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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많은 산에 낙엽이 많이 쌓였습니다. 길인지 산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돌맹이 많은 길에 돌맹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 밟으면 미끄러집니다. 다치기 십상이지요. 조심, 평소보다 느려도 조심하여 다녀야 합니다. 이제는 한번 다치면 회복하는데 시간이 전보다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아주 불편하고 힘든 시간을 지낼 수 있습니다. 더디 가도 다치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기분 따라 움직였다가는 다치고 후회합니다. 누워서 후회하지 말고 시간을 붙잡고라도 천천히 가자는 것입니다.
다음 주간이 아마도 단풍의 절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길게는 중순까지도 가겠지요. 근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하기야 요 며칠이면 지나가겠지만 말입니다. 그만한 시간도 되었습니다. 덕에 단풍이 더욱 짙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민적 아픔이 쉽게 거두어지지 않겠지만 우리는 또 살아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전진해야 합니다. 하지만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아니하면 덧나지요. 다시금 어영부영 지나갈 일은 아닙니다. 주변을 살피며 고칠 것은 고치고 누릴 것은 누리며 11월 한 달도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2022년 11월 5일 김종우 목사 드림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이사야 41 : 14)
<나를 죽여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옛날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았을까? 이제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즘도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면 뭔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정상인이 느끼는 것과 장애를 가진 본인이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당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아픔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상인이 그들의 필요를 온전히 느끼기도 힘들고 그러니 그것을 채워주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필요가 점점 더 채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민석’과 아들 ‘현재’ 두 식구 주변에 현재를 돌보며 오라비 민석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현재의 고모 ‘하영’과 장애인 활동지원사 ‘기철’ 그리고 민석의 애인(?) ‘수원’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한 사람씩 처한 상황을 풀어봅니다.
민석 : 작가였지만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려 글쓰기를 포기합니다. 가끔 강의를 나가지만 주로 민석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고 짬나는 시간에 수원이 경영하는 꽃집에 가서 쉬다 옵니다. 물론 그 사이 하영이가 현재를 지킵니다. 또 기철이가 같이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불치병, 어쩌면 아들보다 더 고통스럽고 나아가 점점 죽어가는 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로 나타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어갑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아들입니다.
현재 :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비교적 밝게 지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성장은 계속됩니다. 성인이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이성에 눈을 뜨는 것과 몸이 성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발기가 됩니다. 어떻게 해결해야지요? 어느 이성이 자기 같은 장애인을 좋아하고 안나주고 키스를 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아버지가 목욕을 시켜주는데 발기가 됩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하영 : 인간관계에 상처가 있습니다. 특히 이성관계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남녀교제, 원하면서도 그 상처가 더 이상의 교제를 막고 있습니다. 원하지만 진전이 없습니다. 어쩌면 두려워서 스스로 기피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빠를 도우며 현재를 보살피는 것으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기철 : 복지관 소개로 알게 된듯합니다. 그렇게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현재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문제는 기철이 자신이 정신적인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표현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데 때로는 그 감정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키기도 합니다. 심성이 악하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 상황 통제가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수원 : 남편이 있음에도 이름만 남편인 듯합니다. 한번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집에나 오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혼자 지내는 것 같습니다. 서류에만 존재하는 남편이라고 할까요? 민석과는 처음 작가와 독자로 만난 것 같습니다.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서로 위로해주며 의지가 되었겠지요. 민석의 병을 알고 나서도 더 헌신적으로 곁을 지키려 합니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부모의 바람입니다. 자식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자. 장애를 가지고 홀로 산다는 것, 어렵지요. 요즘은 사회 안에 복지시설이 많이 준비되어 있고 또 제도가 구비되어 있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구하는 조건에 합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다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점점 더 좋아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바람은 자기 슬하에서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과 혜택이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사랑의 손길을 따라갈 만한 돌봄은 없을 것입니다. 그 부모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본인 아픈 것보다 자식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가장 치명적인 수치는 아마도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가장 개인적인 용무를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 일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인데 그래서 가장 개인적인 처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여깁니다. 창피하고 자존심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마지막으로 택할 수 있는 존엄사,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자존심입니다.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장애인의 사랑과 성 문제, 장애인의 생활 독립, 존엄사 인정 여부, 사회적 복지제도와 나아가 가족의 확장문제 등 앞으로 우리 모두 보다 깊이 생각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나를 죽여줘’(Kill me now)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멀쩡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 좀 다시 해봅시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게 있습니다. 