언하였다.
1903년 11월 신(新)[이스크라]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스크라]는 총 51호가 발간되었다. 레닌은 이러한 [이스크라]의 실질적 조직가이자 편집자이었으며, 이 시기 자신의 대부분의 정력을 신문 사업에 바쳤다.
2. 볼셰비키주의 탄생 시기의 정치신문
볼셰비즘이 탄생한 시기는 1903년 8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가 끝난 직후부터 1905년 1월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이다.
1903년 7월 30일부터 8월 23일까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가 브뤼셀에서 런던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당 대회 직후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이스크라]파의 내분으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갈리어졌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당 대회에서 승인된 강령에 충실하도록 애썼지만, 멘셰비키는 대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할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감히 자신들만의 신당을 결성하려 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본국 노동자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만약 자신들이 새로운 당을 건설할 경우 노동운동의 분열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혁명주의 노선의 볼셰비키와 기회주의 노선의 멘셰비키 간에 십 수 년에 걸친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당의 운명과 러시아혁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제 2차 당 대회 정신을 수호하고 동시에 당의 심각한 분열 상태를 극복해야 할 임무가 볼셰비키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당내 정세는 레닌과 볼셰비키에게는 대단히 불리하였다. 2차 당 대회 직후 멘셰비키는 당을 기만하고 은밀하게 마르토프, 트로츠키, 악셀로이드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적 파벌 조직을 만들었다.2) 그 목적은 당의 공식적인 중앙기관을 견제하고 당 사업을 파괴함으로써 당의 지도권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후 멘셰비키는 두 개의 당 중앙기관을 차례로 탈취했는데, 1903년 11월에 [이스크라]를 먼저 탈취하였으며 1904년 7월에는 중앙위원회마저 탈취하였다. 그들이 이렇듯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당 중앙 내에서 ‘화해 분자’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해 분자’란 플레하노프를 지칭한다. 그는 당내 화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회주의자에게 양보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진지를 적에게 내주는 것”3)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애초 당 대회가 결의한 정신을 수호하고 당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당 대회(3차 당 대회)를 개최하자는 방침을 채택했다. 레닌은 당내 특히 당의 중앙 지도기관 내에서 이처럼 심각한 분열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당 대회를 개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올바른 해결책도 상상할 수 없다”4)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2차 당 대회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새로운 당 대회를 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선 먼저 당내에서 발생한 분열에 대해 사정을 잘 모르는 국내 활동가들을 위해 그 진상을 정확히 설명하고, 멘셰비키의 기회주의적 정체를 낱낱이 폭로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경제주의파’의 기회주의적 면모는 이미 여지없이 드러나 그들은 이미 몰락하였지만, 새로운 기회주의세력인 멘셰비키에 대해 당은 아직 그들의 진짜 면모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레닌과 볼셰비키는 당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많은 당원과 선진노동자들을 위해 2차 당 대회와 관련된 전반적 내막을 알려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기록>(1903년 9월)을 출간하였다. 1904년 2월~5월에 출간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는 레닌이 이 시기에 쓴 중요한 문건이다. 이 문건을 통해 당원과 수많은 선진노동자들은 당이 분열한 진정한 원인과 멘셰비키의 기회주의적 본질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멘셰비키의 거친 공격을 분쇄하고, 기회주의 노선과 완전히 결별하여 사상적 조직적으로 당을 재결집하기 위해선 볼셰비키에게는 더욱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기관지 즉 정치신문을 갖는 것이었다. 멘셰비키는 [이스크라]를 탈취한 후 그것을 반당적인 기관지로 변질시켰으며, 이제 그것은 기회주의를 선전 선동하는 논단으로 바뀌었다. 멘셰비키는 다수파인 볼셰비키의 존재를 일부러 무시한 채, 자신들이 장악한 신[이스크라]에서 ‘논전’을 취소하는 등 마치 사업에만 충실히 매진하는 모습으로 위장하였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는 자신의 독자적인 기관지를 가져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레닌은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1904년 11월)에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
“자신의 출판 기구가 없으면 다수파는 근본적으로 방어 할 수가 없다. …… 예나 지금이나 정기적인 기관지가 없으면 안 된다.”5)
이 시기 후반에 접어 들면 자신의 기관지를 만드는 일은 볼셰비키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심지어 그것은 애초 당 대회를 개최하려던 임무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당 대회 개최와 정치신문 발간 이 두 가지 임무에 대해, 레닌은 1904년 12월 3일 <보그다노프, 로사 제믈라치카, 마마 리비노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다수파의 해외기관지 창설을 미루는 것은 (그를 위해선 현재 비용이 부족할 뿐이다) 더욱 용서할 수 없다. 현재 모든 관건은 이 기관지에 있다. 이것이 없으면 불명예스럽고 필연적인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6)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당 대회 개최를 위한 선전선동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당 대회 개최’라는 구호를 버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어린애들만이 그것만을 요구하며, 관건은 실력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7) 레닌은 지금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권위’(즉 당 대회)가 아니라 근본적인 ‘실력’이라고 하면서, 이를 위해선 “먼저 해야 할 것은 기관지, 기관지, 또 기관지를 만드는 일이다”8) 라고 강조하였다.
