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05
4월24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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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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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UDDVdR0ru8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4409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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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복음 20장 28절)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복음 20장 29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 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 매 순간이 부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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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DQBpBcYb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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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나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변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토마스 사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머지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토마스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나머지 동료들이 바보이고 그래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한 명의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마스에게 죄의 용서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을 죄 없으신 어린양이요, 하느님으로 믿지 못하면 나에게 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토마스도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는 상황이 많이 바뀝니다.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주님도, 하느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찌른 사람이 죄가 없음이 판명되었을 때 그 사람의 수준만큼 깨끗해집니다. 상대가 죄가 없음이 증명되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2021)은 경찰관을 살해한 이유로 감옥에서 20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루스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루스는 다섯 살인 동생 케이트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케이트는 단란한 가정에 입양되고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케이트는 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케이티의 양부모는 20년간 루스로부터 편지를 받았지만, 케이티를 위해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루스는 차이나타운의 허름하고 낡은 집에서 생활하며 생선 공장과 목공 일을 병행합니다. 그러나 케이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자기 이전 집에 사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접근금지 명령을 넘어서 동생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변호사는 케이티의 양부모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케이티에게 관심을 끊을 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편지를 다 감추었다는 것을 안 루스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그렇게 변호사도 더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루스는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합니다. 거기서도 경찰관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루스를 좋아하던 남자도 루스가 경찰관을 살해한 사람임을 알고 등을 돌립니다. 루스에게 살해당한 보안관의 두 아들은 루스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럴려고 하지 않았지만, 루스가 사회에 적응을 잘해 나가자 열을 받은 것입니다.
케이티의 양부모의 딸인 에밀리는 부모가 하는 말을 엿듣고 루스가 보낸 편지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루스를 만나 케이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곳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죽은 보안관의 두 아들은 에밀리를 케이티로 착각하고 그녀를 납치합니다. 한편 동생을 만나도 되는지 허락받기 위해 변호사의 집을 찾은 루스는 변호사의 아내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그러자 루스가 말합니다. 그때 케이티는 다섯 살이었다고.. 다섯 살이 무엇을 알았겠느냐고.. 루스는 동생을 위해 대신 감옥에 가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에밀리를 유괴했던 스티브는 루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릅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루스는 그곳으로 가고 스티브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려고 뒷문을 따고 들어오던 것이었는데 케이티가 말릴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입니다. 이에 스티브도 후회하고 총을 내려놓습니다. 나중에 케이티는 아무 말 없이 언니 루스를 안아줍니다.
루스가 출소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 루스를 보던 이들은 모두가 그녀를 용서 못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뿐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루스는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의 죄를 밝혀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다행히 영화에서는 그녀의 진심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죄인 취급했던 이들이 뉘우쳤습니다. 케이티도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케이티도 어쩌면 언니가 살아있으면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언니가 출소하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는 우리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활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를 찌른 이가 부모의 죄 없음을 깨달으면 부모처럼 되려고 합니다. 인간을 찔러서는 인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된다면 그분 죽음이 내 믿음이 없는 탓이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그분처럼 될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3대 테너로 불리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중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유명한 앙숙 관계였습니다. 1984년 당시 카탈로니아 지역은 스페인을 다스렸던 마드리드 지역으로부터 자치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마드리드 출신의 도밍고와 카탈로니아 출신의 카레라스 역시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순회하는 공연을 하면서 서로 같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공연했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카레라스는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 장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에는 백혈병 치료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레라스는 매달 골수이식과 수혈 등 고통스러운 치료를 위해 미국을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생존 확률은 10%였습니다. 막대한 치료비로 인해 재정이 곤란해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경제력이 한계에 다다른 그때 그는 마드리드에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재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르모사(Hermasa)라는 재단의 도움으로 카레라스는 치료를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재단에 가입하려던 카레라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준 재단의 설립자이자 후원자가 도밍고이며, 애초에 그 재단을 설립한 목적이 카레라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도밍고는 도움을 받는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익명으로 재단을 운영해왔던 것입니다.