남들이 다 이렇다고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데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수업태도에 화가 난 선생님이 학생 전체에게 누워서 자전거 페달 밟기 벌칙을 주었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녀석만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화가 나서 윽박질렀지요. 야, 너는 왜 가만히 있어? 그러자 학생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지금 내리막길을 가고 있거든요. 다들 벌을 주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에 이의가 생길 수도 없는 일이지요. 일상적 생활이나 비즈니스 세계이던 간에 사람들이 행동하는 데는 보편적인 유형의 사고 패턴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반화된 사고(고정관념)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생겨난 것이겠지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남들처럼 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남들과 정반대로 가야 살 길이 있고, 성공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다시 한 예를 보겠습니다. 건물과 건물사이 골목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곳에 만든 커피숍을 지역의 명소로 만든 경우이지요. 일반적인 평가로는 전혀 커피숍을 할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쉽게 눈에 띄는 곳도 아닙니다. 아마도 거기다 커피숍을 차리겠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장사할 줄 모르는 바보라고 평했을 것입니다. 고객들의 일반적인 걸음걸이로 볼 때, 골목입구 앞은 단 3초면 지나치게 됩니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하여 이 커피숍은 약점을 극복하고 고객을 끌어 들였습니다. 어떤 조치를 하였을까요? 입구에 테마를 준 것이지요. 골목을 활용해서 그 골목길에다 자갈을 깔고 철길을 만들고 입구에 철로신호등을 설치했습니다. 아니 여기에 웬 철로야?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심에서 철길을 걷는다니 대단한 흥밋거리 아닙니까? 하나 둘 고객들이 찾아왔고 자연 이야기꺼리가 되어 명소가 된 것이지요.
한번 자리 잡은 고정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탈피하지 아니하면 발전은 없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눅 5 :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묵은 것, 오래 된 것, 이미 우리가 익숙한 것 그것을 내려놓고 새 것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이지요.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쉽게 용납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나마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 정말 그런가? 하는 질문을 해보는 겁니다. 발상의 전환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똑같이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이 달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매어있던 당신의 백성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지요. 요 8 :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동안 혹시 남들 다 그러려니 생각한다고 해서 우리도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간 것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대부분의 일상이 그렇게 이어집니다.
자 이제 우리는 세례 요한이란 사람을 보고자 합니다. 일단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거든요.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 역사 속에서만 보아도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도 솔로몬도 견줄 수 없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아마 모세를 하늘처럼 생각하던 당시 유대인들이 모두 이 말씀을 들었더라면 또 한 번 야단이 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요.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마 21 :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이 대답합니까?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지 못합니다. 속으로는 ‘사람에게로서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러선 백성들이 두려웠지요. 그래서 대답을 기피한 것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1. 길 예비 사자
예수님이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마 11 : 7 - 10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옛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바로 말라기의 글입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주님이 오시기 전에 그 길을 예비하려고 사자가 먼저 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앞서 세례 요한이 먼저 온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당신 자신은 언약의 사자로 세례 요한은 길 예비 사자로 올 것을 말씀한 것이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마 3 : 11 - 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는 복음서에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 3 : 1 - 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사 40 : 1 - 3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말하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입니다. 그곳에 외치라는 것은 바로 그곳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구원의 선포와 구원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한 이방 여인이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사정을 할 때 바로 그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리고 이사야 예언의 말씀 가운데 또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 다음 말씀입니다. 분명히 예루살렘에 말하라고 해놓고서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루살렘에 말하고 외치라 해놓고 어찌하여 광야이고 사막에서 예비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광야와 사막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곳에는 양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 백성이 먹어야 할 양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진리의 말씀이 없다는 뜻이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제사장들 사두개인들을 세례 요한이 뭐라고 질타했는지 들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 3 :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 즉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의 자식들에게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들 속에 진리도 없고 진리에 서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광야이며 사막입니다.
