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의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선을 행할 때,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트에서 카트를 제 자리에 가져다 놓는 행동 같은 것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무데나 두고 가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 있겠나?’라는 생각에 나 역시 아무데나 놓고 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이러한 작은 선, 사실 선이라기 보다는 상식적인 행동이지만 남들이 다 이 상식을 버린다 해도 상식을 지키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행했을 때 내 마음에 큰 만족감이 자리 잡습니다. 반대로 양심을 거스른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우리 마음이 깨어지게(상하게) 되고 그 깨진 마음으로는 마음의 기능인 '믿는 것'을 잘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신앙생활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것은 또 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good)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양심을 버리면 믿음에 관하여서 파선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심의 뜻을 좀 더 설명해야 합니다. 착한 양심은 영어로 ‘좋은 의식’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죄 의식'이 죄를 의식하는 것이라면 양심은 선과 악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과 악을 의식하는 양심을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한 것이 착한(good) 양심입니다. 즉, 착한 양심이란 아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내 마음이 나를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요일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이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발휘됩니다.
가끔, ‘완전한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나?’라는 질문을 받는데 그것은 마치 ‘내 맘대로 해도 된다니 그러면 저 벽에 머리를 좀 박아도 되나?’와 같은 질문입니다. 말씀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지요.
우리가 양심에 옳은 행동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면 정죄를 받은 그 마음은 믿음을 발휘할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 구하는 것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내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기만 하면 받습니다(막 11:23). 그런데 양심의 가책이 있을 때, 그것이 믿음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 말씀의 원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며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안전장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