카레라스는 크게 감동하여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도밍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레라스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도밍고처럼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도밍고처럼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모습 자체로 우리가 죄인이고 피조물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오늘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찔렀다는 죄책감에 그분은 이제 나의 주님이 되고 또 그 부활은 그분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찌를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렇게 닮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토마스는 그리스도처럼 순교하여 온전한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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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31: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두 장면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선교사명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죄권이 부여되는 장면과(19-23절) 둘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토마스의 불신앙이다.(24-29절)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으나 현재에도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부활은 항상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됨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는 잠겨있는데도 드나드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통치에 대한 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선교사명, 그리고 사죄권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절)이라는 표현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의 해방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라는 선교사명이다. 이 파견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세상에 전할 것이며 구원의 행위를 채워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다음의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 행위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참조: 창세 2,7; 에제 37,9)을 의미한다.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사도가 고백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은 토마스 개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개개인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 못하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분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토마스의 정신자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생명의 절대적 주님이 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때 진정 그분의 증인으로 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시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다(참조: 사도 5,12-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사도 5,12) 이루심으로써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사도 2,36 참조)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고 현존하시게끔 하여야 하는 삶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다.
묵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일곱 등경 가운데 서 계신 분(묵시 1,13)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묵시 1,18) 그분은 이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사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부활 후 필부축제가 끝나는 날로 부활의 기쁨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날이다. 부활은 이제 단순히 지내는 어떤 기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연장되며 새로운 의미를 주고 선포되는 그런 날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위하여 매일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그 부활의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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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토마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5-29)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우리 교회의 ‘공식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에 도달하기까지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부활 후의 이야기들을 보면, 모든 사도들과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보더라도 유령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토마스 사도 한 사람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고 의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최초로 한 사도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은 믿지만, 그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혹시 유령이었는지, 아니면 ‘영적인 존재’였는지 의심스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했기 때문에(루카 24,37), 토마스 사도만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은, ‘안 믿겠다.’가 아니라 ‘믿고 싶다.’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강하게 희망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신 일은, 토마스 사도를 위한 ‘특별한 배려’인데, 토마스 사도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배려입니다. (희망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믿고 싶은 희망’은 ‘믿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그 노력은 믿음으로, 다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확신은 신념이 되고, 신념은 순교로 이어집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서, 사도들의 증언만 듣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과정은 다르지만, 믿어서 누리게 되는 ‘복’의 차이는 없습니다. 사도들처럼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이 받는 구원과, 보지 않았지만 증언만 듣고서 믿는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은 ‘같은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부활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주님이시며 메시아시라는 ‘증언’이고, 동시에 그분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이고, ‘초대’입니다. 이 권고와 초대에 응답하거나 안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도 사도들이(교회가) ‘당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 이어서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고,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혼자서만 신앙생활하고, 혼자서만 구원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볼 때가 더러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 갖지 않고 혼자서만 살다가 혼자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없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고해성사를 세우신 말씀이고, 사도들에게 고해성사 직무를 맡기신 말씀입니다. (용서는 권한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으로 보이는데, 진짜 뜻은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해 주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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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의 생년월일은 주민등록에 있는 것과 집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은 주민등록에 있는 저의 생년월일은 기준으로 저를 기억합니다. 집에서 이야기하는 생년월일을 기록하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학교의 학적부에도, 은행의 전산에도, 사제의 인명부에도, 여권에도 주민등록에 기록된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1년 어리게 기록된 것 때문에 고민도 있었습니다. 신학교는 나이순으로 순서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1학년 때 50명이 같은 강당에서 잠을 잤습니다. ‘대침실’이라고 불렀습니다. 1년 늦은 나이 때문에 입구에서 가장 먼 자리로 배정 받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될 때도 1년 늦은 나이 때문에 조금 늦게 본당 발령을 받았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1년 늦게 기록된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1년을 더 젊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년을 더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주민등록에 등록된 저의 생년월일보다는 부모님께서 알려주시는 생년월일을 본래의 생년월일로 믿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양치기 소년’을 읽었습니다. 양을 치던 소년은 심심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습니다.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늑대는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다시 심심했던 소년은 ‘불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불은 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늑대는 양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진짜 불이 났습니다. 소년은 ‘불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장난은 마을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서 양치기 소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성공, 재물,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편리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거짓믿음입니다.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그런 믿음의 끝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과학, 기술, 수학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대문명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유사믿음입니다. 과학, 기술, 수학으로 쌓은 믿음은 바벨탑과 같아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한 믿음입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됩니다. 죽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이 믿음으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년월일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공, 재물, 권력을 얻으려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학, 기술, 수학의 법칙에 대한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 때문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까지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의 믿음입니다. 2000년 전에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억울한 사람, 갇힌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부활 하신 주님께서는 무슨 커다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가족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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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2주일, 교회는 토마스의 불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제자들 가운데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여드레 뒤, 토마스를 포함한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 구절 뒷부분의 그리스 말 본문을 직역하면,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어라.’입니다.
