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기쁘게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든다. 즐거운 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정말 좋은 영화가 아니면 보지 않는다. 뉴스는 온통 불의하고 가슴 아픈 소식들로 가득 차 있다. 부부생활이 어떤지 모르지만 한자리에 있어도 함께 있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을 거 같다. 인생은 혼자서 살아가는 외로운 나그네인 거 같다. 외롭고 무거운 마음을 온전히 완전히 내려놓을 곳을 찾지 못한다, 이 세상 안에서는.
코헬렛은 세상이 불의하고, 모든 게 허무라고 말하면서도 젊었을 때 그 젊음을 즐기고 근심을 떨쳐버리라고 권한다. 비록 그 젊음도 청춘도 다 허무여도 말이다(코헬 11,9-10). 삶의 매 순간을 즐기라는 말인 거 같다. 젊음도 한때이고 좋은 시간도 결국 끝난다고 슬퍼하지 말고 그때 그때 좋은 시간을 즐기라는 뜻으로 들린다. 아마 허무한 인생과 세상사 안에서도 하느님이 이루시는 섭리에 자신을 맡기고 그날 그날 기쁨을 누리라는 뜻이었던 거 같다.
그런데 코헬렛은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충만한 기쁨, 영원한 기쁨을 몰랐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 기쁜 소식이다. 병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무거운 짐을 지우고 주눅 늘게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꾸짖는 모습도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그것보다는 주님의 부활이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잘하려고 해도 잘 안되고, 정의와 공정을 바라지만 불의와 부정이 더 세 보인다. 게다가 혼자 애쓴들 그게 세상의 정의와 평화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느님의 아드님도 결국 불의와 부정의 희생자가 되셨는데 말이다. 만일 그렇게 예수님 선교 사명이 끝났다면 어떻게 할 뻔했나.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나의 이 외로운 인생길에 진정한 동반자가 되신다, 끝까지.
입으로만 주님, 주님 찾는다고 다 주님의 제자나 친구가 되는 게 아니다. ‘오 주여!’라는 말은 감탄사나 한탄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안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주님을 찾는 말이다. 좋은 친구들, 배우자, 자녀 그리고 부모도 다 멀어지고 때가 되면 내 곁을 떠난다. 그래서 사랑도 결국 허무인 거 같지만 그 사랑은 거짓이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고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표징들이다. 예수님 분부대로 당신의 이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에 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지만, 지금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그분은 처형되거나 패배하신 게 아니라 우리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함께 계시려고 스스로 그렇게 되신 거다.
예수님, 가장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고 어렴풋이 들릴 수밖에 없지만 그날에는 반드시 얼굴을 맞대고 뵙는다고 믿습니다. 주님이 계셔서, 제게 이 믿음을 주셔서 이 불의한 세상 속 외로운 인생길이 기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보다 소중한 이 신앙을 지켜주시고 저의 모든 발걸음을 주님께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