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오기 전, 출장이 잦은 일을 하다 보니 곧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일이 생기곤 했다.
대전에서 익산 쪽으로 하행을 할 때나, 익산에서 대전으로 상행을 할 때면 논산훈련소 곁을 지나게 되는데, 그쯤에 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 다리가 하나가 있다.
잊을 수 없는 다리.
그 다리 위에는 스물다섯 살의 내가 서있었다. 계급장도 없는 모자 하나, 땀에 절은 훈련복에 짝이 맞지 않는 운동화를 신고, 제법 큰 돌 하나를 등에 진 채, 초점 풀린 눈으로 망연히 그 다리 밑을 오가는 승용차며 고속버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내가 보인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이룬 것은 없었고, 평생의 짝이라 마음 정한 여자에게 기다리란 말 외엔 아무런 희망도 남겨주지 못한 채, 입대를 해보니 훈련 동기들은 대부분 나보다 너 덧 살이 어렸다. 동기라곤 하지만 쉽게 말 놓기가 어려웠던지, 그들은 내무반장이 없을 때면 나를 형이라고 불렀는데, 그 형이란 소리가 싫지 않으면서도 창피했던 것은 방기한 내 젊음의 시간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보다 나이 어린 누군가가 나를 선생이나 선배, 혹은 형이라 부를 때, 어색하고 부끄럽긴 마찬가지다. 그들 앞서 먼저 산 사람으로서 그들을 이끌어줄 또렷한 길 하나 아직 마련해두지 못했으니 왜 아니 그럴까.
고속도로 건너편 야산에 사격장을 만든다고 했다.
매일 정해진 일과에 따라 훈련이 끝나면 저녁 식사 전, 훈련병 모두는 등에 큰 돌 하나씩을 지고 그 다리를 건너 야산 앞에 등에 진 돌을 부리고 돌아왔다.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떠나온 곳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을까? 그 다리 위에만 서면 내 발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다리 아래를 쌩쌩 지나다니는 차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초점이 풀려있었다. 마음엔 겉으로 내뱉을 수 없는 억눌린 그리움과 답답함이 뒤섞인 채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김성동 원작의 '만다라' 영화가 생각이 났다. 땡중 지산이 스승에게 받아 늘 끌어안고 살던 '목이 좁은 병 속에 갇힌 새가 있다. 어찌 끄집어낼 것인가?'란 화두. 그 화두는 지산에게서 내게로 옮겨와 군 입대 전까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살았었는데, '군에 입대하여 훈련병이 된 내 처지가 바로 그 화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 속의 그 새가 바로 나였고, 나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군대가 바로 그 목이 좁은 병이었다.
'그래... 이왕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이라면 내가 화두 속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보자.'
생각 하나 바꾼다고 가슴에서 끓던 그리움과 답답함이 금방 진정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만큼은 부질없는 잡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시간... 공간.. 생명... 벽... 나... 마음... 자유... 사랑... 등등의 상념과 의문, 반문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번갈아 돌고 도는 생각의 순환 속에, 그 다리 위를 지나는 발걸음이 차츰 평시의 속도를 찾아갔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를 가둔 병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리움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기다려 준 짝과 결혼을 하고 혼자만의 미래가 아닌 둘의 미래를 위하여, 와중에 태어난 자식들의 미래까지를 포함해서 젊은 날의 열정을 일에 쏟아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출장길, 무심코 몇 번 지나쳤을 그 다리 밑을 지나다가 문득 위를 쳐다보니 초점 풀린 눈으로 망연히 나를 바라보는 스물다섯 살의 내가 보였다. 잊고 있던 상념과 의문과 반문들이 순간 되살아났다.
"이젠 목인 긴 병 속의 그 새를 끄집어냈나?"
다리 위의 내가 다리 밑을 지나는 나에게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명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나는 여전히 새로운 병 속에 갇혀있다는 느낌이었고, 나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나라고 인식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그 병 속을 빠져나올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고개를 숙이고 그 다리 밑을 지났었다.
그 후로 그 다리 밑을 지나노라면 늘 스물다섯 살의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물었었다.
"새는 자유로워졌나?"
나도 웃으며 이렇게 대답을 하곤 했다.
"아직... 새장 속에 살지. 언젠가는 하늘 날 꿈을 꾸면서..."
첫댓글 마음자리님은 25 살에 군대를 갔나 봅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23살에 군대를 갔습니다
훈련소는 경기도 수색에서 받았는데 대학 다니다 온 훈련병이 반이나 되었습니다
후반기 공병학교에서도 학벌이 있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대에 가니 문제가 생깁디다
군대 선배들의 갈굼은 상상을 초월합디다
학벌이 있다는 이유로 갈굼은 더 심했지요
하사관이나 초급 장교에게서 까지도 학벌이 있다는 이유로 갈굼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빴다도 많이 맞았구요
그당시 나는 사회에 나오면 너희들보다 잘 풀릴거다 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힘든 군대생활을 버텨냈습니당 우하하하하하
그래도 나는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때에는 젊음이 있구 희망이 있었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
이사진은 제대를 몇개월 안 남기고 작업을 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당
나는 공병대 출신으로 군대에서 3년 내내 작업을 많이 했습니당 우하하하하하
태평성대님 군 생횔하실 때가 저 많이 힘들었을 때지요. 공병대 현역 사진이라 몸매가 아주 건강하고 보기 좋습니다. 저는 후방 부산에서 수송부대에서 근무를 했어요. 큰 도시에 초보 운전병들이라 접촉 사고가 많다보니 단체기합이 좀 많았지요. ㅎㅎ
대한의 건장한 남성이면
군입대는 마땅한 것이지요.
무슨 심중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꿈과 열망이 끓는 시기에....
늦은 나이에 군 복무를 하다보니 생각이 많았었지요. 돌아보면 속을 끓이며 살던 그 시절이 저를 쑥쑥 자라게 만든 것 같습니다.
가기 싫지만 가야 하는 곳이 군대일 겁니다.
나라의 사정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요.
여자들은 입영에 관해 남자들에게
빚을 졌다고 봐야 하겠지요.
군이 아니더라도 그 시기에 있을 법한
고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겪었던 혼돈의 시기인 걸요.
지금은 편안해 지셨길 바래 봅니다.^^
군대 생활도 지나고 보면 사는 길 위에 피었던 꽃 같습니다.
지금은 아주 평안합니다.
나날이 즐겁습니다. ㅎ
늘 남다른 덕장의 러더십이 있는 마음자리 님도
새 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시네요.
어쩌면 그런 마음이 이토록 잼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런지요.
넘 추워졌는데요.
'그 다리 밑을 지나노라면'을 읽고나니
갑자기 추위를 이겨낼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
감사의 맘을 놓고 갑니다.
그 동네도 추운가요?
한국만큼 춥진 않지만 여기도 좀 추워졌습니다. 지금 캔터키 주에 있는데 밤기온이 영하1도 정도 되네요. 물론 저는 따뜻하게 잘 있습니다. ㅎㅎ
뉴스 들으니 서울이 영하 9도라던데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언젠가는 하늘 날 꿈을 꾸며 사는 그 새장을 벗어나면
왠지 자유를 얻은 기쁨 보다 잃어버린 꿈을 그리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날개짓을 두려워하니 이렇게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저를 봅니다.
저도 꿈은 실현시켰을 때보다 품고 살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 제가 꾸던 꿈 중 하나가 현실이 되어 끝 없는 길 위를 달리며 사니 행복하긴 합니다만 품고 살 때가 더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ㅎ