토마스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껏 품어 온 불신과 의심을 내려놓으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이중 고백을 포함합니다. 이 탁월한 표현은 초기 교회 공동체 전례 때 사용되었을 신앙 고백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과 증언, 믿음과 행복이 긴밀히 연결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목격 증인의 증언을 믿음의 토대로 삼습니다.
이러한 신앙 전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성경과 성전, 수많은 성인과 이름 모를 이웃의 힘 있는 증언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끊임없이 초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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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님(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보도주간)]
<상처는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함께했던 동지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스승님을 보고 환호하 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렇게 손 쓸 겨를도 없이 일이 진행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체포되셨고, 재판과 형 집행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잘 안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고 성전의 이권을 챙기며 떵떵거리고 사는데, 스승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끔찍한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제자들도 갑자기 겁을 먹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로 우리까지 잡혀가는 것은 아닌지.…. 언제 소환장이 날아오고,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스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분명 지난 삼 년간 따라다니며 함께 지냈던 그 스승님이 분명합니다.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도 보여주십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너무나 반가웠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마침 그날, 우리 동지 중 하나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못 자국이 선명한 스승님이었다고 전해주었지만, 토마스는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 합니다. 하긴, 다시 살아오신 스승님을 직접 보고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데,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의 반응도 이해는 갑니다. 그 일이 있고 여드레 뒤, 우리는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 들어 집안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스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분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셨 습니다. 그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토마스에게도 다가가셨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토마스에게 당신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의 상처도 만지게 해주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도 눈물을 흘리며 스승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스승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만 빼고, 저 문 밖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 니다. 끝까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율법 학자들과 사제들은 십자가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당신 상처를 보여주셨습 니다. 우리 역시 그 상처를 보고 만져보았지만, 이젠 무섭 지 않습니다. 상처는 십자가의 결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갔던 저 문을 열고 얼른 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것을 빨리 사람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지금 스승님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만나러 달려가야겠습니다. 그 상처가 끝이 아니라 고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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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정영우 요한 세례자 신부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 입니다. '자비'란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거나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이라서 조건이나 이유 없이 '무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하셨고,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복음 말씀 곳곳에서 밝히셨습니다.
부활 제2주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욕심과 시기와 질투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 자비의 승리로 읽힙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이르십니다. 이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입니다. 이로써 큰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만남 으로써,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이제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모두 벗어던지고 예수님과 함께 참다운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토마스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은 세례 받은 모든 신앙인이 미사의 성체 성혈 거동 장면에서 속으로 부르짖는 신앙고백입니다.
흔히들 '남의 떡이 커 보인다" 하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합니다. 이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상대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다면,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 는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만 보지 않고,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한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된 마음 의 평화를 얻으면서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제2독서 말씀이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들려 주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 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묵시 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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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이형철 바오로 신부님]
<곳곳에 전해지는 하느님의 자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이었던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그녀가 받은 메시지를 토대로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고,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자비주일과 특별히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 그분의 자비로움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어 주목해 봅니다.
첫 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과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 많은 병자들과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치유되는 상황을 전해줍니다. 사람들은 놀라운 체험을 하며 주님을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을 이웃이 더 없는지 살펴보고 거들어주느라 분주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사도 5,15)”라고 할 정도입니다.
