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유언을 쓴다 (외 1편)
이호준
새벽부터 유언을 썼다
그림자보다 먼저 집 나서서 들길을 한참 걸었고
오는 길에 편의점 들러 우유와 맥주를 샀다
집에 와서 조금 오래 씻은 뒤
얇게 썬 늙은 오이 살짝 절여 초장에 무치고
어제 얻어온 배추 넣어 된장국 끓였다
아침 먹은 뒤 볶은 원두 곱게 갈아 밀봉해두었다
오늘도 유언이 꽤 길 것 같다
내가 페루 해변으로 간 새*처럼 못 돌아오면
흐트러진 이불은 악몽에 몸부림친 새벽을 증언하겠지
흙 묻은 신발은 갈림길 앞의 망설임을 전하고
젖은 수건은 만조滿潮의 절망을 열변하겠다
냉장고를 열면 온갖 유언으로 어지럽겠지
남은 우유는 숲으로 망명하고 싶었던 속내를 떠들고
맥주캔은 오지 않은 시를 투덜대겠다
배추된장국은 내 아이들을 사랑했다고 자백하고
노각무침은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토설할 테지
조금 많이 갈아놓은 헤이즐넛 커피는
끝내 향기롭고 싶었던 욕망을 차마 감추지 못하고
읽다가 귀 접어 둔 시집 82쪽은
늦은 밤 꾹꾹 눌러 삼키던 눈물을 털어놓겠지
나는 날마다 감동적인 유언 한 줄 쓰기를 꿈꾸지만
문장은 갈수록 창호지 문처럼 축축해지고
지난 유언장 뒤져 함부로 뱉은 다짐 지우고 싶고
사는 거, 그깟
이십 년 살던 집 파는 서류에 도장 찍고 오는 길
아이들 다니던 학교 담장 밑에 산국 곱다
돌부리에 걸린 척, 내 집을 돌아본다
작년에 절집 불목하니도 그만뒀으니 집도 절도 없다,
생각하니 허전하다 그러다 이내 고개 젓는다
저 꽃은 들보 하나 얹은 적 없어도 환하게 웃지 않느냐
재산세 같은 건 잊고 살아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사는 건 맹물로 허공에 그린 그림 같아서
한 뼘도 안 되는 길을 평생 헐떡이며 걸어왔다
열 켤레 넘는 구두굽이 바깥쪽만 닳아 없어진 뒤
남은 건 기울어진 어께
사는 거, 그깟…
주춤거리며 따라오던 아내가 밥이라도 먹고 가잔다
단골로 다니던 추어탕집으로 간다
아이를 키운 집 넘기고 정든 동네 떠나려니 서운하겠다
그대와 나, 한 시절 뜨겁게 생을 외쳤느니
밥보다 먼저 소주 한 병 주문한다
언제 우리 다시 이렇게 앉아 서로의 손에 젓가락 쥐여줄까,
제피가루 너무 많이 넣었다고 툴툴거려볼까,
생각하니 또 잠깐 먹먹하다
모처럼 마신 낮술이 걸음마다 매달린다
오늘이야 아내가 있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101번 버스에 취한 몸 실을지 몰라서
현관문에 머리 댄 채 삐삐삐삐 비밀번호 누를지 몰라서
머릿속에 남아 있던 숫자 몇 개 얼른 지운다
사는 거, 그깟…
― 시집 『사는 거, 그깟』 2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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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 1958년 출생. 2013년 《시와 경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