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일 뿐이다
《존재와 무》에서 그려진 비극적인 인간의 모습과 달리 사르트르 자신은 사회참여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프랑스 내에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약자의 편에 섰으며, 프랑스에 반대해서 알제리 독립운동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게다가 게릴라 투쟁 중인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를 만나기 위해 남미의 오지까지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또한 그는 상당 기간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공산당에서 탈퇴한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꺾은 적이 없다. 얼핏 《존재와 무》의 결론은 사르트르의 현실적 모습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에게 현실참여와 사회적 연대의식을 강조한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와 무》에 나타난 인간관계의 원초적인 비극은 유효하다.
사르트르는 후기 미완성 저서인 《변증법적 이성 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1960)에서 대자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저서의 핵심은 개인의 사회적 연대의식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근본적인 인간관은 크게 변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인간의 사회 혹은 집단의 근본적인 형태를 ‘수열체(groupe-sérié)’라고 부르는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수열체란 인간들 간에 어떤 필연적인 끈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뜻한다. 수열체를 이루는 인간들은 단지 우연히 같은 시간이나 공간에 처해 있을 뿐이다.
수열체의 설명을 위해서 사르트르는 버스의 예를 든다. 그는 인간의 집단을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과 같다고 본다. 이들은 각각 버스를 타기 위해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이들은 같은 버스를 타든가 혹은 다른 버스를 타게 될 것이다. 버스를 타면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게 맺어주는 끈은 버스 노선이다. 이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가다가 잠시 모였을 뿐이다. 가족을 포함하여 학교, 국가 등 모든 사회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수열체일 뿐이다.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작품은 사르트르의 수열체를 잘 보여준다. 자코메티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바닥이라는 공통된 지평에 모여 있지만 누구도 서로를 향해 있지 않다. 더군다나 기이할 정도로 왜소하게 보이는 각각의 인물들은 이 작품에 아무리 다가서서 보더라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 〈걷는 세 사람〉(Three walking men, 1848)에 관하여 그의 작품이 멀리 떨어진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고 평하였다. 하나의 공통된 지평에 있으면서도 서로 제각기인 그러한 상태는 사르트르가 말한 ‘각자 스스로에게 타자인 만큼 타자와 동일한’ 수열체의 모습을 완벽히 구현한 것이다.
물론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탔다 하더라도 사고가 나서 승객 모두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이때는 휴머니즘이 발생하며 심지어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러한 집단을 사르트르는 ‘융합집단(groupe en fusion)’이라고 부른다. 이 융합집단의 가장 완벽한 형태는 혁명집단일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문제가 해결될 경우, 즉 사고 처리가 완료될 경우 다시 사람들은 수열체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근본적으로 대자존재인 인간은 고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는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일 뿐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