온 고을이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느끼며 넓은 마음으로 주변을 돌보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은 참으로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모습입니다. 이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 자애로운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주는 장면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을 대면하시며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평화로움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인류의 평화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이라기보다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오는 잔잔하고 내면적인 평화에 가까울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받고 고통의 현장으로 가실 때 당신을 저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에 대한 섭섭함 따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유다인들에게 붙잡힐까봐 잔뜩 마음이 졸아져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며 안심시켜주시고, 자신을 유령인줄 착각할까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확인까지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라고 말했던 토마스에게도 의문을 씻어주기 위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하십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겪는 두려움과 불안, 의심, 나약함과 죄의식 그 자체를 이미 긍정하시고 당신 안에서 평화로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용서의 선포자로 파견하고자 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 용서의 표징이 되어 오셨듯이 제자들 역시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고 베풀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죄와 죄의식에 얽매여 사는 것은 성령의 시대에 걸맞지도 않고 하느님의 뜻도 아닐 것입니다. 자비주일을 지내는 오늘 용서를 통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드넓은 사랑을 느끼며 감사드리고, 그분의 사랑이 곳곳에 전해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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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상용 야고보 신부님]
<“왜 나만 갖고 그래?”>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유행어가 있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다. 대통령을 지냈던 전두환씨와 관련된 말인데 코미디언들과 정치인들이 많은 흉내를 내면서 상당한 유행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가 부활 제2주일이 되면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주님을 만났다는 말을 하자 그 말을 믿지 못한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토마스 사도의 말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 말씀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토마스 사도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고 있다.
사람들은 토마스 사도의 의심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그렇게 토마스 사도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의심이 많았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해봐야 믿겠다고 한 말은 다른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뿐이다. 다른 사도들이 그 말을 안 한 것은 그 말을 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마자 그들에게 바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은 이미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보았고, 토마스 사도는 못 보았으니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다른 사도들이 토마스 사도보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토마스 사도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부활을 믿지 못했다.
토마스 사도가 믿지 못한 것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바로 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 토마스 사도께서 부활 제2주일만 되면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말씀 하실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모습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고,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나는 믿었는데 토마스 사도는 의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도들 중에도 없고, 오늘날 우리들 중에도 없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유명한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의심과 고백의 단계를 거친다. 태어나자마자 성인 성녀가 된 분이 없는 것처럼 태어나면서 부터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다.
많은 시련과 고난과 의심과 불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백한다. 그리고 또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깊고 굳은 믿음의 단계로 조금씩 성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신부인 나 역시도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아니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또 기대해 본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다시 고백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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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종선 갈리스토 신부님]
<주님의 상처>
“나는 …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하루는 새벽 미사를 앞두고 성전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전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우린 정말 잔인한 사람들이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매달려 있는 주님을 제일 크게 만들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매일 쳐다보고 있으니.” 그러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마음이 무뎌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자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바람대로 상처를 마주하게 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이 상처는 토마스에게만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셨던 것도 바로 상처입니다. 이 상처는 세상의 아픔들을 감싸 안기 위해서 감수해야만 했던 상처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물과 피)으로 이 세상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상처는 우리에게 마음 아픈 속죄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지니신 그 상처가 하느님 자비의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상처를 품에 안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모여들 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어놓고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상처입니다. 이 상처로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십자가 위의 주님 상처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 너무도 흔하게 십자가들이 걸려 있습니다. 집에도, 성당 곳곳에도. 지금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그곳에 상처투성이의 주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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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건네는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성령과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증언을 듣고도 제자들은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방안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로 극복됩니다. 이 평화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불신과 의혹은 평화의 인사만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평화를 건네는 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인지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과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기쁨에 차서 불신에서 불완전한 믿음을 거쳐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넘겨주고 또 심장에서 물을 흘려 보내실 때 온 세상에 주어졌지만,부활하신 후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당신의 숨을 통하여 직접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뒤를 잇는 교회 공동체를 거룩하게 정화시키십니다. 이 구절은 가톨릭 교회에서 고백성사의 근거가 됩니다.
