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성도들이 지혜롭게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것을 이렇게 보시고 “참 지혜롭다! 참 복되게 산다! 참 잘 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 잠언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오늘도 마음 문을 열어서 지혜를 받을 수 있는 심령들이 되며 그것을 삶의 자리에 심는 것으로 결실하여 복된 삶을 누리게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기록된 말이 ‘입술’이라는 말입니다.. (13)‘입술의 허물’, (14)‘입술의 지혜’, (19)‘진실한 입술’, (22)‘거짓 입술’.. 하나님은 우리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 하고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그 입술의 말로 그 사람을 삼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와 같습니다.. 입술은 열매와도 같습니다.. 그 사람이니까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니까 선한 말을 하는 것이고 악한 사람이니까 더러운 욕설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그 마음에 쌓은 것(가득한 것)을 입으로 냄이라! 믿음의 사람은 힘들어도 할렐루야가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 입으로 믿음을 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음으로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믿음을 말로써 뿌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표현할 때 이사야 57:19에서 “나 입술의 열매를 짓는 여호와가 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말농사 지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14절의 ‘입술의 열매’라는 뜻도 말을 심고 거두는 과정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씨라는 것이 참 신비합니다.. 그 작은 씨 안에는 생명체가 담아야할 모든 유전정보가 있고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서 단단한 땅을 뚫고 발아합니다..
씨가 환경에 반응하듯이 우리의 말도 환경에 반응합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한 것처럼 농부가 뿌린 씨가 다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옥토밭 즉 관리된 밭에서만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말은 관리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허망하고 헛된 말을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이 관리된 옥토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관리됐다는 것은 계속해서 말하고 진심으로 말하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말의 씨가 발아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부분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우리 입에서 뿌려진 씨가 자란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씨뿌리고 그해 먹는 상추도 있지만 씨뿌린 후에 묘목이자라고 다시 옮겨 심어 몇 년이 지나야 그 열매를 먹는 유실수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씨라도 그 씨가 지닌 파급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3장에서 겨자씨가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새들이 깃들인다 하셨습니다.. 마17장에서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작은 것이 지닌 엄청난 성장성과 확장성 그리고 그로인한 파급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4절의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을 누린다!”가 진리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 말을 심는 것이고 믿음생활은 그 심은 말의 씨가 발아하도록 관리하는 시간입니다..
말을 관리하는 중에 특별히 오늘 본문에 기록된 본문 16절에 기록된 <분노하는 말>과 18절에 기록된 <함부로 하는 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16절입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우리가 분노를 일으키는 때는 모욕과 수모를 당했을 때입니다.. “이것들이 나를!” 하고는 얼굴이 붉어지고 파르르 떨기도합니다..
여기서 당장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발끈해서는 분노와 폭력이 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분노가 일어도 당장은 참습니다.. 분노를 참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무조건 참습니까! 분노가 일어날 때 무조건 참으면 병납니다!..” 분노는 결국은 어디에서든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밖에서 터지면 폭력이고 안에서 터지면 화병입니다.. 세상의 정신과에서는 분노를 터뜨리라고 합니다.. 인형을 때리든 베개를 던지든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사람은 분노가 있으면 예수님께로 가지고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무개가 너무 미운데 어떻합니까! 시월드에서 나오고 싶습니다! 날 괴롭히는 저 인간은 왜 감기도 안 걸리는 겁니까!” 우리가 아는 시편의 상당부분이 이 이야깁니다.. 분노를 하나님께 다 쏟는 것으로 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화를 내라는 것이 아니라 속상한 나의 마음을 그대로 쏟아놓는 것을 말합니다.. “물같이 네 마음을 내게 쏟으라!” (애2:19)
다음으로는 18절에 “함부로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상 ‘분노하는 말’과 같은 선상에 있는 말입니다.. 함부로 하는 말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함부로 하는 말이 칼이라면 지혜로운 말은 약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는 말은 찌르는 칼이 됩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배려의 말은 치료하는 말이 됩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지기고하고 갚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양약이 되는 말은 거창한 설교나 화려한 충고가 아니라 지나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 정도면 훌륭하지..” “당신이 최고야!” 마찬가지로 우리를 찌르는 말도 일상의 평범한 말입니다.. “니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살면서 해 논 게 뭐있냐!”
말이란 게 참 신기해서 지나가면서 하는 말인데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치료하는 약으로 온 몸에 퍼지기도 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을 바꾼 말 한마디..”입니다.. 상대방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한 은 아닌데 거기서 아 그렇구나 하면서 무엇인가를 캐치하는 것입니다.. 치유와 깨달음과 지침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회복탄력성이 생깁니다.. 디프레스 상태에서 원래의 자리로 도약하는 힘입니다.. 마음에도 몸과 같이 근육이 있어서 마음의 근육이 발달되면 스스로의 감정과 충동을 잘 통제하고 다스립니다..
또 다른 말로는 맷집이 좋은 것입니다.. 몇 번 맞아본 것으로 스스로 훈련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온실속 화초로 자라나다가 처음 한 대 맞고는 원래대로 돌아가질 못합니다. 그래서 서점가에는 위로와 치유서적이 베스트셀러입니다.. 자존감수업, 미움받을 용기, 무례한 사람을 대처하는 법.. 그 만큼 상처받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속에 있는 것 다 말하지 않고는 못살아.. 근데 뒤끝은 없어..’ 이런 소리하면 세치 혀를 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함부로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파르르 떨고 눈에 힘주고 목에 핏대 세우고 받아치지 않습니다.. 수욕을 입고 모욕을 당했다하더라도 당장 화내지 않습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터뜨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이 되어서 성령충만케 되면 누가 뭐라 하는 소리에 귀가 순해집니다.. 즉 모욕과 수욕의 말을 좀 들었다고 해도 가장 큰 수욕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의 배신과 모함과 조롱과 폭력에 억울하게 말 한마디 없이 끌려가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