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 배우기
여섯 살 들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두 줄 즉 여덟 자를 가르쳐 주시고 이튿날 아침에 그것을 익혔는지 시험하셨다. 어떨 때는 글자를 잊어벼려서 우물쭈물하면 아버지는 고함을 치시며 꾸지람을 내리셨다. 그럴 때면 옆에서 ‘살살 달래어 가르치라’고 아버지께 일러 주시던 할아버지가 고맙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좀 무리가 가는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겨우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하루 여덟 자를 말로만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매일 다 외우고 쓰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좀 과한 욕심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럭저럭하여 천자문 한 권을 다 떼었다. 그때 우리 집을 새로 지었는데 추춧돌에 一, 二, 三, 四와 같이 한자로 써놓은 번호를 내가 읽고, 세재중원(歲在中元)으로 시작되는 상량문도 읽어 나가니 일하는 어른들이 모두 놀라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하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할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동네 어른들이 노는 동사(洞舍)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거기에 모인 노인들이 내가 천자문을 배웠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나더러 ‘날 등(騰)’ 자를 써보라고 하였다. 나는 ‘구름 운(雲) 날 등(騰) 이룰 치(致) 비 우(雨)’라는 구절을 외우고 나서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에 ‘날 등(騰)’ 자를 썼다. 그걸 보고 어른들이 칭찬을 해 줬는데 어떤 노인은 ‘물건 같으면 밤에 훔쳐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시었다. 이를 들은 할아버지께서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날 등(騰)’ 자가 획수가 많기 때문에 과제를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천자문을 배우면서 일어난 일화도 많다. 한번은 이웃집에 가서 그 집의 형이 사용하는 참고서에 붓으로 잉크를 찍어 배운 천자문을 써대어 책을 못 쓰게 한 적이 있었다. 형은 그것을 나중에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철이 없는 어린이가 저지른 짓이라 어쩔 수 없었던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리라.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자의 훈과 음만 가르쳐 주시고 구절의 뜻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빚어진 나 혼자만의 어처구니없는 해석도 더러 있었다. ‘진숙열장(辰宿列張)’의 열장을 종이를 셀 때의 ‘열 장[十張]’이라 생각하였던 일은 그 일 예다. 또 ‘비늘 린(鱗) 잠길 잠(潛) 깃 우(羽) 날개 상(翔)’이란 구를 익힐 때 ‘깃 우’의 뜻을 몰라 헤매던 일이다. ‘깃’이 새의 털이란 걸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투리로 ‘달털이기’만 알았지 새털을 ‘깃’이라 하는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 우’를 발음할 때 ‘기두’로 들려 더욱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 답이 떠올랐다. 톱을 경상도 사투리로 ‘거두’라 하였으므로 ‘기두’가 톱이란 ‘거두’를 떠올린 것이다. 더구나 ‘깃 우(羽)’ 자의 모양이 톱날 두 개를 상형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구의 ‘언제호야(焉哉乎也)’ 곧 ‘잇기 언(焉) 잇기 재(哉) 온 호(乎)잇기 야(也)’를 배우고 그 뜻을 몰라서 헤매던 기억은 어제처럼 선명하다. 이 구절의 ‘잇기’와 ‘온’은 무슨 뜻일까 하는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이 뜻을 정확히 안 것은 훗날 대학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잇기’는 ‘입겿’이란 말을 힘을 덜 들이려고 줄여서 읽은 것인데, 입겿은 토 즉 어미나 조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입겿은 받침에 대한 정확한 의식이 없던 당시에는 입겾 혹은 입겻으로도 적었다. ‘온’은 乎(호)의 이두식 음으로, 현대어의 겸양 선어말 어미인 ‘-오-’의 관형사형 어미다. 이를테면 ‘하온’, ‘하올’ 할 때의 ‘온’이다. 예를 들면, 하온(爲乎)은 현대어 ‘한[did]’의 겸양의 뜻이고, ‘하온 일[爲乎事]’는 ‘한 일’의 겸양, ‘하온가[爲乎去]’는 ‘한가’, 하온지[爲乎喩]는 ‘한지’ 등의 겸양을 나타낸 의미다.