기쁨과 평화,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토마스는 불신과 의혹의 어둠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메시지도 듣지 못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은 마리아의 고백을 반복하며 “우리는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며 부활 신앙을 그에게 전해 주려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조건이 붙은 불완전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토마스는 부활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예수님의 시신에 집착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부활한 몸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이 또 다시 잠긴 문을 통과하여 토마스와 다른 제지들이 함께 있는 방안에 나타나십니다. 놀랍게도 그분은 토마스가 바라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십니다. 토마스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 본 순간 다음과 같은 참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 사도의 이 대답은 그의 완전한 믿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리스도에 관한 요한복음서의 가르침 전체를 요약 합니다. 로고스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나다”(에고 에이미)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의미,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말씀 등을 모두 수렴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이 같은 완전한 고백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만나뵙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더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성서 말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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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는 제자들에게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 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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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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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평화>
2022. 04. 24 부활 제2주일 /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과 토마스, 복음서를 쓴 목적)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평화>
닫힌 평화
열린 평화
두려운 평화
설레는 평화
가르는 평화
이어주는 평화
홀로의 평화
더불어 평화
메마른 평화
샘솟는 평화
죽이는 평화
살리는 평화
거짓 평화
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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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정직한 믿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
보고 믿는 것은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합니다. 어찌 되었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하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H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데레사). 결코“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얼굴이 잘생겼는데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랍니다. 얼굴은 잘생겼는데 말은 잘못하거나 얼굴은 못생겼는데 말은 잘하면 ‘천만다행’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는데 말도 잘못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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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2-23)
<의심을 버리고 믿자!>
믿는 이들의 목적은 항상 오늘 부활하는 것이고, 마침내는 영원히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항상 오늘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해 들어야 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주간 첫날 저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시면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시며, "성령을 받아라." 이 성령을 받고 너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20,25) 하고 말하는 토마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7.2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를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1,17-18)
의심을 버리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것! 의심을 버리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굳게 믿는 것!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길이고, 영원히 부활하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믿고, 지금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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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운전을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이 운전경력이 이제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처음에는 운전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차선을 바꾸는 것도 힘들었고, 차 속도를 높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차하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초보 때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보 때의 능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운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신부님께서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사제서품 받고 나서 운전면허를 땄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신부님, 저는 면허 딴 지 벌써 40년이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운전해본 적이 없답니다. 소위 장롱 면허 소유자였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못 하는 아주 소용없는 운전자일 따름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도 실패도 체험하고 피하고 싶은 고통의 순간도 겪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시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면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실패의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지켜주셨던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실패 안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가 없었기에, 나중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부활 소식을 믿을 수 없어서 제자들의 증언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도 있는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이르십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말한 대로 손가락이나 손을 못 자국에 넣어 보지 않습니다.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요. 믿음의 유형은 이렇지 않을까요?
첫째는 보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들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몰았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보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마지막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이 전혀 없어서, 어렵고 힘들면 곧바로 넘어질 사람입니다. 절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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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의 여정>
-하느님을 닮읍시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방금 부른 자비하신 하느님을 노래한,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더불어 언젠가 신나게 불렀던,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라는 화답송 후렴도 생각납니다. 이런 짧은 성구를 끊임없이 노래함도 기도의 생활화에 참 좋은 수행이 됩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주일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참으로 가장 행복한 분들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봄꽃 만발한, 신록 눈부신 파스카의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전례중, 가장 아름다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소원이자 기쁨은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복된 우리의 존재들입니다. 애당초 자비를 선물로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이 자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비를 사랑함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훈련', 얼마나 멋진 말마디입니까! 깨닫고 보면 영성생활에서 모든 수행은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훈련입니다. 운동선수의 훈련과 흡사한 우리의 영성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비의 여정’이고 우리의 신원은 주님 ‘자비의 전사’이며,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는 일입니다. 과연 날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워지는 자비의 여정, 하닮의 여정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 아버지는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이런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분이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갈 때 참행복도 참기쁨도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결정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을 의심하던 토마에게 주님께서 발현하셨을 때 토마 사도의 고백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을 통해 환히 계시된 자비하신 하느님을 체험한 토마의 고백에 대한 주님의 응답 말씀이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정말 우리 모두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토마 사도만이 아니라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파스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주님은 동시에 하느님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바로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파스카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숙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선물들을 하루하루 최대한 활용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모두가 파스카의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문득 행복기도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평화, 기쁨,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저는 요즘 가끔 이런 묵상을 합니다. 지상에서의 파스카 봄철의 꽃들과 신록이 이렇듯 아름다우면 우리가 장차 갈 천상의 천국에서의 아름다움은 어떻겠는가, 천상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지상의 아름다움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파스카 주님의 그 많은 선물중 참 좋은 선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상의 참 좋은 선물들입니다.