오늘 우리가 출입하고 있는 교회가 그런 꼴이 되었다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분명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율법을 강론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려서 명절을 당해 그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성전에서 선생들과 들으며 물으며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2 : 41 - 47). 그런데 참 진리의 말씀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네 교회에서도 때마다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계명인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아니하면 생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구정물을 마시는 꼴이 된다는 말입니다. 먹으면 영생하는 물이 아니라 먹으면 죽는 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어떠했습니까? 행 17 :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는 자세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수이기 때문이지요. 생명이 달려있는데 건성으로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세히 검토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답은 성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목자가 전해주는 말도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세례 요한의 사역
앞에서 세례 요한이 이미 예언된 ‘길 예비사자’로 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사역을 하였는가 보도록 하지요. 마 3 : 4 - 6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으로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회개의 증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다시 복음을 증거해준 것입니다.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증거합니다(행 18 : 24). 그런데 그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행 18 : 25 “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래서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그렇지요? 세례 요한은 예비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고 생명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요. 행 19 : 3 - 5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아멘!
세례 요한 자신도 자기의 처지를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메시야인가 하는 소망이 있었겠지요. 요 1 : 19 - 20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한 대” 그리고 이어 23절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했듯이 ‘길 예비사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이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지요. 29 - 30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아멘!
세례 요한은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자였습니다. 나중에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증거합니다. 요 3 : 28 - 30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니라” 길 예비사자의 임무는 바로 거기까지입니다. 전해주고 자신은 소리 없이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마땅히 자기 제자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보내야 했습니다. 문제는 말은 그렇게 했는데 그의 제자들이 요한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 사명이 끝났으면 넘겨주고 물러서야지요. 그런데 왜 남아있도록 그냥 두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이 온 유대에 전파되고 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려줍니다. 그러자 요한이 딴 짓을 합니다. 눅 7 :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더니 이제는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의 결과
당시 유대는 분봉왕 헤롯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헤롯 왕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좋지 못한 짓을 하였습니다. 무시무시했던 헤롯 1세부터 그 자손들이 그랬지요. 그 중 한 자가 자기 동생의 처를 빼앗아 아내로 삼습니다. 마 14 : 3 - 4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결국은 그 일로 말미암아 죽음에까지 이릅니다. 헤롯은 유대인도 아닙니다. 자기 백성도 아닌데 괜스레 남의 집안 사정 간섭하다가 옥에 갇히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이었는가?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그에게서 성령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는 예수님을 보고 제대로 고백하였지요. 요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멘! 그가 뭐라 말합니까? 33- 34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헤롯 집안일에 간섭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앞에서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보았습니다. 마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1 : 2 - 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게 도대체 무슨 변고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당신이 맞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지요? 하나님이 이미 세례 요한을 떠나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아니하면 그 촛대를 옮긴다고 하십니다. 계 2 :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옛날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 고집대로 나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 촛대를 다윗에게로 옮기신 것이지요.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은 ‘길 예비 사자’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 백성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벧전 4 :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하신 말씀처럼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그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괜스레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보다 더 큰 사명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 세상사로 인하여 자기 사명을 축소시켜서는 안 되었습니다. 백성을 언약의 사자로 오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길 예비사자였습니다. 본업을 져버리고 딴 것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대부분 세례 요한을 순교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 덕분인가요?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생각을 바꿔보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1 :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을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침노를 당한답니다. 누구 짓일까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침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자기 집을 침노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마귀 짓이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 때부터랍니다. 쉽게 말하면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사자로 왔지만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침노를 당하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하고 딴 짓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떠난 것입니다. 이제 무슨 힘으로 마귀 세력을 이깁니까? 그래서 당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셨듯이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 곧 마귀 소속의 백성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침노를 당했고 마귀가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가 천국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서 지혜의 왕이 되었지만 결국 하나님을 등졌던 솔로몬과 같은 운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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