천자문은 초학(初學)의 학습서이지만 천지의 이치와 역사와 문학 같은 인간사가 그 안에 다 담겨 있다. 그래서 정약용 같은 이는 천자문이 통감절요와 함께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자랄 때 이 천자문에 나오는 한 구절 ‘망담피단(罔談彼短) 미시기장(靡恃己長)’을 가훈으로 삼았다. ‘딴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말라’는 뜻이다. 아이들이 성년이 된 지금도 이 구절을 가끔 외우곤 한다.
이처럼 천자문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야기가 전부 들어 있다. 천자문의 귀중함을 담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어느 부잣집에 귀한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글을 가르칠 나이가 되어 좋은 스승을 찾게 되었다. 이리저리 알아보았으나 마땅한 선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기를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집에 들른 어느 선비에게 아무 곳에 훌륭한 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곳은 백여 리가 떨어진 먼 곳이었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아이를 데리고 이튿날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에게 아이를 보이며 인사를 드리자, 선생은 별로 아는 것이 없어 잘 가르칠 능력이 없다면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부자는 선비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서, 속으로 괜히 사양한다 싶어 몇 차례나 간곡히 청하여, 마침내 문하에 둘 것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아이를 맡겨 둔 이상, 선생을 믿고 자주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 부자는 아들을 좋은 선생 밑에 보냈으니, 여느 접장 밑에서 배우는 아이들보다 몇 곱절이나 높은 공부를 빨리 해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기쁜 마음에 하루라도 빨리 가서 아들의 공부한 이력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주 찾아오지 말라고 한 선생과의 다짐 때문에 가 볼 수가 없었다.
이러기를 거의 1년이 지났다. 인근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은 천자문을 끝내고 책거리 잔치를 한다고 야단들이었다. 이것을 본 부자는, 우리 아들은 훌륭한 선생 밑에 보냈으니 저들보다 훨씬 높은 동몽선습, 명심보감 정도는 끝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들을 보러 갔다.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본 부자는 깜짝 놀랐다. 아들이 아직 ‘하늘 천’ 자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워낙 훌륭한 선생이라 들었기 때문에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럭저럭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인근 아이들은 이제 명심보감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보통 선생 아래 공부하는 아이들도 저 정도가 되었는데, 우리 아이야 지금쯤은 소학 정도는 읽었을 것이라 자위하면서 아들을 보러 집을 떠났다. 이번에도 부자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아직도 하늘천 자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왕 맡겼으니 조금만 더 두고 보자며 선생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한 해가 다 되었다. 이웃집 아이들은 이제 논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쯤은 논어는 아니라도 명심보감은 마쳤으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보러 떠났다. 학당에 도착한 아버지는 또 한 번 소스라쳐 까무러칠 뻔하였다. 아직도 ‘하늘 천’ 자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본 그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으로 헐레벌떡 돌아와 버렸다. 속이 터지고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을 보낸 후 하도 속이 상해 아들을 보고, ‘이 바보 같은 놈아, 이웃집 아이들은 벌써 이런 책을 읽는데, 너는 아직까지 ’하늘 천‘ 자도 못 배웠느냐’며 홧김에 옆에 있는 논어를 아들에게 집어 던졌다. 논어를 주워 든 아들은 이런 정도는 벌써 배웠노라고 하면서 줄줄 읽어 내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아버지는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아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기를, 하늘의 이치를 다 배우고 며칠 안 있으면 조금 남은 땅의 이치를 다 배워 공부를 끝내려는데, 아버지가 와서 막무가내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뉘우친 아버지는 다시 아들의 손을 잡고 선생에게 찾아가서 아들을 다시 맡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 아이는 이미 바람이 들어버려 더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만 돌아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