첫째, 평화와 기쁨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자 명약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평화와 기쁨을 지닌 이들이 정말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건강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재물 다 지녔어도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삶의 허무와 무의미, 무지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파스카의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두려움의 벽은 사라져 평화의 문이 됩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담가 놓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얼마나 놀랍고 반가운지요!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바로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서시며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마침 어제 면담 고백 성사를 보고 간 분께 다음 ‘말씀 처방전’에, “웃어요!” 스탬프를 찍어 드렸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가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엄베드로는 행복하다. 엄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9)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나타나실 때 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우리의 평화가 주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갈망하는 평화의 선물인지요. 주님의 평화의 선물 역시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일주일후 세 번째 토마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선 당신의 평화를 선물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몹시 기뻐했다 합니다. 바로 두려움의 벽을 평화의 문으로 바꾸시는 주님이요 평화의 문을 통해 선사되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 살 수도, 빼앗아 올 수도 없는, 또 누구도 앗아 갈수도 없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어지는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평화도 기쁨도 훈련입니다. 의식적으로 깨어 부단히 평화롭게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영성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시간 역시 평화와 기쁨의 영성훈련시간입니다.
둘째, 성령과 용서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하나의 선물을 선택하라면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을 선택하겠습니다. 성령안에는 온갖 선물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까다롭지 않습니다. 성령을 갈망하며 마음을 활짝 열 때 주님은 아낌없이 성령을 주십니다. 평화와 기쁨의 선물에 이어 성령과 용서를 선물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숨을 불어넣으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서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신후 숨을 불어 생명을 넣어 살게 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용서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신적 사랑입니다. 참으로 성령을 통해 용서 받을 때 비로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새삼 용서는 은총이지만 또 훈련이기도 합니다. 용서의 훈련입니다. 하루하루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용서의 훈련에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의 은총과 훈련과 더불어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셋째, 믿음과 치유입니다.
믿음도 치유도 파스카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이 신바람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 무수한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십니다. 백성은 사도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납니다.
파스카 주님을 통한 믿음의 선물입니다. 믿음이 부족합니까?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사 간청하십시오. 이런 믿음의 선물에 따른 치유의 선물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자들과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 들었고 그들은 모두 낳았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치유보다는 요즘 회자되는 영어 힐링이란 말이 실감나게 와닿습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물론 우리 천주교야 말로 힐링의 원조입니다. 힐링을 찾아 엉뚱한 곳을 찾지 마십시오. 믿음을 지니고 참 좋은 힐링 센타인 교회나 수도원을 찾는 것이 치유의 첩경입니다. 무엇보다 미사전례보다 영육의 힐링에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의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가장 행복한 분들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들과 신록의 파스카 봄날에,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전례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하느님의 은총 선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자발적 사랑의 응답이 끊임없는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요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기쁨, 성령과 용서, 믿음과 치유를 선물하시어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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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8Ey468yW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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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자비는
거창하지 않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자비의
감사로운
실천이다.
그래서 자비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다.
간절하고
진실한 사랑이
십자가의
자비이다.
서로를 살게하는
십자가처럼
자비는
맹목적이지
않다.
자비는
나와 너를
이어주는
참된
소통이다.
삶의 진리는
언제나
하느님
자비의
끊임없는
체험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덮여있는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의
마음으로
나와 너를
바꾸어 놓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자비의
관계이다.
어떤 관계속에
살고 있는 지를
성찰하게 된다.
삶을 꿰뚫고
흐르는
하느님의
뜨거운
십자가의
상처에서
자비가 탄생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처럼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자비
나누는 자비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비가
사랑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은
우리들이다.
작은 실천
그 자비의
실천이
복음의
핵심이다.
십자가의
부활
십자가의
자비를
닮아가자.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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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토마스 사도는
이 순간 부활하신
주님, 못 자국의
상처를 통해
뜨겁게 만납니다.
자비는 목숨처럼
뜨겁고 자비는
십자가의 상처처럼
어우러집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살아계신 자비의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자비의 시작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을 때
상대방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은총의 자비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이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자비는 생명을
살리는
기쁜소식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존중하십니다.
존중은 헐뜯는
악한 마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만이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자비는 서로의
마음을 평안케
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선한 일을
우리가 실천하는
기쁨입니다.
자비는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를
뚜렷이 직시하는
생명존중임을
체험하며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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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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