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목조건축의 수작, 불국사 대웅전
불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대웅전은 석탑과 석등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데 비해 18세기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져 관람자의 흥미가 반감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대웅전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여러 차례 재건과 수리를 거쳤으며 지금 건물은 영조 41년(1765)에 다시 세워졌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기단과 주춧돌 위에 조선 후기의 짜임새 있는 목조건축을 올렸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에 단정한 팔작지붕을 올리고 기둥 위로는 18세기 특성을 살린 가지런하고 치밀한 다포식 공포(栱包)를 짜서 처마를 받쳤다. 공포의 세부 장식은 바깥보다 내부를 더 화려하게 치장했는데, 금빛 찬란한 석가 삼존불이 후불벽의 화려한 채색과 한데 어우러져 예불 공간의 장엄이 한층 돋보인다. 또한 목구조 끝을 동물 모양으로 새긴 장식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기둥을 생략해 실내를 넓게 쓰려는 의도를 살린 창의적인 목구조 짜임은 이 건물에서 주목할 점이다.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대웅전 중창 공사의 총 책임자는 승려 서악당 도태였으며 목수는 쾌연을 우두머리로 한 18명의 호남 승려와 10여 명의 영남 승려였다고 한다. 공사 2년 후에는 단청을 새롭게 하고 다시 2년이 지난 1769년 들어 석가 삼존불을 개칠하며 부처 뒤에 탱화를 걸었는데 이때에도 호남 출신 승려가 작업을 도맡았다.
쾌연은 전라도를 기반으로 활약한 이름난 승려 목수로 1754년 해남 미황사 대웅전 수리, 1757년 화엄사 대웅전 수리 그리고 1756년에 영광 불갑사 대웅전을 새로 지은 경력의 소유자였다. 비록 쾌연이 목수 일로 이름이 나 있다고는 하지만, 호남에서 활동하던 승려가 멀리 경상도 동쪽 끝에 있는 불국사의 건축 공사에 참여한 까닭은 무엇일까?
영호남의 활발한 기술 교류가 빚어낸 보물
답은 불국사 대웅전 중창 공사를 총괄한 도태에게서 찾을수 있다. 도태는 17세기 불교계를 풍미한 걸승 벽암 각성의 6세(6世) 제자였다. 각성은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승병으로 활약하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의승군을 이끌고 산성 축조를 완수한 인물이었다. 이후 화엄사를 수리해 큰 절로 만들고 쌍계사를 중수했으며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재건 불사를 이끌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각성은 많은 제자를 키워냈는데, 이들은 호남은 물론이고 통도사, 기림사 등 영남의 손꼽히는 사찰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각성의 제자들은 사찰에 불사가 있으면 영남과 호남을 가리지 않고 서로 왕래하며 힘을 기꺼이 보탰다. 1705년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수리할 때는 화엄사 장륙전을 중창했던 성능이 와서 작업을 하고, 1719년 기림사 대적광전의 소조삼세불 개금에도 호남의 화승이 영남 승려와 손을 잡고 일을 했는데 이들은 모두 각성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쾌연이 각성의 제자였는지 여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그가 불국사 대웅전을 짓게 된 배경에 호남과 영남의 승려 교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재건 공사가 활발했던 18세기는 이런 기술 교류가 드물지 않았다. 더욱이 각성의 법맥을 잇는 도태가 불국사 중창을 총괄하면서 호남의 유능한 승려 목수를 초빙한 일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국사 대웅전은 18세기의 손꼽히는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석가탑이나 다보탑에 묻혀서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다가 근래에 와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구조나 양식 자체의 가치도 크지만, 각성이라는 뛰어난 스승이 배출한 제자들을 통해 영남과 호남이 손을 합쳐 건축 공사를 이루어내고 불화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일깨워 준다.
글. 김동욱(경기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2-9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