레닌과 동지들의 노력으로 1904년 12월 22일, 볼셰비키의 비합법신문인 [전진]이 제네바에서 창간되었다. 이후 그것은 멘셰비키에 반대하여 당성(黨性)을 회복하는 투쟁에 있어, 그리고 혁명운동의 전략을 제시하고 전파하는 데 있어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의 경험을 통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당 창건 임무를 완수하고 당내 기회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 정치신문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무기라는 점이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멘셰비키가 당 중앙 기관지를 장악한 조건에서 당내 투쟁에 임하게 되는 지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피동적 국면의 근본적 전환은 볼셰비키가 1904년 말경 자신의 기관지인 [전진]을 창간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당 기관지가 당 안팎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는 데 있어 갖는 역할은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차르전제 하의 러시아에서 합법적 연단이 거의 없는 조건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게는 당 창건 이후 계속해서 출현하는 당내 기회주의세력과 맞서 당의 사상 및 조직적 통일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당 기관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였다.
둘째,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실력’은 무엇보다도 당 기관지를 창설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였다. 당 기관지 창간은 편집진과 일군의 전문 기고가를 확보하는 문제 일뿐만 아니라, 통신원고, 자금, 러시아로의 밀반입 등 많은 물질적, 기술적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당 기관지를 출판하는 일은 당 사업의 핵심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당헌에 규정된 형식상의 최고기관인 ‘당 대회’보다도 더 실질적인 의미를 지녔다.9) (계속)
[본문 주석]
1)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레닌전집》 제5권,인민출판사 1986년판, p6, 베이징.
2) 당시의 당내 상황과 관련하여 다음 내용을 참조. “대회가 끝나자마자 멘셰비키들은 곧 마르토프, 트로츠키, 악셀로드 등을 수뇌부로 하는 반당적 분파조직을 만들었으며, 그들은 당의 중앙기관을 보이콧트하고 당 활동을 혼란시켜 당의 지도권을 탈취하려 하였다. 마르토프가 표현한 바와 같이 멘셰비키들은 ‘레닌주의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멘셰비키의 반당투쟁의 거점이 된 것은, 지식인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노동대중과 연계가 전혀 없는 ‘재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연맹’이었다. 멘셰비키들은 이 거점을 이용하여 차례차례 당의 중앙기관을 장악해 갔다. 당 중앙의 기관들을 장악하는 방책은 1903년 9월 제네바에서 열린, 17명으로 구성된 멘셰비키 분파 회합 석상에서 이루어진 멘셰비키 뷰로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뷰로의 멤버는 마르토프, 단, 포트레소프, 악셀로드, 트로츠키였다고 한다.” 황인평 엮음, 1985년,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Ⅰ>, 거름, pp83-84.
3) 위의 책, p71.
4) “제3차 당 대회 개최 문제에 관한 발언”, 《레닌전집》제8권, 인민출판사 1986년판, p150, 베이징.
5)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 《레닌전집》제9권, 인민출판사 1987년판, p84, 베이징.
6) 《레닌전집》제44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509, 베이징.
7) 이상, 위의 책, p509. 굵은 글씨 강조는 원저자에 의한 것임.
8) 위의 책, p510.
9)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현황을 논함>(1912년) 에서, 신문발행 횟수와 발행량을 가지고 당내 각 파벌 간의 '공개 활동' 역량의 비교를 한 적이 있다. 예컨대 “청산파는 1912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러시아력) 페테르부르크에서 16차례 [현대사업보]와 5차례 [네바의소리보] 등 모두 21차례 신문을 발행하였다. 反청산파는 같은 6개월 동안 [스타] 33차례, [네바스타보] 14차례, [프라우다] 53차례 등 모두 100호의 신문을 냈다. 21 대 100이었다. 청산파와 당(볼셰비키당)의 러시아에서의 힘의 대비가 바로 이러하다.” 또 “신문 발행 수는 어떠한가? 라트비아인들은 청산파가 3만 부를 발행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숫자는 과장되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반청산파 신문과 관련해선, 어떤 이(하아즈 동지와 다른 위원이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는 집행위원회에 발행부수가 6만부라고 말했다. 이 점에서 청산파의 영향력과 당의 영향력의 대비를 1 대 10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 《레닌전집》제21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447, 베이징. 여기서 1:10의 비율은 위 발행 횟수 비율이 대략 1:5인 점과, 발행 부수 비율이 1:2인 점 양자의 종합적인 결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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